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대학교수가 되는 것은 사회적 명성이나 금전적 보상 그 어느 면에서도 매력적이지 않다. 한국에서처럼 대학교수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서 언론이나 방송의 단골 출연자가 되기도 어렵고, 각종 위원회나 이사회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도 쉽지 않으며, 정치판이나 관계에서 기회를 잡아 화려하게 진출하는 것도 쉽게 꿈꿀 수 없다. 기독교 국가라 결혼식은 성직자들의 주례에 의해 치르는 것이 일반적이라 그 흔한 주례를 설 일도 전혀 없다. 그럼에도 돈 안 되고 사회적 지위도 없고 권력도 없는 대학교수가 되려는 사람들은 미국 사회에도 넘쳐흐른다.
미국 교수사회에는 "논문을 써내지 못하면 망한다"는 말이 불문율처럼 자리 잡고 있다. 제대로 된 논문을 발표하고 제대로 평가를 받아야만 교수직도 유지되고 봉급도 제대로 받을 수 있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대로 된 논문을 발표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오죽하면 미국 교수들을 일컬어 "뒤통수만 보이는 인간"이라 칭하겠는가. 책상머리에 앉아 연구에 전념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된 논문을 만들어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엄격한 심사 제도를 자랑하는 전국적으로 평판 있는 학술지에 글을 싣는 다는 것은 그야말로 뼈를 깎는 고통을 수반한다. 세계적인 학문의 중심지인 미국에서 남의 나라 논문을 적당히 짜깁기하거나, 철지난 주제를 되풀이 하거나, 이미 학술지에서 널리 알려진 논문들을 적당히 베끼거나, 남이 대필한 논문에 자기의 이름을 적당히 얹거나, 이미 나온 자신의 옛 논문을 적당히 변조하여 재탕 삼탕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지켜보는 눈이 하도 많아서 그 같은 파렴치한 행위는 조만간 밝혀지고 말기 때문이고 그 결과는 어렵게 진입한 교수 사회로부터의 완전한 퇴출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의 범람과 더불어 유행어가 된 '경쟁력'을 제고한다는 명분으로 한국대학에서도 교수업적평가가 어느덧 자리 잡긴 했지만, 남의 나라 논문을 짜깁기하는 것부터 자신의 옛 논문을 재탕 삼탕 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파렴치한 논문이 지금도 여전히 쉴 새 없이 여기저기서 만들어지고 있다. 한국학술진흥재단이라는 국가 공인기관이 인증하는 학술지가 우후죽순처럼 증대하면서 외견상 교수업적평가가 자리 잡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창피하기 짝이 없는 일이 여전히 버젓이 저질러지고 있는 것이 한국의 대학사회이다.
그러다 보니 한국의 대학교수는 "뒤통수만 보이는" 인간들일 필요가 없다. 오히려 대학바깥의 여기저기에 얼굴을 부지런히 내미는 사람들일 수록 대중성을 획득하고, 이것이 관계로 정계로, 또는 각종 위원회나 이사회로 진출해 남다르게 풍족한 생활을 누릴 수 있는 관건이 되고 있다. 논문은 적당히 요령껏 발표하면 되니 논문을 써내지 못해 망할 일 도 없다.
▲ 한국에는 연구하지 않는 교수, 낯내기에만 바쁜 교수가 부지기수다. 이들은 비정규 교수로부터 정당한 인정을 받지 못하는데, 결국 이것이 비정규 교수 문제의 근원 가운데 하나다. ⓒ이광수 |
평가 제도가 엄격한 미국의 대학사회에서 교수의 직분을 수행하는 것은 이처럼 힘들다. 그리고 학자의 길을 삶의 목표로 삼고자하는 사람들이 흘러넘치니 교수직을 얻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보면 미국에서 교수가 되는 것은 한국에 비해본다면 엄청 쉽다. 여전히 실력보다는 연줄이나 정실, 그리고 금력에 의해 교수가 되는 관행이 없어지지 않고 있는 한국의 대학 사회에서 교수가 된다는 것은 기왕에 대학에 자리 잡고 있는 사람들의 자의적 판단에 의존해야 하는 만큼 매우 불확실성이 높다.
미국에서는 누구라도 제대로 된 실력을 갖추고 있기만 한다면 인종이나 심지어 국적에 불문하고 교수가 될 수 있다. 교수 채용을 위한 심사에서 고려대상이 되는 것은 오로지 실력을 바탕으로 한 경쟁력이다. 실력만 있다면 조교수로부터 시작하는 승진계단을 바로 뛰어 넘어 정교수로 발탁될 수도 있고, 아이비리그 출신이 아니더라도 학위 논문만 우수하면 명문대학의 교수가 될 수 있으며, 심지어 학위 논문을 집필 중이더라도 논문의 가치가 우수하다고 인정될 경우엔 이미 학위를 취득한 지원자를 제치고 교수로 채용될 수도 있다.
