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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한 사람 피 빨아먹는 사람만 잘 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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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성실한 사람 피 빨아먹는 사람만 잘 살더라"

[용산 참사 한 달] 장례식도 못 치른 유가족들

지난 1월 20일, 서울 용산 한강로2가 재개발 구역. 이날 이곳에서 벌어진 경찰의 진압 과정에서 화재가 발생해 1명의 경찰관과 하루 전날부터 농성을 벌였던 5명의 철거민이 죽었다. 이른바 '용산 참사'였다.

검찰은 20일만인 지난 9일 '중간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내용은 이렇다. "화재의 원인은 누군가가 던진 화염병 때문이다." 검찰은 누가, 언제, 왜 그랬는지 아무것도 밝히지 못한 채 농성을 벌였던 철거민 20명을 구속·불구속 기소했다. 언론을 통해 일부 불법 행위가 확인된 7명의 용역업체 직원도 불구속 기소했다. 그러나 진압을 지휘하거나 참여했던 경찰은 모두 무혐의였다.

참사가 한국 사회에 준 충격은 컸다. 유례없는 경찰의 강경 진압이 도마에 올랐고, 도시 재개발 지역에 만연한 지방자치단체·조합·시공사의 부조리와 용역업체의 폭력이 집중 조명됐다. 이명박 정부가 가속 페달을 밟고 있는 개발 정책에 여론의 제동이 걸리는 듯도 싶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났다. 그간 정부는 '후속 대책'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 정책이 앞으로의 개발 사업에 영향을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경찰청장으로 내정됐던 김석기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은 자진 사퇴의 뜻만 밝혔을 뿐 반성하는 기색은 없다.

이명박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인사의 반성도 없었다. 심지어 용산 참사 여론을 강호순 사건으로 무마시키려 한 청와대가 경찰에 보낸 이메일이 발견됐다. 이 대통령이 김석기 씨에게 국가정보원 제2처장과 같은 중책을 맡기려 한다는 얘기까지 들린다.

이런 상황에서 변하지 않은 곳이 또 있다. 이대로 묻을 순 없다며 장례를 못 치르고 있는 빈소도 여전히 그대로다. 벌써 한 달째다. 유족과 철거민들은 "몸이 힘든 건 상관없다. 제발 변화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얘기한다. <편집자>

"여기는 OO네, 이쪽은 OO네, 저쪽은 OO네…."

지난 19일 용산 참사 희생자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 용산구 순천향대병원 4층. 영안실을 둘러보는 기자에게 유가족 한 명이 벽마다 놓여진 살림을 설명했다. 벌써 한 달째. 살림살이가 자리를 잡은 듯한 영안실에서 풍기는 편안한 분위기가 오갈데 없는 유족의 상황을 역설적으로 드러냈다.

긴장도 여전했다. 검찰은 이곳에 있다고 알려진 전국철거민연합회 남경남 의장을 체포하겠다며 벼르고 있었다. 50여 명의 전철연 회원이 24시간 영안실 안과 밖에서 낯선 이들을 경계했다. 화환 대신 리본만 걸린 영안실 입구. 이곳에서 정영신(37) 씨를 만났다.

정 씨는 용산 참사로 인해 삶이 달라진 당사자다. 시아버지 이성림(71) 씨를 참사로 잃었고, 용산4구역 철거민 대책위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던 남편 이충연(36) 씨가 구속됐다. 참사 이후 그는 재개발 구역 안에 있는 집에는 가지도 못한 채 병원에서 살고 있다.

참사는 그와 가족의 인생을 바꿨다. 사실 재개발이 시작될 때부터 변화는 예고돼 있었다. 용역업체 직원들이 그와 시부모가 운영하는 가게의 영업을 방해하고, 싸움을 걸 때 이미 일상은 바뀌었다.

그렇지만 사회는 달라진 것이 없었다. 조합, 시공사, 용역업체 모두 농성자들이 처음 망루에 올랐던 1월 19일 전과 똑같았다. '살고 싶다'고 외치기 위해 망루에 올라갔을 때와 비교해 사회가 변한 건 없었다.

