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이 이명박 정부를 떠받치는 공권력의 또 한 기둥인 경찰의 '야만적 공권력 행사'에 면죄부를 준 9일 저녁, 청계광장에 모인 시민들의 수는 300여 명에 불과했다. 내면화되고 잠재할 수는 있겠으나, 용산 철거민 참사가 곧바로 이명박 정권을 궁지에 몰아넣는 상황으로 전개되지는 않을 것 같다. 제2의 촛불, 냉정하게 말해 발화점이 보이지 않는다.
법질서 확립, 즉 이명박식 '법치'의 반격이 곧 이어질 것도 어렵지 않게 예상해 볼 수 있다. 경찰은 9일 한나라당 소속 행정안전위원들과의 실무 당정협의에서 "경찰 기동대 일부를 특수기동대로 지정해 화염병 시위, 시설 점거 농성 등에 대비하겠다"면서 "폭력시위 진압을 위해 최루탄 사용을 검토하겠다"고 보고했다.
경찰은 특히 "용산 사건을 계기로 현장 안전관리 역량을 제고해야 한다"며 "점거 및 농성에 대비, 최루탄은 특수임무 수행에 필요한 장비"라고 했다. 1998년 9월 만도기계 파업 현장에 공권력을 투입하면서 마지막으로 사용됐던 최루탄이 10년 만에 다시 등장하는 모습을 보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21세기 대명천지에 최루탄이 법치의 유효한 수단이 될 것이라고 믿는 경찰과 한나라당의 상상력은 코미디라고 하자. 지난해 촛불 정국에서 경험했듯, 시민들은 물대포 세례를 오히려 '즐길'만큼 공권력의 강압적 도구 앞에 주눅들지는 않는다. 시민들의 의사 표현이 거리의 구호로만 발현되는 세상도 오래전에 지났다.
MB정권, 무얼 믿고 이럴까?
검찰은 10일 용산 참사 수사의 후속 절차로 철거민 이충연 씨 등을 특수공무집행방해치사상 혐의 등으로 조만간 기소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이 씨의 아버지는 이번 참사로 희생된 여섯 고인들 중 한 명이다. 검찰 수사 발표대로라면 이 씨는 '아버지를 죽인 죄'를 뒤집어 쓸 기구한 운명에 처했다.
소위 '막장 드라마'에도 나오기 힘든 이런 스토리를 현실에서 구성해 낸 검찰의 솜씨가 대단하다. 하지만 이 비현실 같은 현실을 담대하게 그려낸 정권의 자신감은 무엇일까?
대형마트에서 판매된 미국산 쇠고기가 호주산 쇠고기와 한우 판매량을 제친 건 이미 지난해 말이다. 여론의 눈치를 보던 대형마트가 미국산 쇠고기 판매를 재개한 지 딱 한 달 만에 그랬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집회가 작년 8월까지 이어진 걸 되새기면 불과 넉 달 만에 미국산 쇠고기가 1위로 등극한 것이다.
값싸고 질 좋은 쇠고기를 국민들에게 먹이려고 미국산 쇠고기 수입협상을 했다던 이명박 대통령은 그 소식을 접하고 어떤 생각을 했을지 자못 궁금하다.
이런 맥락에서 이 대통령이 김석기 서울경찰청장의 사표 수리를 미적대는 게 '마지막' 배려로만 보이지 않는다. 한 언론에 따르면 이 대통령은 김 청장의 자진사퇴에 대해 "아까운 사람 나간다"며 아쉬워했다고 한다. 이동관 대변인은 '사표가 수리되더라도 김석기 내정자가 여전히 정권에 필요한 인물이라고 보느냐'는 기자들 질문에 "그것은 분명한 것 같다"고 했다. 정권이 아끼는 사람은 늘 '회전문'으로 돌아오는 법이다.
이렇게 경찰과 검찰, 청와대는 뻔뻔하게 시간을 벌고, 제 식구를 챙기고, '법치'로 포장한 역공을 준비한다. 그러는 동안에도 서울만 34곳 184개에 달하는 재개발 구역이 제2, 제3 용산 참사를 잉태해 간다. 현재 같은 속도로 뉴타운 지정과 인허가가 이뤄지면 2010년에는 10만 가구의 이주수요가 발생한다는 분석도 있다.
'간 큰' 정권의 토양은 어찌 보면 공권력이 아닐 수도 있다. 최루탄보다, '백골단'의 후신이 될 특수기동대보다 무서운 건 망각이 아닐까 싶다. 이번 참사로 희생된 고인들에게는 물론이고, 생존의 위기에 처한 재개발·재건축 지역민들에게도 너무 쉬운 망각은 예의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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