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영화협회(이하 '한독협') 사무총장이자 <워낭소리>의 프로듀서 고영재 씨가 사회를 맡은 기자회견에는 독립 다큐멘터리로서는 유례가 없는 30만 관객을 동원하며 화제를 모으고 있는 다큐멘터리 <워낭소리>의 이충렬 감독을 비롯해 <똥파리>의 양익준 감독, <동백 아가씨>의 박정숙 감독, 그리고 곧 개봉할 예정인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의 안해룡 감독과 <할매꽃>의 문정현 감독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는 원래 지난 주에 개봉한 <낮술>의 노영석 감독도 참석할 예정이었으나 오지 못했다.
현재 가장 활발한 활동과 성취를 보여주고 있는 감독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은 최근 독립영화가 국내외에서 거둔 성과와는 별개로 현재 독립영화가 위기에 처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기자회견의 내용 역시 주로 자본의 논리에 의해 독립영화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극장과, 독립영화 지원을 유명무실하게 만들어버린 최근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의 정책에 대한 비판이 주를 이뤘다.
▲ 기자회견에 참석한 감독들의 영화들. 이 작품들은 부산영화제에서 상영돼 호평을 받고 화제를 모았다. <똥파리>와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는 올해 개봉될 예정이다. |
이충렬 감독은 전국 각지의 멀티플렉스가 영화의 다양성이 아니라 자본만을 고려한다고 꼬집으며 "영화의 다양성은 감독 개인이 각자 노력해 영화제에 출품하고 상을 수상하는 것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 국가가 제작과 배급에 대해 일정 부분 지원을 해줄 수 있는 시스템 차원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최근 독립 다큐멘터리로서는 이례적으로 30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몰이를 하고 있는 <워낭소리>도 실제로 영진위가 운영했던 2008년 하반기 아트플러스 시네마네트워크의 개봉지원작으로 선정돼 극장에서 개봉할 수 있었던 작품이다. 그러나 <워낭소리>는 이 개봉지원 제도의 마지막 수혜를 입은 작품이 됐다. 올해 들어 이 제도가 폐지됐기 때문이다.
문정현 감독은 계급 및 이념 갈등으로 점철된 한국의 비극적인 현대사가 바로 자신의 가족사에도 투영돼 있었음을 발견하고 이를 탐구해나가는 영화 <할매꽃>을 만들었다. 2007년 부산영화제에서 다큐멘터리 부문 최우수상에 해당하는 운파상을 수상했고, 작년 베를린영화제 포럼 부문에 초청되기도 했던 이 영화 역시 2008년 하반기 아트플러스 시네마네트워크 개봉지원작으로 선정되어 올해 봄 개봉할 예정이다. 문정현 감독은 "내 영화는 국가폭력의 피해자를 다루고 있고 그만큼 현재 여당을 직접적으로 비난하는 장면도 들어가 있다. 이런 영화도 제작과 배급을 국가가 일부 지원해줄 수 있는 수준의 사회가 성숙한 사회"라고 전제한 뒤, 현재 영진위가 독립영화의 '독립'이라는 말조차 떼려 한다고 말했다. 이는 영진위가 작년까지 운영하던 '독립영화 제작지원' 사업을 '단편, 중편, 다큐멘터리 제작 지원'으로 명칭을 바꿔버린 것을 꼬집는 것이다. 그간 독립영화를 만들어온 사람들 전체를 부정이라도 하듯 '독립영화'라는 말 자체를 영진위가 지우려고 하고 있다는 것.
작년 부산영화제에서 상영돼 호평을 받은 <똥파리>를 만든 양익준 감독은 최근 로테르담영화제에서 이 영화로 타이거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영진위의 개봉지원을 받아 올해 극장에서 정식 개봉하려던 계획은 아트플러스네트워크 개봉지원 사업이 폐지됨에 따라 무산됐다. 양익준 감독은 "영화제에서 상금을 받아 (영화제작에 필요한 돈을 꿔주신) 아버지에게 드렸는데, 개봉 때문에 다시 아버지를 찾아가 돈을 달라고 해야 했다. 그런데 아버지도 돈이 필요하시다더라"며 웃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워낭소리>의 제작자인 고영재 사무총장이 '<워낭소리>만 성공하면 무조건 <똥파리> 개봉시켜주겠다'고 했던 약속을 이제 지킬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똥파리>는 올해 4월경 개봉을 예정하고 있다.