언론은 어느새 용산을 과거의 일로 치부했다. 자극적인 기삿거리를 찾지 못한 기자들은 이동했다. 게다가 한 달동안 크고 작은 '참사'까지 잇따랐다. 경기 때문인지 무엇 때문인지 점점 각박해져가는 인심은 벌써 용산 참사 소식에 피곤해했다.

"한 얘기 또 하면 지치지 않냐고? 백번이고 천번이고 할 수 있다. 제대로만 알려준다면."

이충연 위원장이 구속돼 있는 서울구치소로 가는 차안에서 정영신 씨가 기자에게 덤덤하게 말했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그의 표정은 진지하고 심각했다. 참사 이후 줄곧 흐렸던 서울 하늘은 이날도 어김없이 흐렸다.

▲ 서울 순천향대병원에는 참사 한 달째 여전히 빈소가 마련돼 있다. ⓒ프레시안

"무조건 자살했다는데…뭘 믿으란 말인가"

"경찰은 농성자들이 화염병도 던지고, 골프공도 던졌다면서 개수까지 보고했다. 그러면 자기들도 진압할 때 어떤 장비를 썼다고 다 밝혀야 되는 것 아닌가. 무엇을 썼고, 이걸로 인해 불이 날 수도 있지 않을까 얘기하고, 의구심이 생기면 화염병이나 새총처럼 실험도 해봐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무조건 농성자들이 자살했다는 식이다."

정영신 씨가 답답한 목소리로 수도 없이 반복했을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말했다. 그도 그럴 터였다. 검찰은 지난 9일 끝내 왜 불이 났는지 밝히지 않은 채 수사를 사실상 마무리했다.

결과는 예상했던 대로였다. 경찰은 무혐의, 그리고 이충연 위원장을 비롯한 농성자 20명은 '특수공무집행방해 치사' 혐의로 기소됐다. 철거민 당사자들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결정이었다. 언뜻 보기에도 이상한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지만 검찰은 서둘러 결론을 냈다. 농성의 시작부터 끝까지 건물 아래에서 진압과 사고 과정을 지켜본 정 씨는 그날의 공포를 생생히 기억했다.

"망루 틈마다 전부 물대포를 쏘았다. 그날 물대포 양이 얼마큼이었는지 정도라도 공개했으면 좋겠다. 위에 있던 남편은 지갑 안까지 다 젖었다. 거기서 무슨 불을 붙여서 화염병을 던졌다고…. 담배 피는 사람들은 상식이라고 한다. 지포라이터 빼고는 물 묻은 손으로 라이터 불을 켤 수 없다는 것이다. 여전히 의문이다. 화염병에 누가 불을 붙였을까."

정 씨는 변호사, 검사, 판사 등과 함께 지난 5일 현장 검증에 참여했었다. 그는 "거기는 현장이 아니었다"고 잘라 말했다. 6명이 죽은 사고 현장이라고 하기에 그곳은 너무 깔끔했다.

"망루 안에 있던 것을 긁어서 앞마당에 모아놓았다. 망루 1, 2, 3, 4층은 흔적도 없고 뼈대만 있더라. 경찰은 다 타서 아무것도 없는 거라고 했다. 그런데 망루 1층에 있던 LPG통 네 개가 밑부분만 살짝 그을린채 그대로 있더라. 그 LPG는 화재 때 안 터지고 어떻게 남아 있을까.

경찰이 사진으로 공개한 화염병과 골프공도 가보면 없다. 망루 앞에 소주 박스에 화염병만 모아놓았더라. 또 동영상에서 시너가 뿌려졌다고 지목한 자리에 가면 깨끗한 시너통 하나와 새것으로 보이는 안전모 5개가 있다. 그 안전모 쓰고 시너 뿌렸다는 얘기겠지. 아무것도 없고 그것만 있다. 갖다 놓으려면 통이라도 (농성자들이) 쓰던 것과 같은 걸 갖다 놓던지…."


▲ 화환 대신 자리를 채운 리본들. ⓒ프레시안

"증거 앞에서 도망가는 검찰…너무 많은 사람이 안다"

검찰과 경찰의 태도는 날이 갈수록 철거민의 가슴에 못을 박을 뿐이었다. 특히 검찰은 참사가 일어난 지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유족의 동의를 받지도 않은 채 희생자 부검을 모두 끝냈다. 정영신 씨는 "부검 이후 경찰은 신원을 알 수 있는 자료를 하나씩 줬다"고 말했다.

