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권력, 정의, 진상 규명, 법, 질서 따위 단어들이 정부와 시민사회 사이에 완전히 상반되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이에 관해서는 며칠 전에 <프레시안>에 기고한 글을 참고하기 바란다. ☞관련 기사 : 다시 '공권력'을 생각한다) 전에도 이런 현상들은 있었지만, 용산 참사 이후처럼 노골적이고 선명하게 나타난 적은 없었다.
검찰의 진상 규명이라는 것이 엉뚱하게 왜곡, 축소, 조작, 은폐의 기미를 보이기 때문에 특검이나 국정조사가 필요하다는 말에 한나라당은 "정치 공방"이라고 일축한다. 정치인들이 모인 패거리, 즉 정당이라는 집단이 "정치 공방"은 받아들을 수 없다니, 곧 정치를 자기들끼리만 하겠다는 소리에 다름 아니다. 군주정이던 조선시대에도 정치를 자기들끼리만 하면 "천단"이라고 해서 공론의 질타를 받았고, 결국은 오래 견디지 못했다. 천단(擅斷)이란 제멋대로 하는 처단을 가리키는 말로 요즘 말로 하면 자의적 권력 행사, 곧 독재가 된다.
시민들의 언로를 통제하면 독재로 통하지 않겠느냐는 우려에 대통령은 "요즘 같은 민주주의에서 어떻게 독재를 하겠느냐"고 답했다고 한다. 말을 잘 새겨서 들어야 한다. 그가 의미하는 "요즘 같은 민주주의"란 추모 대회를 막기 위해 경찰 버스가 청계광장을 사전 점거하고 원천 봉쇄하는 사정을 뜻하기 때문이다. 동문서답으로 일관하는 대통령의 독특한 "대화" 방식에 분통이 터지고 눈물이 나왔다는 누리꾼들이 넘치는 판에, 여전히 대통령은 성공적 국정 운영을 위한 "기본적인 코드는 화합과 소통"이라고 확인했단다. (1일 장·차관 워크숍).
기가 막히다 못해 경이롭지 않은가, 이런 종류의 언어도단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다니! 곽승준과 강만수를 두고 "회전문 인사"라고 물어봤자 "어떤 분이 그런 소리를 하느냐"고 일축할 수 있다는 것은 세입자들의 생존권 투쟁을 "도심 테러"라고 부르는 어법과 너무나도 닮았다. 나는 이런 어법을 무지르기 또는 뭉개기로 부르는데, <연합뉴스>는 "진솔한 소통"이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그래도 정부가 방송을 장악한 것은 아니고, 단지 그들의 언어 감각에서는 이런 것을 "민주주의"라고 부를 뿐이다.
▲ "경제라는 말에서 토목 공사 밖에는 연상할 수 없다면, 정치라는 말에서 강권 통치 밖에는 상상되지 않는다면, 아무개처럼 "머리를 빌리는" 방법이라도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머리를 빌리려고 해도, 어떤 머리를 누구에게서 빌려야 할지는 또 누구에게 물어야 한단 말인가? 그래서 국민에 대한 공포증에서부터 벗어나야 하는 것이다." ⓒ프레시안 |
박정희는 1963년 선거에서 혁명위원회의 막강한 후원을 입고도 불과 15만 표차로 신승했다. 이 때문에 선거 공포증에 걸려서 삼선개헌도 모자라 유신까지 감행하고, 결국 종신 대통령이 되었다. 물러나기가 너무나 겁났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강경파는 하마스 때문이라며 전쟁을 일으키고, 하마스는 이스라엘 때문이라며 로켓포를 쏘아댄다. 혹시라도 평화가 정착되면 맨 먼저 자신들의 입지가 사라지기 때문에, 두려워 할 이유를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자기최면이다. 자신의 명분이 옳다는 믿음이 있다면 무력은 최후의 방어선까지 아끼면서 설득을 시도하게 된다. 반면에 어딘지 켕기면, 서둘러 말을 비틀어 가면서 논점을 회피하거나 상대를 윽박지르다 못해 완력을 과시하게 된다.
