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운동, 민주청년회, 시민모임을 거쳐 현재의 노동운동까지 합치면 25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을 운동판에서 보냈다. 하지만 또다시 파시즘 정책을 노골적으로 내놓는 한나라당이 정권을 장악하여 국민을 맘대로 우롱하는 세월이 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나아가 '내부의 적'이라는 말을 숱하게 들어봤지만, 2007년 하반기 20년 변혁운동의 성과를 깡그리 깔아뭉개는 분열적 상황이 변혁운동진영 내부에서 일어나리라고는 더더욱 상상하지 못했다.
나는 순진하게도, 종북주의 혹은 마르크스·레닌-교조주의나 사민주의에 좀 치우치면 안 되는 건가, 나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동지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지금까지 함께 했는데, 왜 꼭 군부독재 시절 안기부 관점으로 몰아붙여야 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가 없었다. 마찬가지로 다른 노조에 비해 초가삼간에 지나지 않는 한국비정규교수노동조합운동에 최근처럼 희망과 절망이 엇갈리는 상황이 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이전투구하는 듯한 지금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서 반성하는 심정으로 한국비정규교수노동조합 활동을 돌아보고자 한다.
사회변혁 운동가들은 사회변혁의 실천적 무기로서 다양한 유형의 조직을 건설했다. 투쟁과 희생 그리고 성과 속에서 그 유용성이 검증된 조직은 지금도 푸른 생명력을 가지고서 현실 운동 속에 살아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는 활자라는 화석 속에 남아있거나 지식인의 유희자료로 존재할 뿐이다. 그러한 조직형태 중 다양한 노동자들을 가장 폭 넓게 담을 수 있는 조직으로서 노동조합은 자본주의와 거의 비슷한 역사를 가지고 있을 만큼 강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이처럼 노동조합은 노동자뿐만 아니라 노동자와 다른 입장을 가진 쪽에서도 탐을 낼 만큼 엄청나게 많은 장점을 지니고 있지만, 노동조합 조직 운영은 쉽지가 않다. 한국사회의 비정규교수들 또한 노동조합을 건설했고, 계획했던 목표를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해왔지만, 목표했던 지점이 여전히 멀기만 한 이유는 내외적 측면 모두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번듯해 보이는 한국 사회 구석구석에 찰거머리처럼 붙어있는 봉건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주체적 역량에서도 분명한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그 투쟁의 역사는 미끈한 미인의 모습이 되지 못했다.
정규직이 아닌 다양한 형태의 비정규직 교수들은 일반적으로 '노동자'라는 말에 대해 적잖이 혼란스러워 한다. 이유는 일차적으로 자신의 사회적 존재가 노동자이지만, 노동자로 인식할 수 없게 하는 한국사회의 성격에 기본적 원인이 있다. 지식인이 가진 소시민적 정서 때문이기도 하다. 굳이 사회과학적으로 분석하지 않아도 비정규직 교수는 기회주의적 속성을 가진 노동자인 것은 분명하다. 교육·연구·강의준비·강의 등 노동의 특성상 개별 분산적이며, 자아도취적인 성향을 보이기도 한다. 노동가치의 생산은 정규직과 동일하지만, 노동력의 가격책정과 사회문화적 대우는 현대판 노예제도 속에나 찾을 수 있는 수준임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노동자가 아닌 다른 존재로 대우받고 싶어 하는 데서도 그 혼란의 요인을 찾을 수 있다.
