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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식한 고집쟁이가 악하기까지 하다면…"

[박동천 칼럼] 공포로부터의 자유

세상이 갑자기 한 이삼십 년 뒤로 가는 느낌이다. 조세희 선생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 새삼 주목을 받고, 서울 도심을 경찰 버스가 점거하기도 하고, 명동성당이 또다시 하나의 상징으로 떠오르며, 마침내 최루탄 사용과 정치 사찰의 필요성이 공언되었다. 한나라당은 뜬금없이 사형 집행을 촉구할 만큼 용맹스러워졌고, 청와대 홍보 담당은 연쇄 살인 사건의 선전 효과를 계산할 만큼 악랄해졌으며, 남북 관계는 미사일 발사가 먼저일지 서해 충돌이 먼저일지를 우려할 정도로 어두워졌고, 고위 공직자들은 현직이나 후보나 국회에서 모르겠다는 소리를 당당하게 외칠 정도로 멍청해졌거나 뻔뻔해졌다.

경제 위기에 사회 위기에 안보 위기까지 겹쳐서 어지간히 담력이 좋거나, 여차하면 보따리 싸들고 일본이나 미국이나 유럽으로 피신할 마련이 되어 있는 사람이 아니면 공포감을 느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그런데 집권 세력은 오히려 이런 위기 상황을 빌미로 국가인권위원회를 축소해야 하고, 범죄자의 얼굴을 공개해야 하고, 용산의 모든 의혹은 그냥 덮고 넘어가야 하고, 우석훈 박사한테는 입을 조심하라고 한다. 국가 안보와 경제 안보를 위해 기본적 인권도 표현의 자유도 유보한다는 소리, 70년대와 80년대를 횡행하던 파시즘의 망령이다.

이래저래 위기인 것은 맞을 것이다. 그런데 어떤 위기일까? 구체적으로 어떤 가치 또는 주체가 위협을 받고 있는 것일까? 국가가 위기인가 개인들이 위기인가? 적대적인 환경과 싸워 이겨야 풀리는 위기인가 아니면 내부의 갈등을 예방해서 신뢰를 쌓아 풀릴 위기인가?

역사상 대부분의 전쟁은 적어도 한 쪽 당사자에게 국내 정치적인 이유가 있어서 발생했다. 쌍방 모두의 국내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전쟁이 일어난 경우도 대단히 많다. 안보란 정부의 존재이유 중 하나지만, 정권의 안보를 위해서는 위기처럼 편리한 구실이 따로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상 모든 독재자들에게 위기란 억압을 정당화하는 데 더 없이 좋은 구실이었다.

배는 난파하고 구명보트에 다 태울 수는 없으니, 다 죽는 것 보다는 일부만 죽고 나머지는 사는 것이 낫다-위기 담론을 대표하는 난파선의 비유다. 지금 조갑제식 악령에 휩싸인 조·중·동에는 이런 소리가 공공연히 기사로 실리고 있다. 자기는 죽는 "일부"가 아니라 살아남을 "나머지"에 속하기로 다 짜여있다고 착각하는 몽환적 헛소리들이다.

진짜로 상황이 이처럼 지독하다고 가정하고 한번 상상해보자. 그런 경우에 누가 나머지를 위해 순순히 죽을까? 타이타닉호의 전설이 좋은 자료다. 적어도 처음에 내려진 구명보트에는 여자와 아이들을 먼저 태우고 남자들은 타지 않는 고상한 질서가 있었다고 봐도 된다. 그런데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 이런 양보는 오직 미래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리고 미래에 대한 믿음은 다시 이웃 사람들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생겨날 가망이 전혀 없다. 물론 이웃에 대한 믿음이란 서로 상대를 죽여야 살아남는다는 공포 속에서는 있던 것도 모두 말라죽는다.

난파선의 경우라고 할지라도 나머지를 위해서 일부가 죽을 수밖에 없다는 소리는, 자신이 죽는 일부가 되더라도 그 규칙에 따를 자세를 갖춘 사람의 입에서 나와야 말이 된다. 규칙 자체를 조작해서 자기는 절대 죽는 일부가 되지 않도록 짜놓고서 그런 소리를 하면, 누구보다 먼저 맞아죽기가 십상이다. 만약 그런 소리를 하는 자들이 일정한 세력을 가지고 있어서 생사를 결하는 패싸움이 벌어지게 된다면, 구명보트는 가라앉기 전에 속에서 먼저 찢어지고 만다.