실력이라는 철저한 경쟁력이 지배하는 곳이 바로 미국의 대학 교수 사회이다. 미국교수들의 봉급 역시 개인의 경쟁력에 따라 매겨진다. 우리처럼 직급별로 일률적으로 봉급이 주어지지 않는다. 나이만 들면 자동적으로 차 상위 직급으로 승급하고 봉급도 그만큼 높아지는 시스템이 아니다. 해마다 높아지는 봉급액도 사람마다 다르다. 직급이나 호봉이 아니라 전년도에 이룬 각자의 학문적 성과(학자로서, 선생으로서, 그리고 사회에 대한 봉사자로서)에 따라 어떤 사람은 1000달러의 인상에 그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미화 1만 달러의 인상을 받기도 한다. 이러니 뒤통수만 보인 채 논문을 써내지 않을 수 없다. 대학바깥에서 여기 저기 얼굴을 내며 나돌아 다닐 여유가 없다.
미국대학이라고 비정규직 교수문제가 없을 수 없다. 한국의 경우보다 심각하진 않지만 비정규직교수가 차지하는 비율이 33.1%(1987), 41.6%(1992), 42.6%(1998), 45.8%(2003)로 계속 증대되어 오고 있다. 이 때문에 대학교육의 질이 손상을 받을 우려가 있다는 지적이 심각하게 제기되고 있다. 직업 안정성을 위협받으며 박봉에 시달리는 비정규직 시간강사들이 정규직 교수처럼 연구와 강의를 제대로 해내기가 어렵다는 사정에서 이다.
미국대학에서 비정규직 교수의 비중이 근년에 들어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역시 비용의 문제이다. 신자유주의의 팽배는 경제적 효율성의 논리가 대학운영에 까지 영향을 미치게 하였고, 이는 비정규직에 의존하여 대학 강의를 채워나가는 경향을 강화시켰다. 특히 대학 저학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개론과목들의 경우 비정규직 시간강사들에 대한 의존도가 심각하게 높다. 개론강의의 절반 이상이 시간강사들에 의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영어, 외국어, 언어학 등의 경우에는 근 70% 가까이 시간강사들에 의존하고 있다.
이 같은 비용 절감 경향은 비단 비정규직의 비율을 증대시켰을 뿐만 아니라, 정규직 교수들의 경우에 있어서도 비정년직의 비중을 갈수록 늘리고 있다. 교수라는 직업의 총체적 위축현상이라고까지 일부에서 지적하는 최근의 경향 속에서 가장 어려움을 겪는 층은 단연 비정규직 시간강사들이다. 정규직에 비해 절반도 되지 않는 봉급수준에다 건강보험이나 생명보험, 그리고 퇴직금과 같은 혜택뿐만 아니라, 이메일이나 전화 그리고 연구실 등과 같은 편의시설 이용권까지 제한되어 있는 경우가 태반이기 때문이다.
수천 개의 대학 -2006년 현재로 2년제 대학이 1694개교, 4년제 대학이 2582개교- 에 120여 만 명의 교수가 있으니 경쟁력 있는 사람들만이 차지할 수 있는 정규직 정년제교수직에는 제한이 따를 수밖에 없다. 비정년제 정규직의 비율이 늘어난다는 것과 별도로, 비정규직의 비율이 갈수록 증대된다는 것은 대학교육의 질을 떨어트릴 수 있는 위험요소가 된다는 것이 관심 있는 인사들에 의해 계속 지적되어왔다. 정규직 교수들에 비해 보수의 열악함은 물론이고, 연구시설의 부족, 학생지도에 대한 지원의 부족 등으로 인해 비정규직 교수들은 제대로 된 연구와 강의를 하기가 어렵다. 미국의 비정규직교수들이 처우개선을 위해 조직적으로 노력하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미국에는 전국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각 주나 각 지역단위, 그리고 각 대학단위로 결성된 비정규직교수조합들이 무수히 존재한다. 이들은 조직적인 힘을 통하여 공립학교의 경우에는 예산을 배정하는 주 의회나 대학당국을 상대로, 사립학교들의 경우에는 대학당국과 보다 나은 처우조건을 확보하기 위하여 교섭을 벌이고 있다. 각 주나 대학의 사정에 따라 교섭의 조건이 다소 차이가 있을 수는 있겠지만 대체적으로 통일 된 목표는 전임교수들과 대등한 대우를 해 달라는 것이다. 즉 같은 자격을 갖춘 비정규직 교수들이라면 동일한 학사업무에 대해 정규직교수와 동일한 보수와 부수적 혜택을 지급해달라는 것이다.
