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로 시작해 불로 끝난 무자년
▲ 설날 연휴의 마지막 날인 2008년 2월 10일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문화재로 여기는 숭례문이 어처구니없는 화재로 전 국민이 바라보는 가운데 소실되었다. 이렇게 시작부터 대한민국을 공격했던 화마는 결국 무자년이 끝날 무렵인 지난 1월 20일 여섯 사람의 생명을 앗아갔다. ⓒ뉴시스 |
무자년은 시작부터 불길했다. 설날 연휴의 마지막 날인 2월 10일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문화재로 여기는 숭례문이 어처구니없는 화재로 전 국민이 바라보는 가운데 소실되었다. 이렇게 시작부터 대한민국을 공격했던 화마는 결국 무자년이 끝날 무렵인 지난 1월 20일 여섯 사람의 생명을 앗아갔다. 무자년은 이렇게 화마로 시작해 화마로 끝났다.
이를 놓고 <프레시안>의 한 기자는 한 역술인의 경고를 떠올린다. "한 역술인이 이런 얘기를 했다. 이명박 대통령 사주에 '화기'가 많다고. 그래서 임기 중에 불과 관련된 사고가 잦을 거라고. 또 이런 이유로 한반도 대운하처럼 '물'에 집착하는 거라고. 무자년의 시작과 끝에 일어난 끔찍한 화재를 보면서 이 얘기가 머릿속에서 계속 맴돈다."
이뿐만이 아니다. 숭례문 화재와 용산 참사는 화재 외에도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 용산 참사를 보도하면서 일부 외국 언론이 날카롭게 지적했듯이, 두 사건 다 개발을 한답시고 서민의 삶의 터전을 강제 수용해온 관행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잘 알다시피 이 대통령은 역대 정부와 유착해 그런 관행을 다지는 데 기여한 기업에서 경력을 쌓아왔다.
한 기자는 용산 참사를 놓고 이렇게 말한다. "용산 참사는 이명박을 마스코트로 하는 '한국형 자본주의'라는 괴물이 도시 빈민부터 시작해 아래로부터 사람들을 덥썩덥썩 잡아먹을 것이라는 사실을 예고하는 '신호탄'이다. 이명박이 이 괴물의 마스코트라는 사실은 '뉴타운'을 통해 확인된다. 슬프게도 이 괴물은 호위대까지 끌고 다닌다. 경찰, 검찰, 언론이 그들이다."
불길하게도 이명박 대통령과 일부 여당 의원들은 "전국에 망치 소리가 들리게 해야 한다"며 앞으로도 괴물의 활약이 계속될 것임을 예고했다. 또 다른 기자의 말이다. "그 망치 소리와 함께 개발이라는 명목 하에 괴물에게 갈기갈기 찢길 이들이 방방곡곡에서 내는 고통의 신음이 도처에서 들릴 것이다. 난 아니라고? 안심하지 말라. 다음 차례는 바로 당신일 수 있다."
▲ 4대강 살리기 프로젝트의 첫 사업인 낙동강 안동2지구 생태하천 조성사업이 지난해 12월 29일 경북 안동시 운흥동 낙동강변 둔치에서 착공식을 가졌다. 정부와 한나라당은 "전국에 망치 소리가 들리게 해야 한다"는 데 뜻을 같이 했다. ⓒ뉴시스 |
퇴행하는 민주주의, 유린당한 헌법
민주주의는 쉽게 퇴보하지 않는다. 말 그대로 수많은 사람들이 흘린 피를 먹으며 이만큼 성장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놓고 많은 이들은 이 말을 믿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수십 년간 유린당했던 헌법 제1조가 이제야 제자리를 잡는 것 같았다.
무자년은 이런 믿음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한해였다. <프레시안> 기자들은 취재 현장 곳곳에서 들었던 권력을 쥔 자들이 내뱉는 말들의 홍수 속에서 이런 민주주의가 퇴보하는 현실을 목격했다. 당장 무자년이 끝날 무렵 일어났던 용산 참사를 놓고 장윤석, 신지호, 이범래, 이은재 등 한나라당 의원들은 화마에 숨진 이들의 농성을 "도시 테러"로 규정했다.
이 발언을 직접 들은 한 기자의 얘기다. "'과격 시위' 정도의 발언에서 끝낼 거라는 내 예측은 어긋났다. 이제 자본의 돈벌이를 위해서 삶의 터전에서 몇 푼 보상을 받고 쫓겨나야 하는 철거민은 '테러리스트'로 규정되었다. 용산 참사 때 희생당한 자영업자들이야말로 한나라당의 가장 큰 지지 기반 아니었나. 한국에서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 게 아니었다."
사실 이전에도 이 정부는 시민을 테러리스트로 규정했다. 2008년 6월 1일 서울시경찰청 경비과장의 얘기다. "물대포는 안전하다. 물대포를 맞고 부상당했다면 거짓말이다." 그 말을 기억하는 한 기자, 용산 참사를 보고 이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안전해서 유모차에도 쏘고, 결국에는 용산 참사 현장에 시너가 있는지 알면서도 마구 쏘아댔구나."
상처 받은 민주주의, 그 절정은 바로 검찰의 누리꾼 미네르바 구속이다. 평소 이명박 정권과 검찰의 관계를 감안할 때 과연 이 일이 검찰의 자체적인 판단에 의한 것인지는 심히 의심스럽다. 한 기자의 말을 들어보자. "2008년 대한민국이 얼마나 비정상적인지를 보여주는 희대의 코미디다." 난 아니라고? 다시 한 번 경고한다. 안심하지 말라.
