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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式 경제 성장, 우리는 정말 '발전'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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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박정희式 경제 성장, 우리는 정말 '발전'했나?"

[철학자의 서재] <자유로서의 발전>

▲ <자유로서의 발전>(아마티아 센 지음, 박우희 옮김, 세종연구원 펴냄) ⓒ프레시안
왜 자유로서의 발전인가?

용산 참사의 원인을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 검찰의 수사 결과가 유가족 측이 제기한 여러 의혹과 의문에 대해 답을 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상가 세입자들에 대한 현실적인 대책이 마련됐다면 이와 같은 참혹한 결과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며, 이러한 근본적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앞으로 추진될 재개발과 뉴타운 사업에서 이와 유사한 사태가 재발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은 명백하다고 하겠다.

사실 재개발 사업의 문제는 재개발의 역사만큼이나 뿌리가 깊다고 할 수 있다. 1973년 재개발 사업이 시작된 이래로 30년이 훨씬 넘는 기간 동안 줄잡아 20여 명이 목숨을 잃었고 부지기수의 사람이 부상을 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물리적 폭력보다 더 심각한 것은 재개발 이후 대부분의 주택 세입자나 상가 세입자들이 높은 분양가나 상가 권리금을 내지 못해 그들의 삶의 터전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다. 재개발 초기 5%이던 원거주민 입주율이 30년이 훨씬 지난 2008년에도 15%를 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주택 재개발이 다수의 거주권을 박탈시키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반문할 지도 모르겠다. 1970~80년대의 산업화와 경제 개발을 위해 도심재개발이 불가피했던 것처럼, 경제 위기를 극복하고 선진국으로 나아가기 위해 재개발이나 뉴타운 사업이 필요하며, 이 과정에서 생기는 세입자들의 피해는 불가피한 것 아니냐고.

개발독재 하의 경제 성장이 경제 발전인가?

아마티아 센의<자유로서의 발전>(박우희 옮김, 세종연구원 펴냄·이하 <발전>)은 경제 발전에 대한 편향된 시각을 비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를 보완할 새로운 관점을 제안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특히 건설 사업을 통한 경기 부양이 그 어느 때보다 적극적으로 추진되고 있지만 정작 세입자의 권리보다는 건설사나 건축조합의 개발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재개발 사업이 진행되고 있는 한국의 현실에서 더더욱 그렇다.

이 책에서 센은 경제 발전에 대한 기존의 두 관점을 비판한다. 센이 비판하는 첫 번째 관점은 경제 발전을 위해 정치적 자유나 사회적 권리 등이 희생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이런 경제 발전관은 역사적으로 개발독재의 형태로 나타나곤 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박정희 정권을 예로 들 수 있다. 그 당시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통해 국가 주도의 경제 성장과 산업화가 추진됐던 반면 국민의 참정권이나 언론과 출판, 집회 및 결사의 자유에 상당한 제약이 가해졌다.

물론 박정희 정권에서 그랬던 것처럼 권위주의 정권 하에서도 높은 경제성장률과 국민 소득의 증가가 이루어질 수 있으며, 이를 통해 국민의 삶의 질이 이전보다 향상될 수도 있다. 하지만 센은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희생시킨 대가로 이루어지는 이러한 물질적 성장이 결코 발전과 동일한 것이 될 수 없다고 단언한다.

<발전>의 1장과 2장에서는 이러한 주장에 대한 근거가 제시되고 있는데, 발전의 목적과 수단의 구별이 바로 그것이다. 센에 따르면 발전의 목적은 자유이며, 인간은 다양한 행위를 수행하거나 다양한 상태로 존재할 능력을 실질적으로 갖추고 있을 때 실질적인 자유를 가진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실질적 자유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사회적.정치적.문화적 조건이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인간은 여러 조건 속에서만 자신이 되고자 하는 것이나 하고자 하는 것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A, B, C라는 세 사람이 모두 단식을 하지만 A는 먹을 것이 부족해서, B는 다이어트를 위해, C는 정치적 목적을 관철하기 위해 단식을 한다고 하자. 세 사람 모두 밥을 먹지 않고 물만 먹는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지만 A는 먹을 것이 없어, B는 배불리 먹을 음식이 있음에도 살을 빼기 위해, C는 배불리 음식 먹는 것을 포기할 뿐 아니라 정치적 의사를 관철하기 위해 단식을 선택했다는 점에서 세 사람의 행위는 각각 다른 동기나 목적을 포함하며, 그만큼 세 사람의 자유의 정도 역시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B가 음식을 배불리 먹지 않는 선택을 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끼니를 거르지 않을 정도의 소득이 있어야 하고, C가 정치적 목적의 단식을 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정치적 의사 표현이 완전히 억압되지 않는 정치적 조건이 형성되어 있어야 한다.

이러한 논리에 따른다면, 정치적·사회적 자유에 대한 억압에 기초해 이루어진 경제 성장이나 국민 소득의 향상은 '모래 위에 지은 집'에 불과하다. 국민 소득의 증가나 경제성장률의 향상이 인간의 자유를 증진시키기 위한 것이라면, 자유를 억압한 채로 이루어지는 경제 성장은 목적과 수단이 전도된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국민 소득의 증가가 경제 발전인가?