제 2의 <워낭소리>는 불가능한가
각 감독들의 5분 발언에 이어 고영재 사무총장이 <워낭소리>의 배급 사례를 들며 발표한 독립영화 배급의 현실에 의하면, <워낭소리>의 흥행은 그저 기적에 가깝다. 제2, 제3의 <워낭소리>가 나오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먼저 고영재 사무총장은 독립영화를 한 편의 가치있는 영화로 대접해주지 않는 극장, 특히 멀티플렉스들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멀티플렉스들은 영화의 순제작비와 마케팅비 규모로 영화의 완성도를 지레 평가하며 일명 '작은 영화'들에는 기회조차 주지 않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대부분의 독립 장편영화들은 디지털로 제작되는데도 극장들은 디지털 영사기를 보유하고 있음에도 굳이 필름 프린트를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 독립영화 제작자로서는 극장의 요구에 따르기 위해서는 극장에 있는 디지털 영사 시스템을 놔두고 굳이 필름값 및 현상비를 들여 따로 필름 프린트를 뽑아야 한다는 얘기다. 고영재 사무총장이 파악한 바에 따르면 영진위 전산통합망에 가입된 극장 중에서 디지털 영사가 가능한 스크린은 모두 131개. <워낭소리>가 2월 11일 현재 128개관에서 상영되고 있는 만큼, 최대치의 스크린에서 상영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실제로 필름이 아닌 디지털 방식으로 독립영화가 이런 규모로 상영된 것은 <워낭소리>가 처음이다. <워낭소리> 역시 처음에 극장들이 상영을 거부해 7개관에서 개봉했다가 관객들의 입소문을 타고 상영관 수를 확대한 경우다.
또한 다음 주에 공식 발표될 2009년 영진위의 진흥사업 개요는 독립영화계를 한층 긴장하게 만들고 있다. 이미 작년 말 한독협이 성명서를 통해 영진위를 강도높게 비판한 바 있지만, 다양성영화 복합상영관 건립 계획이 백지화된 것은 물론 기존 서울아트시네마와 인디스페이스, 미디액트 등을 위탁의 형태로 운영하던 것을 공모제로 전환할 것이라는 얘기도 공공연히 나돌고 있는 실정이다. 전술했듯 아트플러스네트워크 개봉지원 제도가 폐지됐으며 '독립영화' 자체가 존재가 지워진 채 지원 규모는 줄어들어 버렸다.
아트플러스네트워크 개봉지원 제도는 원래 '다양성영화 개봉지원' 제도에서 이름을 바꾼 것으로, 이제껏 독립영화가 개봉할 때 마케팅 비용을 지원해줬던 제도다. 독립영화의 경우 감독이나 프로듀서가 배급까지 도맡아 뛰거나 열악한 독립영화 전문배급사가 한정 규모로 배급을 해왔던 만큼, 이제 이 제도가 폐지된 뒤에 독립영화가 개봉하려면 제3의 투자자를 찾아 일반 영화와 똑같은 조건으로 수익을 나누고 배급비용을 극장과 시장의 요구에 따라 지불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한마디로 대형 할인마트와 시골동네의 작은 구멍가게가 같은 조건으로 동시에 완전경쟁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
독립영화 지원도 규모가 줄어들었고 충무로의 영화사들이 만드는 영화들과의 구분을 없앤 채 '독립'이라는 말 자체를 지워버린 상태다. '독립영화 제작지원' 제도는 독립 장편영화를 제외하고 중편, 단편, 다큐멘터리를 대상으로 한 지원제도가 됐다. 게다가 독립 장편영화의 경우 충무로의 일반영화들과 별 구분 없이 순예산이 10억 이내의 영화제작을 지원하는 '한국영화 제작지원' 사업에 신청해야 한다. 이 부문은 과거 예술영화 제작지원과 HD영화 제작지원 부문을 합친 것으로, 신청자는 등록을 필한 영화제작업자로 한정된다. (법인뿐 아니라 개인도 영화제작업자로 등록을 할 수는 있다.) 고영재 사무총장은 "<낮술>을 만든 노영석 감독의 경우 영화 전공자도 아니고 3개월 한겨레 영화학교를 수료한 게 이력의 전부인데 부모님한테 꾼 돈 천만 원을 갖고 디지털로 영화를 만들었다. 이런 세상인데 연출자 개인은 영진위의 제작지원 사업에 신청할 수 없다. 영화제작비의 합리화 정책 자체는 바람직하지만 독립영화 감독 개인까지 그 틀에 끼워맞추려는 것은 무리"라고 말했다.
