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그 깊이와 폭을 쉽게 예측하지 못한다는 경제위기가 시작됐다. 10년 전 공포의 기억으로 모두가 떨고 있다. 두려운 것은 사실 모두지만, 벌써부터 경제위기를 몸으로 실감하는 이들이 있다. 누구도 그 규모를 제대로 집계조차 하지 못하지만 비정규직은 이미 속속 일터에서 쫓겨나고 있다. 그나마 비정규직노조라도 있는 곳은 낫지만, 그곳에서마저도 그들의 고용을 지키기가 녹록치 않다. 저 멀리 청와대에서는 일자리 창출을 얘기하고, 바로 옆 일터에서는 일자리가 사라지고 있는 현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금속노조 박점규 미조직비정규사업부장이 <프레시안>에 3편의 글을 잇따라 연재한다. <편집자> |
"금속노조는 노조 활동하다 해고되면 생활비를 준다면서요? 저희 금속노조 가입하면 안 되나요?"
'2년이 되기 전에 아무 때나 해고할 수 있는' 비정규직법으로 강남성모병원에서 해고된 한 비정규직 노동자가 한 말이다. 이랜드노조, 코스콤, KTX·새마을호 승무원 등 부당한 해고에 맞서 싸우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가장 큰 걱정은 생계 문제다. 만약 노동조합에서 투쟁을 지원하고 생활비를 대준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싸울 수 있지 않을까?
금속노조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노조에 가입해 활동했다는 이유로 해고되면 생계비를 지급한다. 노조 규약 제14조 신분보장에는 "노동자의 권익 수호를 위한 투쟁과 조합활동의 과정에서 해고, 혹은 보복성 계약해지되거나 신분상, 신체상, 재산상의 불이익을 당했을 때~ 원상회복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되어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노조가입 및 활동을 이유로 '계약 해지' 됐을 경우 신분보장을 한다는 것이다. 금속노조는 투쟁기금, 신분보장기금, 장기투쟁대책기금 등 규약에 따라 세부적인 기금운영규정을 마련해놓고 있다.
노조 활동하다 계약해지되도 금속노조 소속이면 월 95만 원 받는다
▲ 이랜드노조, 코스콤, KTX·새마을호 승무원 등 부당한 해고에 맞서 싸우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가장 큰 걱정은 생계 문제다. 만약 노동조합에서 투쟁을 지원하고 생활비를 대준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싸울 수 있지 않을까?ⓒ프레시안 |
노조활동으로 인한 각종 벌금과 구속 시 변호사 비용도 금속노조가 지급한다. 현재 김수억 전 지회장, 신성원·이동우 전 부지회장 등 노조활동을 이유로 구속돼 있는 기아차 화성공장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변호사 비용, 임금, 영치금 등을 금속노조로부터 받고 있다.
금속노조 가입기금인 산별기금 3만 원을 내고 매월 통상급의 1%를 조합비로 내면 금속노조의 규약과 규정에 따라 조합원의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다.
물론 아직 부족한 것은 있다. 재정적 한계로 인해 신분보장 기금이 1년으로 한정돼 있어 이후에 대한 대책이 필요한 것. 하지만 1년이라도, 노조 활동을 하다 계약해지라는 '보복'을 당한 비정규직에게 신분보장 기금이 적지 않은 힘이 되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조용히' 나가면 다시 공장으로 돌아올 수 있다?
지난 연말 현대차 울산공장에서 에쿠스를 만들던 비정규직 노동자 115명이 해고됐다. 이들 중 금속노조 조합원은 한 명도 없었다. 금속노조 현대차울산비정규직지회 간부들이 일일이 만나 간담회를 했지만 노조에 가입하겠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내하청업체 사장들이 "괜히 노조에 가입했다가 찍히지 말고 조용히 나가면 나중에 다시 올 수 있다"고 '회유 작전'을 핀 공이 컸다. 거기에 당사자들도 비정규직의 노조 활동이란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당장 일터에서 쫓겨났지만 선뜻 노조 가입을 못 한 이유다.