"사고 다음날 경찰이 그러더라. 지문 보고 신원을 확인했다고. 지문을 확인할 수 있었으면서 왜 부검을 했을까.

며칠 뒤 아버님 지갑이 나왔다. 어떻게 아냐고 했더니 경찰은 신분증과 돈 액수를 얘기해줬다. 며칠 뒤에 유품이 또 나왔다고 하더라. 이번에는 시계도 있고, 메모지도 있었다. 용산구청에서 보낸 공문서도 그대로 있었다."


검찰은 당시 부검 사유로 시신이 너무 많이 타서 신원 파악이 안 됐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상림 씨의 유품으로 반지, 지갑, 시계, 볼펜, 공문서 등이 줄줄이 발견됐다. 정 씨는 "이해가 안 가고 어이가 없다는 말밖에 할말이 없다"고 말했다.

검찰은 부검 사유로 '사인'을 밝히기 위해서라고도 했다. 그러나 결국 수사 결과 발표에서는 희생자들이 모두 화재로 인해 숨졌다는 짤막한 언급 뿐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화재 외에는 다른 사인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정 씨는 "불에 다 탔던 다른 분의 유품 중에는 플라스틱이 멀쩡하게 남아있는 자동차 열쇠가 나왔다"며 "그분들이 화재로 죽지 않았다는 게 아니다. 이런 정황을 근거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철저히 밝혀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되물었다.

▲ 경찰과 검찰은 발견되는 증거 앞에서 도망가기에 바빴다. 그동안 유족과 시민·사회단체는 끝없이 의혹을 제기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건 무응답이었다. 시민·사회단체 진상 조사단 기자 회견에서 용역들의 폭력행위를 설명하고 있는 정영신 씨. ⓒ프레시안
그러나 그런 수사는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오히려 경찰과 검찰은 발견되는 증거 앞에서 도망가기에 바빴다.

검찰의 수사 과정에서 유일하게 새롭게 밝혀진 사실은 문화방송(MBC) <PD수첩>이 보도한 용역업체 직원의 물대포 정도였다. 유족을 비롯해 시민·사회단체에서 사진과 동영상 등으로 제기한 사인 의혹에 검찰은 "말이 안 된다"는 간단한 말로 끝냈다. 이충연 위원장을 비롯해 검찰의 조사를 받은 이들은 한결같이 "철거민 쪽에 유리한 건 다 덮고, 왜곡했다"고 반박했지만 수사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대한민국 최고 엘리트라는 검사들이 머리 맞대고 한게 그것 하나밖에 없다. 다 끼워맞춰서 우리에게 필요한 건 다 빼고 자기들에게 필요한 건 담아서 완벽한 시나리오라고 내놓은 것. 누가 믿겠나.

니들이 해봐야 정부와 싸워서 이기겠냐고 생각할거다. 그런데 너무 많은 사람이 안다. 검찰의 수사 발표에 아무것도 없었다는 걸."


"쫓겨나고 빚내고 또 쫓겨나고…나만의 문제인가"

그렇다면 참사 이후 용산4구역 조합이나 구청의 태도에는 변화가 있었을까? 정 씨는 "그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찾아오지도 않는다"며 "자신들은 책임이 없다고, 버티기 작전을 펴더라"고 말했다.

"조합장은 이렇게 돈을 많이 준데가 없다고 했다. 언제 돈을 달라고 했나. 30년간 한군데서 먹고 살았다. 떠나서 도대체 어디서 살라는 거냐. 장사하던 사람은 장사밖에 못한다. 옆으로 이사하고 싶어도 용산의 땅값이 얼마나 올랐는데…."

조합은 숨었다. 철거민들의 요구를 뻔히 알면서도, 왜 망루에 올랐는지 알면서도 그들은 참사 이후 찾아오지 않았다. 정 씨는 "제일 늦게 공사하는 공원부지에 가수용 상가를 조그맣게 만들어주던지, 그것도 싫으면 부지만 줘서 몇년만 더 장사하게 해달라고 했지만 소용 없었다"고 말했다.

