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사람답게 살고 싶은 소박한 마음"은 어떤 것일까? '사람답게'라는 말에는 여러 의미가 담겨져 있을 것이다. 사람답다. 무척이나 쉬운 말이면서도 아주 오랫동안 골똘히 생각하게 만드는 말이다. 이 말의 의미에는 사람의 본성이 담겨있을 것이다. 사람이란 무엇일까? 우리가 사람이지만 이 물음에 답하기란 쉽지 않다.
흔히 사람은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것을 인간의 본성이라고 한다. 이 본성은 인간을 규정하는 근본적인 말이다. 그렇지만 인간의 본성 중에는 어디 생각하는 능력만 있을까? 인간을 규정하는 말은 너무도 많다. '도덕적'이다. '유희'를 즐길 수 있다. 그리고 '노동'한다는 것도 인간을 규정하는 중요한 말이다. 어떻게 보면 이 모든 것을 실현할 수 있어야 인간답다는 말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기에 인간의 본성을 실현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울 듯하다.
인간답게 살아가는 사람의 이야기로 위인전을 살펴보면 좋을 것이다. 그렇지만 위인전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가공된 인물이다. 위인전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완벽하지만, 그 완벽이란 그럴 듯하게 포장된 외양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일제에 대항했던 김두환이라는 인물이 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아주 멋있는 사람으로 묘사된다. 그렇지만 이 사람은 깡패이다. 일제에 대항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도 않다. 그런데 대중매체에서 워낙 아름답게 포장했기 때문에 김두환은 깡패일 뿐이라고 말하면 이상한 소리 한다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역사에 등장하는 멋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역사에 등장하는 위인처럼 살고 싶어도 그렇게 살 수 없다. 대다수의 가장은 가족을 먹여 살리느라 바쁘고, 부인은 자식과 남편 뒷바라지에 여념이 없다. 자식들도 미래를 위한다는 거창한 구실로 공부 외에 다른 것을 할 여력이 없다. 최소한 한국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살고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 사람답게 사는 방법을 얘기하는 것은 머릿속에서나 가능한 일처럼도 보인다. 그렇지만 주변을 둘러보면 나름대로 사람답게 사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그들의 이야기는 돈이 되는 것이 아니기에 그저 흘려버릴 뿐이다.
여기서 소개할 책은 바로 이런 얘기다. 거창한 꿈을 꾸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그나마 사람답게 살아가는 얘기, 최순덕, 최종덕이 쓴 <최씨부부의 어처구니 있는 아파트 살이>가 바로 그 얘기이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결국 내가 사는 이 아파트에 정을 붙이고 살기로 했다. 이와 떠나지 못할 바에야 베드타운이라는 삭막한 아파트의 현실을 내 마음에서부터 부수고 나를 기다리게 하는 정겨운 아파트로 만들어 보자는 것이다." 이 말에는 무서운 현실이 있다. 생태적인 삶을 꿈꾸고, 한가롭게 전원을 꿈꾸는 것도 사치일 수 있다는 우리의 현실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무엇을 실천할까?
▲ <최씨부부의 어처구니 있는 아파트살이> (최순덕, 최종덕 지음, 당대 펴냄) ⓒ프레시안 |
앙리 르페브르라는 프랑스 철학자가 있다. 그는 현대 세계의 일상성을 '반복'으로 말하고 있다. 자본주의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은 정해진 시간에 일어난다. 그리고 정해진 시간에 밥을 먹고, 정해진 시간에 일터에 나간다. 그리고 정해진 일을 한다. 이러한 반복은 일 년 내내, 심지어 평생동안 지속된다. 이렇게 되면서 사람들은 일상에 묻혀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게 된다.
반복은 습관을 만든다. 습관대로 살아가는 현대인은 자신의 본성마저도 잃어가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벗어나는 방법은 없을까? 쳇바퀴 도는 일상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일까?
하나의 방법은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습관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변화를 줄 수 있는 사유를 시작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다. 너무도 단순하지만, 실천하기는 어렵다.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사람들은 자본주의 삶에서 강요하는 일상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서 여러 고민을 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귀농이다. 농촌에서 주는 풍요로움을 느끼면서 삶의 여유를 찾아보는 것이 하나의 방법이다. 그렇지만 소심한 사람들에게는 너무도 어려운 일이다. 당장 밥 먹고 살기 위해서 다니고 있는 직장은 어떻게 할 것인지, 아이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주변 사람들은 어떻게 말할 것인지…. 어쩔 수 없는 현실은 귀농의 꿈조차 꾸지 못하게 한다. 그런데 농촌에서 느끼는 여유로움을 아파트에서 느낄 수 있다면 어떤 것일까?