▲ 비정규직 교수의 노동력 가격책정과 사회문화적 대우는 현대판 노예제도 속에나 찾을 수 있는 수준임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노동자가 아닌 다른 존재로 대우받고 싶어 한다. ⓒ이광수 |
한편 정규직 교수의 무관심과 대학교육에 대한 책임 방기 또한 기본적인 원인이다. 대학교육을 함께 책임지고 있는 동반자이지만, 그들은 섭섭하게도 동조적일 때보다는 방해자 역할을 할 때가 많다. 사회의 지극히 특정 부분에만 자본주의성 옷을 입혀놓은 한국사회에서 운 좋게도 그 근사한 옷을 걸치게 된 사람들은 결코 우리 사회의 부조리한 구석을 애써 인식 하려 하지 않는다. 사회 진리를 탐구하는 지식인의 위상에 관해 생각해본다면, 정규직이 되지못함으로서 노동조합을 건설하게 되었고, 그 활동을 통해서 자신의 내부를 변화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한국대학교육사와 변혁운동에도 실천과 인식을 통일시켜 나가야 하는 비정규직 교수의 위상은 오히려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비정규교수노동조합의 연혁과 주요 사건
구조를 살펴보기 위한 지름길로서 연혁과 주요한 사건을 살펴보기로 한다. 해방직후, 한국사회의 변혁성을 띈 대중조직과 활동가들은 미군정 3년을 거치면서 거덜이 났고, 그나마 남아있던 지하조직과 자생적 활동가들도 4.19 이후 박정희 독재정권을 거치면서 완전히 와해되었다. 1980년 광주항쟁을 통해 피를 흠뻑 마셨던 민주화운동은 마침내 87년 6월 전민항쟁을 일구어냈다. 그 성과는 노동자, 농민을 비롯한 전민중의 의식화와 조직화의 쟁취로 이어졌다. 즉 식민지 파시즘적 독재의 거대한 허상이 민중들 앞에 무릎을 꿇었고, 부문별로 바쁘게 대중조직을 건설했다. 현대판 노예상태에 다름 아닌 비정규 교수들도 이 틈새를 놓치지 않고 1987년에서 1990년 초반 무렵에 걸쳐 대학강사협의회와 노동조합을 건설하였다.
1987년 11월 27일 서울대학교강사협의회가 창립되었으며, 같은 해 12월 18일 성균관대학교강사협의회, 1988년 3월 31일 영남대학교강사협의회, 5월 31일 서울대학교 노동조합 창립, 이어 전남대학교, 연세대학교, 부산대학교, 그리고 고려대학교가 같은 해 11월 18일 강사노동조합을 창립했다. 이와 같은 성과를 모아 우선 1988년 8월 3일 고려대학교 강당에 집결하여 '대학강사의 처우개선 및 사회와 교육의 민주화'라는 취지로 "전국대학강사협의회"를 정식으로 발족하고 운영위원장으로 진영종 교수를 선출했다. 한국사회에서 이 시기는 6월항쟁의 힘을 받아 소위 7.8월 노동자 대투쟁을 계기로 너나할 것 없이 전국적으로 민주노동조합을 활발하게 건설하던 때다. 비정규교수들도 이 흐름을 놓치지 않고 강사협의회 혹은 노동조합이라는 조직을 건설했다.
어느 의사의 말처럼, 원자폭탄이 떨어져도 자기 집만 아니면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게 의사집단이라고 하지만, 교수 집단, 지식인 집단의 이기심 또한 이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다. 이들을 대상으로 노동조합을 건설하고 운영한다는 데는 대단한 인내와 신념 그리고 노력이 필요하다. 1991년 서울대 분회장을 맡았던 권성우 교수의 인사말 속에는 그와 같은 어려움이 잘 나타나 있다.