용산에서 철거민들은 물리적으로 망루 투쟁에 나섰지만, 심리적으로는 대통령이 망루 투쟁을 벌인 셈이다. 아무리 언어를 비틀어도 747이 허황한 것은 천지간에 판명이 났고, "비핵개방 3000"을 북한은 "전쟁 접경"으로 간주한다. 170석을 가진 여당이 90석 남짓한 야당에게 밀려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에서부터 언론법, 집시법 등, 전략적 법안들이 모두 저지당했다. 뜻대로 되는 일도 없고, 상황을 이해할 수도 없다. 미국산 쇠고기 땜에 불붙었던 촛불의 악몽이 눈엣가시처럼 남아서 어른거릴 것이다.
촛불이 귀찮고 성가시고 무서운가? 국민의 목소리를 경찰력으로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2008년의 촛불을 경찰력이 껐다고 생각하는가? 조·중·동이 "위기"라면서 바람만 잡아주면 무슨 짓을 해도 국민이 둘릴 것으로 봤는가?
오히려 정반대를 2008년의 촛불에서 읽어야 한다. 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거부는 차라리 실체적이었다기보다는 다분히 정서적이었다고 읽어야 한다. 경찰력은 촛불을 끄기보다 도리어 자극했음을 깨달아야 한다. 촛불은 스스로 꺼진 것이고, 거기가 국민이 인내할 한계였음을 읽어야 한다. 국민의 준엄한 경고를 시기해서 무시하거나 두려워서 피할 일이 아니라, 올바로 해석해서 정책으로 반영하면 된다.
"가진 재산의 한도 안에서 생활하는 사람은 상상력 결핍증을 앓는다." 오스카 와일드의 말이다. 자기 생각의 한도 안에 사로잡힌 사람은 바로 상상력이 없는 사람이다. 이해되지 않는 일들이 벌어질 때에는 두려움에 사로잡힐 일이 아니고, 상상력을 확장해서 자신의 이해력을 늘려야 한다.
경제라는 말에서 토목 공사 밖에는 연상할 수 없다면, 정치라는 말에서 강권 통치 밖에는 상상되지 않는다면, 아무개처럼 "머리를 빌리는" 방법이라도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머리를 빌리려고 해도, 어떤 머리를 누구에게서 빌려야 할지는 또 누구에게 물어야 한단 말인가? 그래서 국민에 대한 공포증에서부터 벗어나야 하는 것이다.
어차피 남은 4년에서 큰 기대를 거는 국민은 이미 별로 없다. 대부분은 더 이상의 사고만 없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자존심이 상하겠지만 별 수는 없다. 그나마 현란했던 공약들을 국민이 더 이상 추궁하지만 않아도 다행으로 여겨야 한다. 노무현과 확실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식의 시기심만 떨쳐버릴 수 있다면, 국민을 적으로 여기는 정서적 공황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
용산 철거민들은 용역과 경찰이 두려워서 망루에 올라갔다. 쫓겨나지 않은 상태에서 말로 의사를 표현할 길이 있었다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부가, 공권력이, 법이, 이웃이, 공동체가 자기들의 입장을 살펴주고 자기들의 요구를 이해해 주리라는 희망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70살 넘은 호프집 사장님이 화염병을 들었겠느냐는 따님의 절규가 내게는 절실하게 와 닿는다.
대통령은 정부와 공권력과 법과 이웃과 공동체를 대표한다. 말로 얘기해서 국민을 설득할 수 없다고 절망에 빠질 이유가 없다. 말을 하는데 국민이 설득되지 않는다면, 말하는 방법이 잘못되었거나 자기 말이 틀렸기 때문이다. 한마디도 지지 않으려고 고집을 피우다가는 모든 사소한 일에 정권의 사활을 걸어야 한다. 그것이 히틀러와 김일성의 한계고 전체주의의 본질이다. 말의 길이 곧 이치임을 모르고, 이치의 실존을 믿지 못했기 때문이다. 모든 절망과 공포의 뿌리가 거기에 있다.
내 눈에는 31일에 청계광장을 원천봉쇄한 경찰 버스가 대통령이 지은 망루로 보인다. 내 눈에는 서울경찰청장이 대통령이 준비한 시너 통으로 보인다. 시너 통을 놓고 망루에서 내려오기를 바란다. 국민은 두려워 할 상대가 아니라 봉사해야 할 주인이다. 경찰과 국민을 더 이상 이간하면, 공권력의 권위가 정말로 위험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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