저자는 아파트에서 메주 담그는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도시에서 메주 담그는 이야기는 어쩌면 무척이나 낯설게 보인다. 그러나 방법이 있다. 조금만 수고를 한다면.
그런데 메주는 어떻게 담그는 것일까? 된장이며 고추장은 동네 구멍가게에 가도 있다. 요즘 같은 웰빙 시대에는 인터넷을 통해 재래식 된장과 고추장을 직거래로도 살 수 있다. 굳이 담글 필요조차 못 느끼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고추장이며 된장은 가게에서 산다. 그런데 공장에서 고추장이며 된장을 어떻게 만드는 것일까? 먹을거리가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된장의 우수성을 인정하면서도, 정작 된장의 재료가 되는 콩은 어느 나라에서 재배된 것인지, 고추장 원료는 외국에서 온 것은 아닌지 따위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는다. 콩만 보더라도 외국산 콩은 유전자변형이 많다. 유전자 변형 콩은 과학적으로 몸에 해롭다고 확정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인간에게 심각한 위협을 가할 것이라는 조심스런 예측을 하고 있다. 사태가 심각하지만 누구도 원재료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단지 상품으로서의 고추장, 된장, 간장만 있으면 될 뿐이다.
바로 이런 것부터 실천해 보자는 것이다. 너무도 당연해서 습관이 된 것들을 하나씩 찾아서 그 의미를 생각하고, 자신의 삶에 적용해보려는 것이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진정한 '용기'일 수 있다는 말이다. 이 책에서는 메주 담그는 방법을 간단하게 소개했다. 그렇지만 그 안에서도 놀라운 사실이 숨어 있다. 생각해 보면 요즘시대 된장, 고추장, 간장 담그는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특히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은 별로 아는 사람이 없을 것이고, 아는 사람조차도 도시에서 메주를 띄우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저자는 재밌는 얘기로 메주 담그는 방법을 소개하고 있다. "된장 만드는 방법에 대하여 아는 것은 없었고 그저 귀동냥이 전부였다. 재래시장에 나가 시장 한 귀퉁이에 초라한 좌판을 펼치고 콩을 파는 할머니들이 가장 귀중한 정보처였다."
전통식이니 재래식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기 위해서는 가장 초라하게 보이는 것에서 답을 찾을 필요가 있다. 지금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대형마트에 가지, 재래시장에 가지 않는다. 설령 재래시장에 가더라도 초라한 좌판을 찾지 않는다. 가급적이면 깨끗하게 진열된 곳을 찾는다. 그러나 진정한 가치는 너무도 소박하고 초라한 곳에 있다.
어쩌면 메주를 띄우는 방법을 알아내는 것 자체가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오히려 습관적으로 살아가지 않고 주변에서 문제를 찾으려는 글쓴이들의 자세를 소중하게 느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게 사람답게 살아가는 모습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노동하는 인간
습관이 아니라 문제를 찾으려고 사람이라면 당장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집부터 살펴보자. 우리 집은 어떤 모습인가? 안락하고 편안한가? 불편한 곳이 있다면 고쳐보자. 전문가를 불러 돈 주고 고치는 것이 아니라 직접 고쳐보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먼저 고쳐야 할 부분을 목록으로 만들어보자. 그런 다음 최대한 정보를 구해야 한다. 정보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은 인터넷, 그리고 저자의 말 대로 "재료를 파는 아저씨에게 귀찮을 정도로 이것저것 꼬치꼬치 묻는" 방법이 있다.
노동은 분명 인간이 인간답게 삶을 살아가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그렇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은 귀찮은 것, 번거로운 것, 수고로운 것에 불과하다. 그나마 노동이 돈을 만들어준다는 의미를 담고 있지만 나와 가족을 위한 희생과 봉사의 의미를 담고 있는 노동은 더 이상 사회적 노동이 아니다. 그저 귀찮은 것에 불과할 뿐이다. 그렇지만 가족을 위한 노동은 의미를 부여해준다. 양식을 만들어 준다.