"전강노 분회장이라는 자리를 맡은 지 어언 두 달, 그 시간들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역사는 과연 발전하는가, 인간의 욕망이란 무엇인가, 등의 근원적인 질문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한 물음과 관계하여 몇 번이나 전화를 걸어도 아리송한 이유로 계속 노조회의에 불참하는 선생님들…, 아무도 분회장을 맡을 사람이 없는 상황…, 이와 같은 풍경들에는 인간의 개인적 욕망과 더불어 역사라는 빛나는 성좌를 향한 고귀한 희생정신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 88년, 89년 그 활기찬 활동이 이토록 비참한 상태로 전락하였는지요, 그 원인을 성실하게 파고들면서 역사와 인간의 욕망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의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
한편 대학 강사의 정서를 고려할 때, 노동조합보다는 강사협의회가 더 적합한 조직형식이라는 주장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강사협의회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대중성 획득이라는 측면에 중심을 두고 있다. 그러나 막상 강사협의회 형식으로 조직운영을 해도 대중성 획득이 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존재를 노동자로서 인정하기가 쉽지 않은 대학 강사의 의식수준으로 인해 강사협의회에서 노동조합으로의 조직 전환은 쉽지 않았다. 1991년 전강노2(~3대)대 위원장을 지냈던 한면희 교수가 펼치고 있는, 주장이라기보다는 설득으로 볼 수 있는 이와 관련된 두 단계 조직 발전론에서도 이러한 고충을 엿볼 수 있다.
"대학강사 노동조합운동은, 대학강사가 스스로 노동자로 규정지을 수밖에 없는 물리적 여건속에서 자주적으로 자기 현실을 개혁하기 위해 내린 결단이므로 노동운동임이 분명합니다. 다만 협의회운동에서 노동운동으로 전환이 너무 성급했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
비정규교수노동조합 활동 경험이 있는 사람이면, 강사협의회라는 조직으로서는 교육과 연구에서 굳이 필요하지 않은 식은 밥과 같은 성과는 구걸하여 얻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동일가치를 생산한 댓가를 요구할 권리와, 동일한 교육연구조건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노동조합 조직이 보다 적합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대학은 한국사회 그 어떤 집단보다 정규직과 비정규직간의 차별이 가혹하게 존재하는 곳이다. 강의와 이론 속에서 인간 평등론이 있을 수 있지만, 대학 현실 속에는 불평등론만이 존재한다. 비록 교수들간이지만, 노사의 입장에서 한 치의 양보도 없는 팽팽한 줄다리기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한계가 선명하지만 법과 제도가 보장하는 투쟁조직이 유효한 건 지극히 당연하다.
이와 같은 내외적 혼란 속에서 1990년 4월 28일 서울대학교에 200여 대학강사가 모여 전국강사노동조합을 결성했다. 성균관대, 서울대, 영남대, 전남대에 전국강사노동조합 분회가 건설되었으며, 고려대, 연세대, 서강대, 건국대, 덕성여대, 외대, 한양대, 이화여대, 부산대, 전북대, 강원대 등에 분회 준비위가 건설되었다. 비정규교수들이 해방직후의 산별노동조합이 와해된 이후 최초로 전국단일노동조합을 건설한 것이다. 내용에서 한계가 있다고 하더라도 한국노동조합 운동사에서 그 의의는 자못 높다고 평가할 수 있다. 전국대학강사노동조합 준비위원회는, 이를 위해 사전에 일목요연하게 준비 작업을 했다. '전국단일 노조의 결의'라는 문건 속에 제시된 조직의 진로는 지금도 그 의미는 퇴색하지 않았다. 요약해서 살펴보자.
"1988년 8월 전국대학강사협의를 건설하여 11개 대학이 가입되어 있다. 부분적으로 강의료 인상, 학교부대시설 이용 등의 개선이 이루어 졌으나, 우리의 근본적 요구라 할 수 있는 6개월 강의료 지급, 최저생계비 지급 교권 인정 등의 요구는 무시되고 있으며, 결국 사학비리의 총알받이 그 이상이 아니다. 우리가 대학교육주체로 서기 위해서는 결국 우리 스스로 노예사슬을 끊어야 하며, 그 조직방도는 바로 전국단일 노동조합 건설 및 그 합법성 쟁취이다. 이를 위해 다음과 같이 결의한다. 하나, 우리 강사들은 가지고 있는 힘을 다해 총집결하여 빠른 시일 내에 전국대학강사노동조합을 건설한다. 하나, 민족. 민주교육의 실현을 위해 투쟁하고 있는 민주제단체와 협력하여 현행의 교육적 모순을 타파한다. 하나, 교육주체로서의 대학강사의 자기실현을 가로막고 있는 법적. 제도적 장치를 개폐하는데 우리 강사들은 적극 노력한다."