하지만 그들이 다시 공장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경제위기를 이유로 남아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언제든 대량 해고가 예상되고 있는 지금? 언감생심 꿈도 꾸기 어려운 일이다. 더 안타까운 것은 이들이 현대차 울산공장보다 나은 직장을 구했다는 얘기도 들려오지 않는다.
지난해 10월부터 업체 관리자들의 '협박'으로 공장을 떠난 300여 명의 쌍용자동차 비정규직도 마찬가지다. 쌍용차비정규직지회 서맹섭 부지회장은 "공장을 떠난 동료들 중에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한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고 전했다.
'비정규직 대량해고'는 노조가 없는 곳부터 시작됐다
지난 1998년 현대자동차는 IMF 구제금융을 이유로 정규직을 정리해고하려 했다. 결과는 실패였다. 노동자들이 거세게 저항한 까닭이다. 2001년 대우자동차는 1750명을 정리해고했지만 노동자들은 투쟁을 통해 4~5년에 걸쳐 모두 공장으로 돌아왔다. 자본은 정리해고에 대한 큰 비용을 치러야 했다.
10년 후 경제 위기를 맞은 사용자들은 정규직보다 '저항의 비용'이 훨씬 적게 드는 비정규직 노동자를 희생양으로 삼고 있다. 노동조합이 없거나 어용노조 사업장의 비정규직 노동자가 1순위다. 비정규직지회가 만들어진 현대, 기아, GM대우, 쌍용 등 완성4사에서는 노조에 가입하지 않는 비정규직이 우선 순위다.
'1사1조직'을 통해 정규직 노조에 비정규직을 받아들인 기아자동차나, 정규직과 비정규직 연대의 모범인 금호타이어에서 일하는 비정규직은 다른 공장에 비해 상대적으로 고용불안을 덜 느끼고 있다. 비정규직을 집단해고하면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함께 싸울 것이고, 이들의 저항으로 자본이 지불할 비용이 커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정규직 노조의 힘이 약하거나 정규직 노동자들이 외면하는 사업장의 비정규직은 오늘도 언제 공장을 떠나야 할지 불안에 떨고 있다.
경제 위기에 살아남기 위한 당신의 선택은?
비정규직의 다른 이름은 '고용불안'이다. 경제위기가 심화되면서 언제 잘릴 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더욱 커지고 있다. 과거와 달리 비정규직 노동자의 평균연령이 높아지면서 대부분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어 해고는 곧 가정파탄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자본은 지금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앉아서 죽을 것이냐 서서 싸우다 죽을 것이냐를 선택하라고 하고 있다. 앉아서 죽을 수는 없다. 싸워서 살아야 한다. 열심히 땀 흘려 일한 죄밖에 없는 노동자,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을 견디며 일해 온 비정규직 노동자가 경제위기의 희생양이 될 수는 없다.
1998년과는 다르다. 그 때는 기업별노조밖에 없었다. 회사의 종업원이 아니면 노조에 가입하기 어려웠다. 10년이 지난 지금 금속노조, 공공노조, 운수노조, 보건의료노조, 건설노조 등 많은 산업별 노조가 만들어졌다. 노조 가입원서를 쓰고 기금과 조합비만 내면 누구나 조합원이 될 수 있다. 노조별로 완전하지는 않지만 비정규직에 대한 신분보장과 지원을 하고 있다.
고용불안이 심화되면서 금속노조에 가입하는 노동자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특히 지난 3개월 동안 현대, 기아, 쌍용차에서만 100명이 넘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금속노조에 가입했다. 금속노조는 규약 제2조에 따라 제조업에서 일하는 정규직은 물론 비정규직, 사무직, 해고자, 실업자, 이주노동자까지 누구나 가입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현재 사회복지기관에서 일하는 노동자도 금속노조 조합원이다.
회사가 어렵다고 비정규직부터 해고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면?
동료들과 함께 노조가입원서를 쓰고 산별노조에 가입하자. 비정규직을 해고하는 것보다 더 큰 비용이 든다면 회사는 다른 방법을 찾을 것이다. 저항하는 자만이 경제 위기 시대를 살아남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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