"임대 상가? 마찬가지다 그 비싼 돈을 내고 들어갈 수가 없다. 그러니까 건설사가 보증을 서주면 이자 내면서 몇 년간 장사하고 기반을 닦게 해달라고 했다. 언제 우리가 보상금 10, 20% 더 달라고 했나. 그런데도 조합은 시끄럽다고, 말이 되냐고만 한다."

정영신 씨는 지난해 5월 이충연 위원장과 결혼했다. 정 씨는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시부모님에게 빚을 다 갚고 결혼하겠다고 했지만 결혼을 먼저 하자는 시부모님의 뜻을 따랐다. 그리고 시부모님과 가게를 합쳐 작은 호프집을 열고 함께 장사하며 살았다. 그리고 1년이 채 되기도 전에 시아버지를 여의고 남편과 기약없는 생이별을 해야 했다. 그런데도 그는 "잘 한 것 같다"며 미소를 지었다.

재개발 소식을 들었을 때, 그 역시 그냥 떠나자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남편의 말을 듣고 생각이 달라졌다고 했다.

"신랑이 묻더라. 그럼 평생 철거민으로 살거냐고. 빚 얻어서 가게 하면서 갚다가 다른데 가서 또 빚을 얻어서 장사하고. 거기 개발한다고 하면 또 쫓겨나고…. 결국 빚내서 빚갚다가 쫓겨날 수밖에 없는거다. 부모님과 우리가 한평생 산 이 서울에서…."

재개발은 그에게 수많은 생각을 안겨줬다. 정영선 씨는 "철거 전에는 사회 돌아가는 걸 아무것도 몰랐다"며 다시 한번 미소 지었다.

"철거민이 되어서야 억울한 사람들이 참 많다는 걸 느꼈다. 이런 식으로 가면 상위 1% 빼놓고는 다 철거민이 되겠더라. 서민 피 빨아서 부를 축적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용역업자를 보면, 세입자 한 집 나갈 때마다 BMW, 에쿠스 같은 차를 사더라. 그들과 똘똘 뭉친 경찰, 조합, 구청이 뭐가 다른가. 우리나라는 성실하게 살면 개죽음 당하는 거고, 없는 사람 괴롭히면 떵떵거리고 살더라."


▲ 참사 한 달째, 유족들은 "몸이 힘든 건 상관없다. 제발 변화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얘기한다.. 5명의 희생자는 아직 발인조차 기약하지 못하고 있다. ⓒ프레시안

(☞ 관련 기사; "내가 테러리스트란다. 진짜 도둑은 따로 두고…" )


"진실은 알려지지도 않았는데…"
[인터뷰] 용산 참사 희생자 고 윤용현 씨 장남 윤현구 씨


"하루 아침에 사라졌어요. 당연히 내 옆에 있을 줄 알았던 사람이…. 솔직히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아요. 뭐부터 해야 할지도…."

1시간 넘게 진행된 인터뷰 말미에 고 윤용현 씨의 아들 윤현구(20) 씨는 결국 이렇게 말했다. 인터뷰에서 "책임감도 커졌다. 사회를 보는 시야도 넓어졌다"며 자신의 변화를 설명하던 그는 결국엔 "뭐부터 해야 할지 막막하다"고 말했다.

용산 참사가 난 지 한 달이 됐지만 아버지를 잃은 윤현구 씨는 아직 아버지를 떠나보내지 못했다. 연일 떠들던 언론조차 어느새 용산을 잊은 듯 조용하다. 그에게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끔찍한 일을.

"아버지가 테러리스트라고 말하는 현실 답답"

지난 19일 순천향대병원 인근 카페에서 만난 윤현구씨는 "답답하다"며 지금의 상황을 표현했다. 그는 "사람들은 우리 아버지가 대충 화염병 던져서 불타 죽은 사람 정도로 기억하고 있다"며 "아버지가 왜 망루에 오를 수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는 언론에서 말하지도 않고, 사람들은 알지도 못한다"고 토로했다. 그는 "아버지는 테러리스트가 아닌데 사람들은 아버지를 그렇게 기억한다"며 답답해했다.

