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고교등급제 의혹을 받았던 수시 2-2학기 일반전형 1단계에서 외국어고 학생이 내신 점수가 낮은 학생들까지 대거 합격한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더군다나 같은 고교 지원자 가운데 성적이 더 좋은 학생이 떨어지면서 입시 사고 또는 입시 부정 의혹까지 제기되고 있다.
상황이 이런데도 고려대는 물론 지난해부터 대학입시 업무를 이관받은 한국대학교육협의회는 수수방관하고 있다. "공정하게 선발했다"는 고려대를 두고 대교협은 입시 일정이 끝나는 이달 말이 되서야 조사에 나서겠다는 입장을 지난해 10월부터 되풀이하고 있다. 교육과학기술부는 '대학 자율화'를 이유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함께하는교육시민모임 김명신 공동회장이 학부모의 입장에서 이번 사태를 바라본 글을 보냈다. <편집자>
오래전 큰아이의 대학입학 1차 전형 합격자 발표 날, 대학으로 합격자 발표를 보러간 아이의 전화를 기다리는 내 마음은 조마조마했다. 초조해하며 혼자 거실을 몇 차례나 빙빙 돌고 있을 때 아이에게 '합격'이란 전화가 걸려오자 나는 아무도 없는 아파트 거실에서 혼자 겅중겅중 뛰었다. 기뻤다. 아이 혼자 대입이라는 관문을 통과한 것이 무엇보다 기뻤고 그 대학이 좋은 대학이란 것도 기뻤다. 결국 내신 성적이 주가 되는 2차 전형에서는 탈락해 그 대학은 불합격되었지만 그래도 그날의 기쁨은 부모노릇의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올 봄 대학 신입생을 뽑는 2009학년도 대학입시 합격자 발표가 거의 끝나가고 있다. 자녀들의 대학입시는 학부모 자식농사 18년의 한 획을 긋는 일대 사건이다. 그런데 합격을 기대하던 대학에 영문없이 1차부터 탈락하여 답답해하는 학생과 학부모들이 있다. 이들에게는 대학입시가 아직 끝나지 않고 무거운 의혹과 회한으로 남아있다. 부모로서 아픔을 느낀다. 바로 고려대 수시 때문이다.
지난해 고려대는 수시 2-2학기 1단계에서 학생부 (내신 90%, 비교과 10%)를 반영하여 정원의 15~17배수를 선발했다. 2단계에서는 수능 최저학력 기준을 적용해 최종 합격자를 선발한다고 공고했다. 그러나 선발 결과에 대해 논란이 크다. 내신이 불리한 특목고학생이 대거 합격한 것은 물론 같은 고등학교에서도 분명치 않은 이유로 수험생간에 당락이 엇갈렸기 때문이다.
일부 교사와 학생들은 고교등급제와 입시 사고, 두 가지에 의문을 품었다. 그리고 이는 점차 사실로 드러나고 있다.
첫째, 고교등급제 적용이다. 내신 90%, 비교과 10% 반영이라는데 모 외고 학생들은 내신 5등급 이하까지 합격했다. 비교과 10%가 내신 반영 90%를 뒤집을 만한 위력이 있는가? 지난해 하반기, 고려대 입시결과 발표 후 지적된 고교등급제가 사실이었나? 고려대는 함구하고 있다.
둘째, 입시 사고 혹은 입시 부정이다. 같은 고등학교에서 고려대에 지원한 학생 중 내신 성적이 낮고 비교과도 비슷한 학생이 합격하고 우수한 학생은 탈락했다. 고교등급제로도 해명이 안되는 이 사실은 또 무엇인가? 지난 1일 문화방송(MBC) 시사프로그램 <시사매거진2580>에서는 입시사고의 개연성을 지적한 바 있고 일간지에서도 관련한 보도가 잇따르고 있다.