'한국영화 제작지원' 제도가 더욱 문제가 됐던 것은, 이 제도가 작년까지 운영된 '예술영화 제작지원'과 'HD영화 제작지원' 제도 대신 신설된 것인데도 이에 대한 예고나 공지가 거의 없이 신규사업이라며 갑자기 공지가 돼 급박하게 접수를 마감해 버렸기 때문이다. 영진위 게시판에서 확인한 바에 의하면 이 공지가 정식으로 영진위 홈페이지 게시판에 공고된 것은 올해 1월 19일로, 접수기간은 동월 28일에서 30일이다. 'HD영화 제작지원'이나 '예술영화 제작지원' 제도를 바라보며 영화를 준비하던 독립영화인들은 허탈감을 맛볼 수밖에 없었다. 고영재 사무총장은 기자회견 후 본지와 가진 전화 인터뷰에서 "강호의 의리가 완전히 바닥에 떨어졌다. 독립영화가 그 자체로 경쟁력을 가지고 마케팅과 배급에 대해서도 다른 방식을 모색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현실의 상황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갑자기 경쟁하라고 하는 게 말이 되나. 대형 할인마트와 동네의 작은 가게를 똑같은 조건으로 완전경쟁하라는 것 아닌가."라고 통탄했다.
이에 대해 영진위는 12일자로 보도자료를 내고 '독립영화 지원은 계속될 것'이라 반박했다. 보도자료에 따르면, 영진위는 '2008년 중형투자조합 출자사업'이 다큐멘터리 5% 의무 투자를 전제하고 있고, 1월말 300억 규모의 투자조합을 결성했으므로 앞으로 15억 원 규모의 자본이 다큐멘터리를 위해 형성될 것이라 밝혔다. 그러나 영진위가 과거 제도의 지원을 통해 독립영화들이 거둔 성과는 영진위 자신의 것으로 나열하면서도, 앞으로의 사업 변화에 대해 독립영화계가 정말로 우려하고 있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인식이 없어 보인다. '한국 독립영화에 대한 지원을 계속될 것이며 특히 극장용 다큐멘터리 분야에 더욱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고는 하지만, 정작 영진위의 공식 사업 문건 속에 '독립영화'라는 말이 등장하지는 않는다. 나아가 다큐멘터리를 위해 형성된 자본이 과연 독립 다큐멘터리 활성화에 도움이 될지, 이들은 배제된 채 일정한 자본을 지닌 충무로 영화사나 방송사들의 다큐멘터리 제작 활성화를 유도할지는 알 수 없다. 새로운 다큐멘터리 제작이 활성화되는 건 좋지만 기존에 작품을 만들어온 이들이 배제된다면 그 또한 효율적인 정책이라 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이 보도자료에서 독립 장편영화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보이지 않는다는 점도 영진위의 독립영화 지원 정책에 과연 어떤 철학이 있는지 의구심을 갖게 하는 대목이다.
독립영화전용관 인디스페이스가 문을 연지 1년을 넘겼고 수많은 독립영화들이 영진위의 기존의 다양한 지원사업 하에 극장에서 관객과 만날 수 있었다. 개중에는 소리소문 없이 사라진 영화도 있지만 <경축! 우리사랑>처럼 평단과 관객의 호평을 두루 받거나 <워낭소리>처럼 관객동원 30만을 넘어 50만까지 바라보는 초흥행작도 나왔다. 외국 유수의 영화제에 출품돼 상을 받은 작품의 수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러나 독립영화의 이런 활발한 성취와는 별개로, 독립영화를 지탱하는 시스템의 지원은 늘기는커녕 오히려 줄어들게 될 전망이다. 지금 독립영화, 다양한 영화의 발목을 붙들고 후퇴시키는 건 영화의 내용과 콘텐츠가 아니라 자본과 시스템의 전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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