뮈텔 主敎 1898년 5월 29일 종현성당(현 명동성당) 축성 예식을 집전한 것은 당시 조선교구장이던 뮈텔 주교(1854-1933)였다. 그는 1881년 조선에 입국해 4년간 선교사로 활동하고 프랑스로 돌아갔다가 1891년 조선교구장으로 다시 조선에 들어와 별세 때까지 42년간 조선교구를 지휘했다. 뮈텔 주교의 긴 재임 기간 중 조선은 숱한 격변을 겪은 끝에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그 동안 가장 영향력 있는 조선 주재 서양인의 한 사람으로서 뮈텔 주교의 입장은 조선천주교회의 행로뿐 아니라 국제사회의 조선관을 결정하는 데 적지 않은 역할을 맡은 것이었다. 조선 민족의 관점에서 보면 뮈텔 주교는 '어글리 미셔너리'였다. 그가 남긴 재임 중의 일기에는 조선의 문화와 전통을 깔보고 무시하는 태도, 교회의 이익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책략을 구사하는 모습이 도처에 나타나 있다. 그는 일본의 조선 지배를 지지하여 3·1운동 때는 천주교인과 신학생들의 만세운동 참여를 엄격히 금지했다. 안중근 의사의 영세신부 빌렘이 安 의사의 사형 집행 전에 고해성사 받으러 가는 것마저 가로막고 결국 빌렘을 조선에서 쫓아낸 것은 유명한 일화다. 일제 강점기를 통해 개신교회보다 천주교회의 독립운동 기여도가 낮았던 일차적 이유가 뮈텔 주교의 태도에 있었다고 지목된다. 이것은 가톨릭 교회사가들에게 오랫동안 당혹스러운 문제로 남아 있다. 몇 년 전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뮈텔 주교에 관한 연구 발표를 놓고 논란이 일었을 때 최석우 신부의 논평에도 이런 당혹감이 담겨 있었다: "그분은 조선인의 육신보다는 조선인의 영혼을 더 사랑하셨던 것 같습니다." 명동성당 축성 백주년을 기해 김수환 추기경이 30년간 맡아 온 서울대교구장 직에서 물러났다. 그의 재임 기간은 한국 사회 안에서 '명동성당'의 의미를 바꿔놓았다. 민주화와 사회 정의의 상징으로 명동성당이 온 국민의 마음에 자리 잡은 것은 누구보다 金 추기경의 공로다. 한국 교회사를 보는 사람들은 대개 金 추기경을 훌륭한 교구장으로, 뮈텔 주교를 그 반대로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진흙 없이 연꽃이 피지 못하듯, 오늘의 한국 가톨릭교회와 金 추기경의 성취는 바깥 사회를 외면하고 교회에만 매달렸던 뮈텔 주교의 집념을 바탕으로 이뤄진 것이다. 역사란 부끄러운 부분도 자랑스러운 부분도 함께 짊어져야 하는 것임을 되새기게 해주는 것이 우리 가톨릭교회사의 가르침이다. |
▲ 명동성당의 옛 모습. 1898년 납작납작한 서울의 스카이라인을 깨뜨리고 솟아오른 종탑은 조선의 전통과 융화될 수 없는 이질감의 상징이었다. 외세에 업혀 세워진 저 종탑은 오랫동안 한국사의 흐름 밖에 서 있었다. 주변의 고층건물 틈에서 그 이질감을 삭혀버린 이제 명동성당은 한국 사회를 굽어보는 대신 떠받쳐주는 존재가 되었다. ⓒ프레시안 |
이 글을 쓰던 시절까지 김수환 추기경은 한국 가톨릭교회의 수장을 넘어 양심의 대명사로서 한국 사회의 존경을 널리 모으던 분이었다. 그가 서울대교구장으로 있는 동안 명동성당은 민주화 운동의 성지가 되었다. 엄혹한 유신시대에서 5공에 이르기까지 정권의 폭력이 인권을 위협할 때 거듭거듭 마지막 보루가 되어준 것이 김 추기경의 양심이었다. 6월 항쟁 막바지, 명동성당에 피신해 있던 운동가들을 체포하러 경찰이 들어오려 하자 "나를 먼저 잡아가라"고 막아선 것이 그 하이라이트였다.
최근 10년 여 동안 김 추기경을 정신적 지도자로 받들던 진보 진영의 시선은 착잡하게 변해 왔다. 진보 투쟁을 온 몸으로 뒷받침해 온 것과 다른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2004년 국가보안법 폐지 논란에 대해 "시기상조"라며 부정적 태도를 보인 것이다.
이 변화에 배신감을 표명한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지나친 욕심이라고 나는 생각해 왔다. 그는 민주화 운동의 지도자이기 이전에 가톨릭교회의 수장이었다. 민주화 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맡은 것은 가톨릭교회를 잘 이끌기 위한 노력에서 비롯된 부산물이었다.