수업 시간뿐만 아니라 교재연구와 학생지도에 투입된 시간에 대해서도 보수가 지급되어야할 뿐만 아니라, 연구시설과 공간제공, 의료보험, 연휴, 그리고 심지어 본인 및 가족들의 학자금지원 등 정규직교수들이 받고 있는 혜택을 "동일 노동, 동일 대우"의 원칙에 따라 비정규직에게도 지급해달라는 것이다. 이 같은 "동일 노동, 동일 대우"의 원칙은 비정규교수조합의 조직적 활동에 따라 미국 전역에서 지역적 편차는 있을지언정 각 주 의회나 학교 당국으로부터 점차 호응을 얻어가고 있다.
미국의 비정규직 교수들은 정규직 교수, 여타의 노동조합, 지역 및 전국의 교원조합 등의 상호협조를 받아 주 의회의 의원이나 주지사 그리고 학교당국에 대해 지속적이고 광범위하게 편지보내기, 전화걸기, 로비행위, 그리고 집단시위 등의 적극적 의사표시를 하면서 그들의 권익향상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 결과 전국적으로 그들의 처지가 점차 개선되어 나가고 있다. 2001년 현재의 시점에서 몇 가지 사례를 보면, 워싱턴주의 경우엔 지난 2년간 15~20%의 봉급인상이 이루어져 정규직 봉급의 50~55%까지 도달하였고, 은퇴 후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기준이 정규직 강의량의 80%이상에서 50%이상이면 되도록 되었고, 정규직과 동일한 조건의 병가를 받을 수 있도록 되었다. 캘리포니아주의 경우에는 정규직 강의량의 40% 이상만 되어도 건강 보험 혜택을 볼 수 있게 되었으며, 정규직 강의량의 20% 이상만 되어도 유급 학생 면담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한국의 경우에는 60%가 넘는 비정규직교수가 있고 미국에서도 40%가 넘는 비정규직교수가 있으니 정도의 차이일 뿐이라고 한다면, 한국과 미국의 비정규직교수가 처한 상황의 근본적 차이를 간과하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정규직 채용절차와 정규직 교수들에 대한 신뢰가 존재하고 있으며, 비정규직의 권익향상을 위한 조직적 노력이 정치적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의 대학은 여전히 세계적인 경쟁력을 자랑하고 있다. 세계 각지로부터 유학생이 몰리고 있고, 세계적 학문의 중심지가 되고 있다. 이는 우수한 교수진의 확보와 무관하지 않다. 한국의 대학은 우수한 교수진의 확보보다는 기존 교수의 기득권 챙기기와 대학 당국의 인건비 절감 원칙 추구에 몰두하고 있다.
고질적 문제가 된 비정규직교수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기 보다는 아예 이를 외면하거나 덮어두려는 것이 정부, 대학당국, 그리고 정규직 교수들의 자세이다. 이런 분위기 아래에서 비정규직 교수들이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직화를 시도하는 것은 생존권에 대한 위협을 초래할 수도 있다. 특히 사립대학의 경우 조합을 결성하는 것은 시간 강사 자리를 내놓는 것을 의미할 수가 있다.
지난 80년대 대학의 규모가 전국적으로 확대되는 과정에서 교수채용이 급작스레 크게 늘어났다. 대부분의 지방대학의 경우에는 석사학위만으로도 정규직교수가 될 수 있었다. 90년대 이후 국내외에서 생산된 박사급 전문인력의 교수직 진출은 이들 기성교수들의 자의적 평가에 따라 좌우되고 있다. 미국식의 공정한 평가제도가 아직도 미흡한 상황에서 형편없는 대우(시간강사들의 연평균소득은 400여만 원을 조금 상회한다)를 참고 견디는 비정규직 시간강사들의 "혹시나 이 대학에서 교수로 발탁될 수 있지 않을까"하는 희망이 이들 기득권자들에게 볼모잡힌 경우가 허다하다.
미국의 경우 주 의회나 주지사가 비정규직교원조합과의 대화를 통해 처우개선을 위한 입법활동에 적극적인데 비해서 한국의 국회의원은 비정규직문제가 초래하는 한국대학의 병폐에 대해 대부분 무관심하거나 무지하다.
▲ 한국의 국회의원들은 그 대부분이 비정규 교수 문제가 초래하는 한국 대학의 병폐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무지하다. ⓒ김영곤 |
과거 어느 때보다 능력 있는 박사급 전문인력이 대학의 바깥에서 비정규직 시간강사로 맴도는 동안 이들보다 오히려 전문성이 떨어지는 다수의 인사들이 대학교수직을 움켜쥐고 있으면서 대외적인 낯내기에 바쁜 한국대학의 서글픈 자화상, 이런 과정에 깊이 절망한 능력 있는 시간강사들이 그 절망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이 기막힌 현실, 이런 현실에 너무나도 무감각한 이 땅의 정치인들과 대학당국. 이런 곳에서 반듯한 나라 세우기가 과연 가능할 것인가.
* 이 연재는 한국비정규교수노조 교원법적지위쟁취특별위원회의 기획으로 진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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