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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테러리스트란다. 진짜 도둑은 따로 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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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내가 테러리스트란다. 진짜 도둑은 따로 두고…"

[용산 참사 한 달] "진실을 알고 얘기해 달라"

지난 18일 저녁, 서울 용산 한강로 2가. 차들은 뻥뻥 뚫린 8차선 도로를 빠르게 가로질렀다.

한 달 전인 지난 1월 20일, 이곳 도로변에 있는 남일당 건물에서 경찰이 농성장을 진압하던 도중 6명이 숨지는 참사가 발생했다. 그러나 도로변에 있는 이 건물은 언뜻 보면 눈에 잘 띄지 않았다. 불이 밝게 켜진 다른 건물에 가려져 더욱 그랬다.

그러나 가까이 가면 다른 풍경이 하나씩 눈에 들어왔다. 참사가 난 건물 앞에 천막을 설치하고 차린 합동 분향소가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용산4구역 철거대책위원회 회원들이 난로 주변에서 불을 쬐면서 분향소를 지켰다.

참사 이후 이들은 건물 주변을 떠나지 못했다. 분향소 옆에 차려진 대책위 사무실 천막 안팎으로는 살림살이가 제법 많았다. 쌍화탕 한 병, 반찬 한 통씩 가져다준 살림이 불어난 것이라 했다. 이날 운수노조에서 잔뜩 실어온 땔감도 구석에 쌓여 있었다.

▲ 참사 한 달이 지났지만, 용산에서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건물 앞에 차려진 분향소도 그대로다. ⓒ프레시안

"내가 테러리스트래"

"내가 테러리스트래. 이쪽도 마찬가지야."

난로 앞에서 만난 80세 할아버지가 기자에게 농담 아닌 농담을 던졌다. 졸음 때문인지, 추위 때문인지 옆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던 할머니가 웃음으로 답했다.

이곳을 지키는 스무 명 남짓한 회원 대부분은 노년이다. 지난 달 참사로 숨진 고 이성림(71) 씨와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매일 밤 10시부터 다음날 오전 10시까지 분향소와 철거 지역을 오가며 '규찰'을 섰다.

경찰도 '테러리스트'들의 주변을 떠나지 않고 있다. 건물 옆 도로는 한 달째 경찰버스로 막혀 있다. 철대위 회원들은 이곳저곳을 가리키며 "저 도로 건너편에도, (참사가 난) 건물 2층에도, 저 뒤쪽에도 모두 경찰이 있다"고 말했다. 건물 옆에 있는 주차장에는 시동이 걸린 경찰 버스가 가림막 사이로 줄지어 서 있었다.

"한번 여기에서 112에 전화해 봐. 용역이 부르면 경찰이 3분 만에 와. 그런데 우리가 부르면 30분~1시간 있다가 오더라. 와서도 멀리서 지켜만 본다. 그러니까 우리가 욕을 해도 말을 못 하지."

천막 사무실에 들어서자 한쪽에는 '규찰 당번 순서'가 걸려 있었다. 당번 이름이 아니라 예전에 운영했던 가게 이름이 적혀 있었다. '박물관'이라고 적힌 이름이 자신이라는 70대 할머니는 자꾸 마실 것을 권했다.

"지금도 몰래 공사하려다 들킨다"

▲ 건물 뒷쪽으로 펼쳐진 재개발 구역은 이제 빈 건물이 더 많은 황량한 동네가 됐다. 동네 입구를 막고 있는 경찰버스로 인해 인적은 더 뜸해졌다. ⓒ프레시안
"지금도 용역들이 몰래 공사를 하려다가 우리에게 들킨다. 막으려다 싸우기도 하고… 반성의 기미가 전혀 없다."


철대위를 끌어온 이충연 위원장은 참사 당시 끝까지 농성을 벌이다 부상을 당했고, 그 상태로 병원에서 체포됐다. 그리고 검찰은 그를 포함해 회원 5명을 특수공무집행방해 치사 혐의로 구속기소했다. 대신 위원장 대행을 맡고 있는 유송옥(40) 씨의 하루는 요즘 매일같이 이곳 천막에서 시작해 천막에서 끝난다. 집에는 잠깐 들러 잠만 자고 나올 뿐이다.