▲ 2008년 6월 1일 서울시경찰청 경비과장의 얘기다. "물대포는 안전하다. 물대포를 맞고 부상당했다면 거짓말이다." 경찰은 2008년 한 해 물대포를 미국산 쇠고기 고시 철회를 요구하는 촛불 집회를 비롯한 곳곳에서 쏘아댔다. ⓒ프레시안 |
사익 추구 집단의 역공세
이명박 정부가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하고자 안간힘을 쓰는 모습은 이 정부의 성격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명박 대통령은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하면서 지난 4월 21일 이렇게 말했다. 한우를 키우는 농민, 광우병 감염 위험을 걱정하는 국민에 대한 존중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이 말은 이렇다. "값싸고 질 좋은 미국산 쇠고기."
지난 11월 13일 종합부동산세 위헌 판결 역시 대한민국이 '강부자 나라'라는 사실을 한 번 더 확인시켜준 일이다. "이명박 대통령과 그 하수인뿐만 아니라 입법부, 사법부에 있는 권력을 쥔 자들이 '공익'과 '사익'을 전혀 구분하지 못하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 사건이다. 이 과정에서 '부자한테는 대못을 박아도 되느냐'고 목소리를 높인 강만수도 꼭 기억하자."
그들을 이 지경으로 안하무인으로 만든 데는 민주주의야 유린되든 말든 역시 사익만 추구하려는 보수 언론의 책임이 크다. 지난 5월부터 수개월간 촛불을 든 시민들은 그 인과 관계를 예민하게 포착했다. 그러나 아직 시민의 힘은 보수 정권, 보수 언론에 맞서 역주행을 멈추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역공세가 시작되었다. 평생 사익을 좇아 움직여온 그들은 보수 언론에 더해서 아주 큰 영향력을 갖는 방송을 장악하는 것이야말로 권력을 지키는 선결 조건이라고 믿었다. 급기야 한국방송(KBS), YTN을 장악한 이명박 대통령의 하수인은 지난 10월과 1월 '밉보인' 기자, PD를 해고하기에 이른다.
이런 동료의 해직 사태를 지켜본 <프레시안> 기자의 얘기를 들어보자. "이번 해직 사태를 보면서 우선 한국 사회에 권력에 빌붙는 '개'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한 번 더 체감했다. 그들과 같은 '기자'라는 게 부끄럽다." "처음 소식을 접했을 때 진짜 놀랐다. 한편으로는 평범한 기자, PD가 어떻게 투사로 재탄생하는지를 보는 순간이기도 했다."
▲ 무자년 한 해는 평범한 기자, PD, 아나운서마저 거리로 나오게 만들었다. YTN 구성원들은 구본홍 사장에 반대했고, MBC 등 방송사 구성원들은 언론법 개정에 반대해 파업을 벌였으며, 최근 KBS PD·기자 해직 사태는 '제작 거부' 투쟁으로 이어졌다. ⓒ프레시안 |
소 걸음으로 천리길을 가자
마침 세계 역시 모든 게 불확실한 상황이다. '역사의 종언'을 감히 입에 올릴 만큼 승승장구하던 자본주의는 그 심각한 약점을 드러냈다. 전 세계 강국으로 군림하던 미국은 안팎의 위기 상황 속에서 최초의 '흑인 대통령'을 새로운 지도자로 맞았다. 전염병, 먹을거리 세계화, 기후 변화를 둘러싼 불확실한 하지만 치명적일 수 있는 위험도 목전에 있을지 모른다.
과연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 무자년은 그 희망의 근거가 바로 우리, 시민에게 있음을 보여준 한 해였다. 지난 5월 2일 삼삼오오 촛불을 들고 광장에 모였던 우리를 기억하는가? 지난 6월 10일 전국에서 타올랐던, 이명박 대통령이 고개를 조아릴 수밖에 없도록 만든 그 촛불의 물결을 기억하는가?
동아일보사, 조선일보사 앞에서 매일 울려 퍼졌던 "조중동은 물러가라" 구호를 기억하는가? 5월 2일부터 수개월간 거리에서 살았던 한 기자는 이렇게 말한다. "5월 2일, 모인 사람의 규모, 연령 때문에 놀라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많은 '보통' 시민이 한 목소리로 '조중동은 물러가라'고 외칠 때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 세기 가장 절망적이던 상황에서 중국의 사상가 루쉰이 했던 말을 떠올린다. "희망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이제 기축년(己丑年)이 새로 시작한다. 잘 알다시피 기축년을 상징하는 동물은 소다. 지난 1년간 온갖 모욕을 당했던 이 소를 염두에 둔 이런 말이 있다. 우보천리(牛步千里), 소걸음으로 천리를 간다. 이제 다시 시작하자.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다시 소걸음으로 나아가자. 온갖 모욕과 핍박 견디면서 다시 한걸음씩 어깨 걸고 뚜벅뚜벅 즐겁게 걸어가자.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설날을 앞두고 무자년을 회고하면서 프레시안 기자들이 '자유롭게' 올린 메모를 토대로 정리한 글입니다. 프레시안 사무실에는 '정언천리(正言千里)'라는 글이 가장 잘 보이는 위치에 걸려 있습니다. 기축년 프레시안 기자들도 소걸음으로 바른 말이 천리, 만리를 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독자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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