가톨릭교회 신자 중에는 부자도 있고 가난한 사람도 있으며, 우파도 있고 좌파도 있다. 교회 수장으로서 그는 가난한 사람과 좌파만 아끼고 부자와 우파를 내칠 입장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가 사회적 약자의 보호에 앞장선 것은 약자들이 처한 상황이 너무 비참했기 때문이고, 진보 진영을 뒷받침해 준 것은 독재 정권의 압제가 너무 심하기 때문이었다. 그가 서울대교구장에서 물러난 것은 김대중 정권 출범 직후의 일이었으니, 그만큼이라도 한국의 권력 구조가 균형을 잡은 상황에서 특정한 정치 노선에 계속 치우친다는 것은 거대 종교 지도자로서 적절치 못한 일일 수도 있는 것이었다.
한국 가톨릭교회사와 관련된 분야를 연구해 온 필자로서는 한국 사회의 민주화와 관련된 김 추기경의 업적이 교회사의 맥락에서 매우 큰 의미를 가진 것으로 본다. 말년의 정치적 퇴행(?)도 그 맥락에서 적절한 것으로 본다.
위 칼럼에서 한국 가톨릭교회의 뮈텔 시대(1891~1933)를 언급했거니와, 그 이전의 교회사는 박해의 역사였다. 조선조 말기의 가톨릭 박해를 '어리석은 쇄국 정책'으로 가볍게 몰아붙이는 이들이 많지만, 조금만 깊이 살펴봐도 박해 정책에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개항 이전의 조선 왕조는 '천명'을 가진 '천자'를 중심으로 한 '천하체제' 안에 자리 잡고 있었다. '천명'을 능가하는 권위의 '천주'를 받드는 서학, 즉 천주교의 세계관은 이와 양립할 수 없는 것이었다. 1801년의 신유박해 때까지는 이 모순을 어떻게든 해소 내지 완화하려는 노력이 서학 내에도 있었다. 그러나 정치적 이유로 펼쳐진 신유박해 과정에서 황사영 백서가 튀어나온 뒤로는 화해의 길이 사라졌다. 황사영 백서는 청나라 황제를 움직여 조선 정부가 천주교를 관용하도록 압력을 넣게 해 달라든가, 서양 해군을 보내 조선 국왕을 굴복시켜 달라는 등의 청원을 담은 것이었으니, 조선의 전통 질서에 용납될 수 없는 패륜이었다.
아편전쟁 이후 서양 군사력이 중국을 유린하는 상황에 접어들면서 이 갈등은 거듭거듭 증폭되었다. 가장 극적인 사건이 1868년의 오페르트 도굴 사건이었다. 국왕 조부의 묘를 훼손한 이 사건에 천주교도들이 가담한 사실은 조선의 권력층만이 아니라 일반인들까지 서양 오랑캐와 천주교도를 모두 짐승처럼 보게 만들었다.
개항 후 선교의 자유가 허용되었을 때, 개신교 선교사들보다 가톨릭 선교사들이 조선 정부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한 일이 많았던 것은 갈등의 역사가 깔려 있기 때문이었다. 뮈텔 주교가 그 대표적인 사례였고, 그 모습이 그가 남긴 일기에 그대로 남아있다. 조선 왕조의 멸망은 그에게 반가운 일이었고, 선교 발전을 위해 일제와의 협력은 필수적인 일이었다.
가톨릭 신자로서 민족주의를 추구한 이들도 많았지만 뮈텔 주교로 대표되는 교회 지도부는 20세기 전반부 동안 한국의 민족주의를 등진 행로를 걸었다. 그런데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 열망이 좌절을 겪고 있던 20세기 후반부에는 김 추기경을 비롯한 가톨릭 지도자들이 민주화의 길을 여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것이다.
뮈텔 주교는 복음주의 성향의 선교사였다. 선교 대상 사회를 해체해 개인을 교회로 끌어들이는 것이 그의 사명이었다. 그 단계에서 가톨릭교회는 한국 사회와 유리된 집단이었다. 그 분위기는 5·16 때 장면 총리가 수녀원에 피신하는 장면까지 이어진다. 그런 상태에 있던 가톨릭교회를 한국 사회의 중요한 축으로 키워낸 것이 김 추기경의 공로다. 과거를 드러나게 비판하지 않으면서 밝은 장래를 위해 오늘의 할 일을 열심히 함으로써 교회의 '역사 바로잡기'를 해낸 것이다.
김 추기경의 말년 행적을 놓고 원래의 성향이 보수니 어쩌니 하는 말들도 있다. 정치가가 아닌 종교인에 대해 쓸 데 없는 논란이라 생각한다. 현대 세계에서도 종교가 얼마나 훌륭한 역할을 맡을 수 있는지 그분은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설령 그분이 개인적으로 진보 성향을 가진 분이더라도, 민주화가 어느 정도 성취된 단계에서 중립을 취한 것은 가톨릭교회의 역사를 위해 바람직한 일이라 생각한다. 유가에서 말하는 '지어지선'(止於至善)에도 부합하는 자세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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