다른 회원들 모두 마찬가지다. 추운 날씨에도 회원들은 천막살이가 이제 익숙해졌다고 했다. 유 씨는 "돌아가신 분과, 감옥에 갇힌 분들을 생각하면 내가 너무 편한 것 같아 집에 가도 잠이 안 온다"고 말했다.

이들에게 싸움은 현재 진행형이었다. 매일같이 열리는 추모 집회에도 참여하고, 공사를 그대로 진행하려는 조합과 용역업체와도 싸워야 했다. 사방에서 지키는 경찰과 부딪히는 것도 일상이다. 또 지난 18일부터는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는 100만 서명 운동 서명지를 들고 거리를 뛰고 있다.

"오늘도 5명이 청계광장 집회에 참석했다. 경찰은 우리가 집회 신고를 내면 그 다음날 불허 결정을 한다. 교통하고 상관없는 재개발 구역 안쪽도 무조건 안된단다. 정보과 경찰에게 허가제가 아니지 않냐고 물었더니 자기도 신고제인줄 알지만 위에서 그렇게 내려온다고 하더라."

참사 이후 달라진 건 없었다. 구청이나 조합 모두 연락 한 번 없었다. 유 씨는 "막막하긴 하지만 처음부터 예상했던 일"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쌓여가는 화까지 풀어지지는 않았다.

"가장 화가 나는 건, 아직도 정신 못 차린 용역들, 그리고 조합과 삼성물산이다. 1년 순이익이 수천억 원이란다. 그중 1%만 양보해도 충분히 우리에게 가수용 상가를 지어줄 수 있다. 생계를 이어갈 수 있게끔은 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그래도 무시한다."

▲ 이들에게 싸움은 현재 진행형이었다. 매일같이 열리는 추모 집회에도 참여하고, 공사를 그대로 진행하려는 조합과 용역업체와도 싸워야 했다. 사방에서 지키는 경찰과 부딪히는 것도 일상이다. 또 지난 18일부터는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는 100만 서명 운동 서명지를 들고 거리를 뛰고 있다. 참사 건물 옆 골목을 봉쇄한 경찰버스에 붙여진 걸개들. ⓒ프레시안

"진실을 알고 얘기해달라"

편의점을 운영하던 유송옥 씨 가족의 일상이 바뀐 지는 오래다. 유 씨가 철대위에 참여하는 것을 안 건물주는 유 씨를 더 빨리 내쫓으려 했다. 다행히 이제 대학교에 입학하는 첫째와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둘째 아이가 엄마를 이해한다고 했다. 그렇지만 얼마 없던 돈 다 까먹고 이제 빚까지 지는 현실은 어쩔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가 망루에 오른 것 아닌가. 살기 위해서. 장사 못 하게 하는 용역들 피하려고. 그런데 기자들이 테러리스트라고 매도한다. 말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재개발과 철거를 겪으면서 유 씨를 비롯한 철대위 회원들에게 가장 큰 불신을 안겨준 건 바로 언론이었다. 인사를 하는 기자에게 회원들은 처음에는 "할 말이 없다"며 "가라"고 했다. 유 씨는 "이제야 언론을 알 것 같다"고 말했다.

"이제 누구를 믿을 수가 없다. 전철연(전국철거민연합회)은 다른 집단이 아니다. 철거 지역 사람들끼리 힘드니까 서로 도와주는 건데, 신문과 정부가 이상한 집단으로 선입견을 만들었다. 연대하는 게 좋겠다 싶어서 하는건데…."

유 씨는 많이 힘들다고 했다. 그는 이날 오전에도 미용실에 갔다가 모르는 이가 참사에 관해 얘기하며 전철연을 매도하는 말을 들었다. 그는 "제대로 몰라서 그렇다. TV와 뉴스, 신문에서 그런 식으로 보도하다보니 눈과 귀가 막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더욱 '제대로 아는 것'이 절실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묻자 유송옥 씨는 "진실을 알고 얘기해달라"고 말했다.