센이 비판하는 두 번째 발전관은 경제 발전을 국민 소득의 증가와 동일시하는 관점이다. 이런 관점은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하기 때문에 우리는 경제력을 소득 수준과, 선진국을 국민 소득이 높은 나라와 동일시하는데 익숙해져 있다. 하지만 센은 소득 지표가 발전에 대한 충분한 판단 근거가 될 수 없음을 역설한다.

센이 제시하고 있는 미국 흑인의 예는 이를 명백히 보여준다. 미국은 자타가 공인하는 '선진국'이고 국민소득 역시 높다. 하지만 미국 흑인은 미국 백인보다 1인당 소득이 훨씬 낮을 뿐 아니라 중국인이나 인도인보다 생존율이 낮다. 다시 말해, 미국 흑인은 1인당 소득이라는 점에서 미국 백인에게 상대적으로 박탈을 당하고 있다면 생존율이라는 점에서는 인도와 중국인보다 더 박탈을 당하고 있다. 폭력에 대한 노출(특히, 흑인 남자의 경우)과 의료 혜택 기회의 결핍 등이 이런 낮은 생존율의 주원인으로 분석되고 있기 때문에, 미국 흑인은 '평화롭고 범죄 없는 사회에서 살 수 있는 기회'나 '예방 가능한 질병에서 해방될 수 있는 능력'을 박탈당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미국의 사례를 통해 센은 발전의 목적과 수단을 구별하고, 발전의 목적에 초점을 맞추는 발전이 왜 필요한지를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미국 흑인들의 생존 기회를 박탈하는 조건 속에서 이루어지는 미국 경제의 발전이란 사상누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자유의 연관성

센의 강점은 노벨상을 받은 경제학자답게 이상론에 머무르지 않고 자신의 주장이 현실에 들어 맞는다는 것을 풍부한 실증적 자료를 통해 보여준다는 데 있다. 발전의 목적과 수단의 구분 역시 마찬가지다.

센은 자유의 확장이 발전의 목적이며, 이런 목적을 실현하는데 정치적·사회적 자유 같은 여러 방면의 자유가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음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특히 센은 정치적 자유가 경제 발전과 밀접한 연관성을 맺고 있음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실례를 제시한다. 그가 드는 첫 번째 사례는 민주주의가 발전한 나라에서 기아가 발생한 적은 없다는 사실이다. 반면 20세기 말에 기아를 겪은 북한과 에티오피아 모두 독재국가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따라서 센에 따른다면 민주주의는 사치가 아니라 생존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자유의 연관성을 보여주기 위해 센이 드는 두 번째 예는 1997년 한국과 인도네시아를 강타한 외환위기다. 한국의 경우 외환 보유고 관리 실패가 'IMF 사태'의 주원인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경제관료들은 외환 위기를 제대로 예측하지 못했고, 언론 역시 외환 위기에 주목하지 못했다. 다시 말해, 언론이 비판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고 또한 경제 관료들이 위기를 현실로 인정해 그에 적절히 대응했다면, 적어도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언론의 비판 기능과 정책의 투명성은 정치적 자유가 보장되지 않은 사회에서는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다. 경제 위기나 사회적 혼란의 예방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이러한 정치적 자유와 민주주의의 역할을 센은 보호적 안전성이라고 부른다.

IMF 사태가 지난 지 10여년 밖에 안 되어 끔찍한 경제 위기를 다시 겪고 있는 한국의 현실을 보면서 센의 통찰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자유의 관점에서 본 한국 사회

센의 프리즘을 통해 한국의 현실을 다시 보자. 이제까지 빈곤의 문제는 저소득이라는 관점에서 주로 다루어져왔다. 그러나 장애인이나 심각한 질병에 걸린 사람에게 문제는 오히려 능력의 박탈에 있다. 그들이 생계를 유지할 능력을 박탈당함으로써 저소득이라는 현실이 그대로 재생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조금만 바꾸어 생각해 보면 마찬가지 논리가 재개발 문제에도 적용된다고 할 수 있다. 몇몇 언론에서는 용산의 철거민 농성에 가담한 사람들 중 몇몇이 비교적 많은 재산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 마치 문제가 되는 것처럼 보도한다. 하지만 빈곤의 문제를 자유의 박탈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하는 센의 입장이 맞다면, 그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용산 철거민들에게는 경제 활동을 계속할 자유가 박탈되고 있는 현실이 문제가 됐기 때문이다.

실업의 문제 역시 자유의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한국 사회는 지금 경제 위기로 고용이 축소되고 있고 이에 따라 실업율이 증가하고 있으며,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단기일자리 창출에 초점을 맞추는 실업 대책이 마련되고 있다. 그러나 센의 관점에 따른다면, 이는 실업의 문제를 철저하게 소득의 관점에서 보는 대책이라고 할 수 있다. 자유의 관점에 따라 구직자들의 적성과 능력에 맞는 일자리 창출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센의 가장 중요한 통찰은 경제 발전을 자유의 확장 과정으로 보는 새로운 시각이며 오늘날 한국 사회에 절실히 요구되는 것도 이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경제 발전을 물질적 부의 성장과 동일시하는 관점이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는 한 개발이익에 초점을 맞추는 재개발 사업은 계속 추진되고 번창할 것이다. 그리고 그때 제 2의 용산참사와 같은 사건은 재발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마도 센의 다음과 같은 주장 속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자유롭게 발언하고 공공의 토론과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없다면 아무리 부유한 사람이라도 그는 가치 있는 중요한 것을 박탈당한 것이다. 발전 과정을 인간의 자유 증진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이런 박탈을 제거하는 것을 포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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