▲ 지난 9일 고려대 2009학년도 정시모집 논술고사에서 응시한 수험생들이 시험을 보고 있다. ⓒ연합뉴스 |
이에 고려대는 알파(α)와 케이(K) 값이라는 비공개 변수를 모호한 공식을 제시하고 있다. 고려대는 2004년 가을 고교등급제 적용때부터 보정점수의 존재를 들고 나왔다. k값은 학교간 학력차를 고려한 보정점수라는데 어떤 이유로 이 'k값'이 생겨났는지 그 자세한 내역과 당락에 미치는 영향은 분명치 않다. <2580>에서는 입시 사고의 개연성을 지적하며 "보정점수 k값을 준다며 특목고학생들 합격여부에만 신경 쓴 나머지 수식적용에서 뜻밖에 문제가 생겼을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이참에 고려대는 이 수식의 의미를 분명히 밝히고 적용 과정에서 실수여부에 대한 것을 내부적으로 조사해 그 결과를 가감없이 공개해야할 것이다.
머지않아 고려대 측에 입장발표가 있을 것이나 이는 지난 2004년처럼 안 봐도 뻔한 수순으로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그 당시 고교등급제 의혹은 시민단체의 문제제기로 시작되었고 이에 기자들이 발품을 팔고 고3 교사들이 협조해 사실 확인과 보도가 이어졌다. 그러나 고려대 측은 고교등급제 극구 부인했고 언론과 시민단체가 다시 이를 비난하며 공론화를 이어갔다. 결국 교육부가 나서서 연세대, 고려대 ,이화여대의 고교등급제 적용을 밝혀낸 것이다. 이번에도 그렇게 된다고 해도, 이명박 정부의 교육과학기술부는 입시에서 손놓았다고 하니 과연 대학교육협의회가 이 일을 해낼수 있을 것인가?
참여정부가 실시한 3불 정책(본고사, 고교등급제, 기여입학제 금지)에 대한 논란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아직 이 정책은 '유효'하다. 고려대의 이런 행태는 현행 규정을 위반한 것이다. 고려대는 입시에서 대학자율을 달라고 부르짖은 학교 중 하나이다. 대학이 책임과 의무를 다할 때 대학자율은 빛을 발할 수 있다. 입시교육에 찌든 특목고 학생을 조금이라도 더 선발하고자 이중 잣대를 적용하는 것은 대학자율이 아니다. 정부의 교육 정책에 고려대가 동의하건 동의하지 않건, 옳다고 생각하건 아니건 많은 논란을 통해 결정되었으면 대학은 이를 존중하고 그 큰 틀에서 움직이는 것이 모두를 위해 유리하다. 올해 서울대 입시에서도 특목고가 강세기조를 이어간다고 하니 '내신 중심'이라는 3년 전 정부 말만 믿고 일반계고를 선택한 학생들의 후회는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다. 이 학생들의 고통에 고려대는 무감각하다.
대학은 사회적 소통과 약자에 대한 배려, 사회적 신뢰 회복에 앞장서야 한다. 대학이 이를 무시하고 딴청을 부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MB 정부 들어 이를 감독할 책임이 있는 대교협은 "3불을 폐지한다"느니, "2월 말에 해당 사안을 검토하겠다"느니, "대학 입시는 대학 자율에 맡겨야 한다"는 등의 말만 되풀이하며 보통사람들 정서에 어긋나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얼마 전 고려대는 2012학년도 이후 입시에서 본고사를 부활하겠다는 연세대와는 달리 본고사를 부활하지 않겠다고 하여 여론의 호감을 받았다. 그러나 형식적으로 본고사를 부활하지 않더라도 내용적으로 학생을 출신 고등학교에 따라 이렇게 야만적으로 차별을 한다면, 본고사를 부활하지 않겠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본고사 부활 반대라는 주장이 내밀한 고교등급제 혹은 입시사고 혹은 입시부정을 은폐하려는 시도로 읽힐 수밖에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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