"진실을 모르고 지나가면서 툭 던지는 말 한마디에 상처를 받는다. 왜 우리가 올라갈 수밖에 없었는지 이유를 모르면서 농성이 과한 거 아니었나 하시는 분들이 있다. 우리가 다 잘한 건 아니지만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던 내용을 알았으면 좋겠다."

한편, 용산4구역 조합(국제빌딩주변제4구역 도시환경정비사업조합)은 참사 이후 언론과의 접촉을 일체 피하고 있다. 조합 관계자는 "공식적으로 아무 말도 해줄 수 없다. 언론이 왜곡 보도를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지난 19일, 이 조합은 세입자들을 위한 임대주택을 짓기로 한 사업계획 내용을 무효화해 달라며 서울시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패소했다.

(☞ 관련 기사: "성실한 사람 피 빨아먹는 사람만 잘 살더라")

"능력 없는 정부 때문에 우리만 죽어간다"

참사가 난 건물 앞을 언뜻 보면 사람과 차가 오가는 일상으로 돌아간 듯 하다. 사건 이후 한동안 매일같이 이곳에서 열렸던 집회도 청계광장 등으로 장소를 이동했다.

그러나 조금만 돌아 뒷편으로 가면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재개발 구역으로 지정된 용산 3, 4, 5구역은 낙서와 빈 건물이 황량히 남은 동네가 됐다.

참사 건물 주변을 떠나지 않고 있는 경찰과 용역업체 직원은 살풍경을 더했다. 건물 옆 주차장에는 경찰과 조합 등이 쓰고 있는 컨테이너 상자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이곳에서 여전히 장사를 하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는 주민들은 "미칠 지경"이라고 했다. 건물 뒷편 골목에서 곱창집을 운영하는 김종관(63) 씨는 "참사 후에 경찰차가 골목을 막고 있어서 사람들이 가게 쪽으로 오질 못해 아예 손님이 없다"며 "하루 200만 원이던 매출이 지금은 20만 원도 안 된다"고 한탄했다.

그는 "그나마 문을 연 것도 이번달 9일부터"라며 "참사 때는 경찰 물대포로 천막과 간판이 날아가서 수리하느라 문도 제대로 열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영업방해 아닌가. 손님들이 위화감 조성으로 오지도 못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역시 이웃에서 순대집을 운영하는 김인규(55) 씨도 "이대로 가면 여기서도 사고 하나 터진다"며 "예전엔 점심시간에 줄을 서서 밥을 먹었는데 지금은 파리만 날린다"고 하소연했다.

또 다른 식당을 운영하는 전모(44) 씨는 "지난 2일 구청, 경찰서 등에 진정서를 제출했지만 아직까지도 상황이 똑같다"며 "경찰은 4월 초까지 답변을 해주겠다고만 했을 뿐"이라고 개탄했다. 그는 "국민의 권익을 보호한다는 기관이든 어디든 하소연을 해도 소용이 없더라"며 "현장에 있는 경찰에게 나가달라고 하면 그냥 소송 걸라고만 한다"고 말했다.

▲ 용산 재개발 구역에서 아직 영업을 하고 있는 주민들은 "지금 누가 누구에게 피해를 주고 있는가"라고 되물었다. ⓒ프레시안

"깨물어도 안 아픈 손가락이 우리 서민"

이들은 한결같이 갈등 해결 능력도 없이 주민들에게 피해를 안기는 정부를 탓했다. 전 모씨는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지만 이명박 대통령에겐 있는거 같다"며 "그게 바로 우리같은 서민"이라고 말했다.

재개발 구역에서 횟집을 운영하는 박모(57) 씨는 "박정희도 이렇게 하진 않았다"며 "그때 상계동 청거를 할 때는 그래도 임시 거처는 만들어 놓고 몰아냈다"며 답답하다고 말했다.

다른 반응도 있었다. 건물 건너편에서 상점을 운영하는 이미정(가명) 씨는 "(철거민들의 싸움이) 계란으로 바위 치기 같다"며 "저렇게 농성을 한다고 해결되지 않을텐데, 막연히 동정만 갈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주변에서 그런다. 철거 지역에서 사람 한 두명 죽는 건 일도 아니라고. 어쩔 수 있겠나"라며 말끝을 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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