그러나 노동부는 1990년 5월 23일 '전국대학강사노동조합 설립신고서'를 반려한다. 납득할만한 법적, 사회적 이유라든가 근거는 없었다. 굳이 찾아본다면, 노동 및 교육 관계 관련자의 무지와 횡포였다 라고나 할까. 중요한 건 지금도 그 무지와 횡포가 자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막막한 사회적 한계가 있다고 해도 노동조합을 건설했다는 의미 그 자체가 희석화될 수는 없다. 지금 이 시점에서 분명히 알 수 있는 바는, 당시 노동조합의 절실한 과제는 전국 단일 조직화였으며, 합법성의 쟁취였다. 이 문제는 결코 쉽지 않았다. 정부의 교묘한 탄압과 대학당국의 얼토당토 않는 비논리, 반논리, 일방적 부정과 탄압 속에서도 마침내 전국대학강사협의회는 전국대학강사노동조합으로 전환되었으며, 1994년 합법성도 쟁취했다.
합법성의 쟁취에서 절망의 현장으로
1994년 합법성을 쟁취했다. 이는 어디까지나 법, 형식적 차원의 성과일 뿐이었다. 노동조합이라는 그릇 속에 채워 넣어야 할 내용은 여전히 거대한 산처럼 현실적 과제로 남아 있었다. 노사 간의 승패는 힘과 논리의 역관계속에서 결정된다. 말이 필요가 없다. 즉 힘없는 노동조합은 있으나 마나하다. 힘없는 노동조합에게 그 어떤 맘 고운 사용자가 단협을 안겨줄 것이며, 투쟁하지 않는 노동조합에게 그 어떤 성과를 줄 것인가. 전국 단일 노동조합이긴 하나, 실제로는 기업별노동조합들의 연맹체 수준도 되지 않았다. 협의체 수준이었을 뿐만 아니라, 개별분회 그 어느 곳에도 제대로 된 단체협약 하나 쟁취한 곳이 없었다. 성균관대학 분회가 그나마 노사합의서 정도를 체결한 수준이었다. 1998년에도 성균관대학분회는 29일간의 천막농성을 전개했지만, 98년에 이어 '강사료 동결' 등 핵심적 사안이었던 개악된 '강사임용규정'을 철회하지는 못했다. 적이 강해서가 아니라, 아가 몹시 허약했던 시절이었다.
내적 동력 보다는 객관적 조건에 힘입어 건설했던 조직의 한계로서 1990년대 중반을 넘어서자 조직은 내리막길을 가파르게 걷기 시작했다. 1997년을 넘어갈 무렵 전국 대부분의 분회가 유명무실해지거나, 자연 소멸되었다. 최소한의 실천투쟁으로 단련된 성균관대학분회와 영남대 분회만이 노동조합으로서의 최소한의 면모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희망을 찾을 수 없다고 판단한 활동가들은 다른 현장을 찾아 한두 명씩 떠나가고 있었다. 노동운동으로서는 절망의 현장으로 전락하고 있었던 것이다.
2000년 새로운 희망이 희미하게 천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작아보이던 그 희망은 "대중투쟁은 반드시 승리하라"는 실천투쟁의 기본원칙에 입각하여, 30일이 훨씬 넘는 투쟁을 승리로 이끌어냈다. 대중 조합원은 노동조합 간부들의 희생적인 활동에 감동하지만, 투쟁에서 승리 할 때면 더욱 큰 신뢰로 화답한다. 이어 2001년 더욱 세련된 투쟁을 전개하여 마침내 한국비정규교수노동조합이 건설된 지 11년 만에 처음으로 그럴싸한 단체협약을 체결했다. 바로 영남대 분회 투쟁이었다. 1998년 성균관대학 본부가 강사노예 족쇄로 창안했던 '강사임용규정안'을 영남대학 본부가 그대로 도입하여 시행하려는 찰나 기다렸다는 듯이 실천투쟁으로 맞받아쳐서 승리의 깃발을 꽂아버린 것이다. 이어 "모범을 창출하고 이를 보편화하라"는 투쟁원칙에 기반하여 대구 경북지역에 분회들 및 지부가 건설되었으며, 이후 광주, 부산, 서울 등에서도 새로이 분회들이 재건되기 시작했다.