그런데 하물며 지금이 그처럼 지독한 상황인가? 1920~30년대의 대공황 이래 가장 큰 위기를 맞았다는 미국은 정부도 여론 주도층도 난파선의 비유 자체를 적용하지 않고 있다. 재기불능의 회사는 죽이되, 개인들의 주머니에는 돈이 들어가도록 해서 유효수요를 늘린다는 고전적인 케인스주의를 따르는 것이다. 상황을 외부환경과의 투쟁으로 보기보다는 내부 갈등의 예방과 치유에 초점을 맞춘다는 뜻이다. 전체의 위기가 아니라 개인의 위기로 본다는 뜻이기도 하다. 경제란 신뢰를 기반으로 돌아가는데, 신뢰의 주체이자 객체가 곧 개인들이기 때문이다.

사실 언어의 껍데기를 벗겨내고 알맹이만 가지고 말한다면 위기란 오직 개인에게만 해당하는 것이다. 국가와 같은 인공적 조직은 없어지더라도 개인들이 아무 피해를 입지 않는다면 문제는 없다. 국가의 위기가 피해야 할 악이 되는 것은 순전히 그로 말미암아 결국 개인들의 삶이 피폐해질 때에만 그렇다. 즉, 국가의 위기는 껍데기요 개인들의 위기가 알맹이인 것이다.

희생한 일부의 시신을 포개 밟고 나머지라도 위기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가자는 소리는 그렇게 안 해도 어차피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죽어나갈 때나 할 수 있는 소리다. 난파라고까지 할 것은 전혀 없고, 단지 배가 평소보다 좀 심하게 흔들리는 상황에서, 혹시 난파되면 자기까지 죽을까봐 미리 지레 겁을 먹고, 다른 일부를 죽여서라도 자기들끼리만 살자는 것은 들쥐떼만도 못한 짓이다.

이것이 빨갱이나 체제 전복 세력의 이념이라고 몰아붙이고 싶은가? 가당치도 않다. 영국을 이어 자본주의와 자유주의를 주도하고 있는 미국의 대통령이 제창한 이념이기 때문이다. 대공황에서 미국을 건져 올린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공포로부터 자유라는 문구에 담아서 표현한 이치다. 개인들을 위기에서 구출하지 않고는 국가도 사회도 위기에서 헤어날 수 없다고 봤기에 루스벨트는 표현의 자유, 종교의 자유, 결핍으로부터 자유에 더해서 공포로부터 자유를 넣었던 것이다. 이 발상은 나중에 인간 안보(human security)라는 개념으로 발전했다.

▲ "도처에 비판과 충고와 조언이 넘치는데 귀를 막고 최루탄부터 떠올린다면 어찌 악하다 하지 않겠는가." ⓒ프레시안
지금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은 어떤가? 위기를 기화로 소수의 부당한 희생들을 덮을 생각에 몰두해 있지 않은가? 문제를 지적하고 은폐에 항의하는 목소리를 억압함으로써 공포의 바이러스를 확산시키고 있지 않은가? 인간 안보라는 생각을 자꾸만 멀리 밀어내면서, 그저 낡아빠진 국가 안보의 도깨비 장난을 벌이면서 국민을 위협하고 있지 않은가?

무식한 것은 죄가 아니다. 무식을 깨닫고 배우려고만 하면 누구든 이 정도 이치는 쉽게 알 수 있다. 무식하면서, 그 때문에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으면서, 혹시 그 사실이 발각될까봐 억지고집을 피우는 것이 가장 위험하다. 자기 맘속에 있는 공포를 정면으로 상대하기가 두려워, 다른 사람들에게 공포를 전염시키려고 온갖 못된 짓을 가리지 않기 때문이다.

대공황은 80년 전 일이고, 거기서 빠져나온 루스벨트가 공포로부터 자유를 제창한 것은 1941년이다. "잃어버린 10년"이 무서워서 70년 전으로 돌아가면 어찌 어리석다 하지 않겠는가. 도처에 비판과 충고와 조언이 넘치는데 귀를 막고 최루탄부터 떠올린다면 어찌 악하다 하지 않겠는가. 어리석음도 모자라 악하기까지 하다면 어찌 가련하다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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