저자는 집수리를 손수 하는 모습을 정감 있게 그려주고 있다. 예를 들어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기 위해서 거실에 책장을 꾸미는 것은 어떨까? 책이란 정보를 공유할 수 있게 해준다. 대다수의 가정에서 거실의 중심에는 TV에 놓여있다. 그리고 TV를 편하게 볼 수 있는 소파가 있다. 이런 것을 치우고 가족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보는 것이다.
유희하는 인간
가족과 대화 방법에는 같이 놀 수 있는 문화를 만드는 것도 중요할 것이다. '베토벤 바이러스'라는 드라마 때문에 악기를 배우는 사람들이 늘었다고 한다. 좋은 현상인 것은 분명하다. 즐거움을 느끼고, 그것을 찾아갈 수 있는 것도 사람 사는 맛을 느끼게 해준다. 네덜란드의 역사학자 중 호이징가라는 사람이 있다. 호이징가는 인간을 호모 루덴스(Homo Ludens)로 정의하고 있다. 이 말은 유희하는 인간쯤으로 번역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놀이는 문화보다 오래되었다고 한다. 놀이야 말로 인간의 자발적 행위의 산물이다. 그리고 이는 인류의 역사와 더불어 언제나 함께해 왔으며 다양한 방식으로 발전했다. 그는 놀이를 단순히 수단이 아닌 목적이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유희 자체는 어떤 수단이 아닌 목적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본원적인 특성으로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놀이는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 됐다. 오로지 경쟁행위만이 의미가 있다는 사람들의 강박이 본질을 왜곡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예를 들어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면 어김없이 대회에 참석시키려고 한다. 그리고 바이엘이니 체르니니 하면서 얼마나 기술이 되는지를 따지지 얼마나 즐기고 있는지는 따지지 않는다.
음악은 분명 유희의 대상이다. 저자는 이런 방법을 생각했다. "아이들의 나이에 맞고 분위기에도 맞는 노래를 선정하여 팝이나 가요 중심으로 피아노를 가르쳤다. 그러면서 피아노의 활용도가 몰라보게 높아졌다." 그리고 "학교 종이 땡땡땡부터 재미삼아 해보는 것은 어떨까"라고 저자는 제안하고 있다.
이런 놀이 방법들을 생각할 수 있다면 아이들과 노는 다양한 방법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유희는 하나의 가족 문화를 담게 되고, 하나의 소망을 담을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이렇게도 말한다. "부모가 자식의 성공을 바라지 않겠는가? 우리도 여느 부모와 마찬가지로 아이들이 좋은 미래를 가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 아이들이 따라줄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래도 열심히 오늘도 아이들과 함께 재미나게 논다."
주변과 어울리는 삶, 생태적 가치
가족과 함께 어울리는 것을 고민했다면 이제 주변과 조화를 이루면서 살아가는 방법도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상투적으로 도덕성을 운운하려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도덕적인 사람이 좋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렇지만 어떻게 주변과 어울리면서 살아갈 것인지는 사람마다 다르고, 상황마다 다를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이상적인 가치로 생태적 가치를 말한다. 사람 뿐 아니라 자연과 조화를 이루면서 살아가는 것은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이상적으로 생각해야 할 덕목임에 틀림없다.
저자는 생태적 삶에 대해 얘기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아는 한 사람은 오로지 자연식품만 먹고 인공적인 것은 절대로 먹지 않는다. 그 사람은 여럿이 함께 밥 먹으러 식당에 가서도 자기 먹을 것에는 조미료를 절대 넣지 말라고 강요하다시피 주방장에게 부탁한다. 주인은 단골 단체손님 놓칠까봐 할 수 없이 그 사람 것만 따로 내어놓곤 하지만, 그럴 때는 다른 사람들은 다 화학조미료 먹고 죽으라는 말인가 하는 기분이 들어 개운치가 않다. 나 같으면 화학조미료, 농약덩어리 음식이라도 같이 먹고 같이 죽겠다. (…) 어처구니없는 세상이지만 모두 힘을 합쳐 사회적 어처구니를 새로 만들 생각을 해야지, 자기 혼자만 맷돌 옆으로 삐어져 나온 콩국물을 먹고 사는 것을 생태주의라고 폼 나게 말하는 것은, 그것이야말로 진짜 어처구니없는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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