"어리석은 지도자보다 더 무서운 적은 없다"
운동은 다양한 요소를 갖추어야 살아있는 생물이 성장하듯 세포분열하며 발전한다. 단결과 연대 그리고 실천 정신에 입각하여 활동한다든지, 사상성, 조직성, 대중성이라는 요소를 잘 배합해야만, 조합주의 즉 자기조직 이기주의에 빠지지 않고 변혁운동의 대의에 복무하며 조직을 발전시킬 수 있다. 노동조합 투쟁사를 훑어보면 숱한 조직이 와해되고, 패배하고, 분열하고 좌절한다. 하지만 간혹 절대로 불가능해 보이는 목표를 성취하는 경우도 있다. 그 우여곡절의 노동조합사가 바로 한국비정규교수노동조합사이다.
오늘날 한국비정규교수노동조합은, 80년대 말 강사협의회로 출발하여, 90년대 노동조합으로 조직전환을 했으며, 90년대 중반 조직소멸의 위기를 극복하고, 2000년 노동조합으로 명실상부 재탄생하였으며, 2000년 중반을 거치면서 다소 혼란스런 분열상황에 접어들었다. 그 과정을 돌아보면, 우리는 많은 교훈을 얻는다. 지금 비정규교수노동조합운동은 단순한 노동조합운동이 아니라, 한국사회의 지식인 운동이며, 교육 연구 노동운동이다. 지식인이라 해서 모두가 지식인이 아니다. 이 활동과정 속에서, 처절한 실천투쟁 과정 속에서 선과 악을 정확하게 구분할 수 있을 때, 그렇게 검증된 지식인만을 우리는 시대정신을 갖춘 지식인이라 부를 수 있다.
우리 노동조합운동의 궁극적인 목표가 올바른 교육을 할 수 있는 사회개혁 혹은 사회구조의 혁신이라면, 이를 위해 진실해야 한다. 좀 더 잘하고 못하고는 두 번째 문제라고 본다. 험난했던 시기를 힘들게 헤쳐 왔던 과거를 돌아봐야 한다. 분열도 있었다. 그 원인은 분명했다. 독단과 이기심이었다. 분열의 요인은 누군가의 이기심, 욕심 및 무지에서 오는 것이었다.
▲ 분열의 요인은 누군가의 이기심, 욕심 및 무지에서 오는 것 ... 한국비정규교수노동조합은 다시 한 번 교육자로서, 노동자로서 자신의 존재를 겸허하게 돌아봐야 할 것이다. ⓒ이광수 |
외부의 적보다는 내부의 적이 훨씬 심각한 지금, 한국비정규교수노동조합은 다시 한 번 교육자로서, 노동자로서 자신의 존재를 겸허하게 돌아봐야 할 것이다. 당면한 교원지위 쟁취와 척박한 대학교육 현실의 개혁을 위해 자신의 이기심을 심각하게 반성해야 한다. 실천하지 않고 투쟁하지 않고, 입으로, 손가락으로 투쟁하는 자들은 혹한 속에서 실천하며, 투쟁하는 동지들에게 최소한의 지적 양심을 보여주어야 하며, 반대로 좀 더 앞선 동지들은 그렇지 않은 동지들을 사심 없이 포용해주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좀 더 자랑스러운 투쟁을 열어가지 못하는 한국비정규교수노동조합 전체 간부들은 "어리석은 지도자보다 더 무서운 적은 없다"는 경귀를 조용히 새겨봤으면 한다.
*이 연재는 한국비정규교수노동조합 교원법적지위쟁취특별위원회의 기획으로 진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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