그렇기 때문에 윤 씨는 "용산 참사가 사람들의 기억에서 묻혀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중학생이 된 뒤 지난 6년 동안 뉴스는 거의 보지도 않았는데, 지난 한달 동안 정말 많은 뉴스를 봤어요. 가슴 아픈 건 점점 용산 참사에 관한 기사가 사라진다는 거예요. TV에서는 이제 하단에 한줄짜리로 보도되고, 신문에선 아예 다루지도 않아요. 그게 너무 화가 나요. 하나도 해결된 게 없고, 진실은 알려지지도 않았는데 자꾸 묻혀지는 거 같아 가슴이 아파요."

윤현구 씨도 처음엔 아버지가 하는 일이 뭔지 잘 몰랐다고 고백했다. 그는 "아버지가 워낙 무뚝뚝하고 나 역시 무뚝뚝한 편이라 아버지와 많은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며 다만 "아버지는 동생과 나에게 '미안하다'는 말 밖에 하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그는 "이번 참사를 겪고 나서야 아버지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바빴는지, 왜 망루에 올라갔는지 알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생전 아버지에게 살갑게 굴지 못하고 무뚝뚝하게 대한 것이 못내 아쉽다"며 "잘해드린게 없어서 아버지에게 너무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그가 기억하는 아버지와의 마지막 대화는 "5일 정도 못 올지 모른다"였다. 참사 전날인 1월 19일 밤, 잠자리에 든 아버지가 전화를 받고 급히 나가면서 윤 씨에게 던진 한 마디였다. 윤현구 씨는 그게 아버지와 자신이 마지막으로 한 말일 줄은 생각도 못했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참사가 있던 20일에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점심시간에 어머니에게 전화가 와서 아버지가 연락이 안된다고 동생과 같이 집에 가있으라고 연락이 왔어요. 이상하게 생각은 했지만 별 일 아니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어머니가 고모부와 통화를 하는 걸 듣고 대충 짐작을 했죠. 무슨 일이 있구나.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리라곤 끝까지 믿지 않았어요. 하지만 21일날 아침에 연락을 받고 병원으로 갔는데 친척들이 모두 있는 걸 보고 '아…, 진짜구나' 하고 받아들이게 됐어요."

▲ 고 윤용현 씨의 아들 윤현구(20) 씨는 "아버지가 왜 망루에 오를 수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는 언론에서 말하지도 않고, 사람들은 알지도 못한다"고 토로했다. ⓒ프레시안

"많은 것이 바뀐 걸 받아들였지만 아버지의 부재만은…"

아버지가 떠난 뒤, 윤현구 씨의 상황은 많이 바뀌었다. 마냥 명랑하고 운동을 좋아하던 고등학교 3학년에서 이젠 한 가정을 책임지는 가장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눈치였다. "이전과 달리 의무감도 커지고, 어머니도 잘 챙겨야 한다는 생각도 든다"며 아버지의 빈자리를 매우기 위한 마음가짐을 내비쳤다.

생각도 많이 달라졌다. 예전엔 그냥 단순히 넘어가던 것들도 이제는 다시 생각하고 들여다보게 되었다. 그는 "한 달 사이에 많은 것이 변했다"며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도 바뀌었고, 무엇보다도 사회의 부조리한 면을 보는 눈을 가지게 됐다"고 자평했다. 그는 이어 "이제 3월부터 대학교를 가는데 대학교에서는 단순한 학업만이 아닌 사회를 배울 수 있는 공부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을 변하게 한 아버지의 부재는 아직도 믿겨지지 않는 사실이라고 토로했다. 그는 "얼마 전 있었던 졸업식에 혼자 갔다"며 "당연히 아버지가 나에게 꽃다발을 건네리라 생각했는데 그렇지 못한 현실이 너무 슬펐다"고 담담히 말했다. 비가 내리던 졸업식장에 어머니도, 친척도 초대하지 않고 혼자 간 이유였다.

용산 참사 한 달째. 하지만 윤현구 씨는 옆에 있는 게 너무나도 당연한 '사람'을 잃은 상처가 여전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참사를 잊어가는 현실에서 받는 상처는 그 위에 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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