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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이런 모욕을 언제까지 참아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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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이런 모욕을 언제까지 참아야 하나"

[철학자의 서재] 임석재의 <건축, 우리의 자화상>

<프레시안>은 창간 7주년을 맞아 특별한 연재를 선보인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와 공동으로 진행하는 이 연재는 바로 '철학자의 서재'이다.

매주 주말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철학자들이 심사숙고해 선정한 책을, 철학자가 직접 심혈을 기울여 쓴 서평으로 소개한다. 이 연재를 통해 독자들의 책 고르는 안목이 더욱 깊고 넓어지리라 기대한다. <편집자>

미쳐가는 세상, 그리고 우리의 자화상

2009년 기축년(己丑年)의 해가 밝았다. 밝은 소식보다는 우울한 소식이 더 많이 들려온다. 나라가 미쳐간다고들 난리도 아닌 것 같다. 가수는 가수대로 이 같은 시대 상황을 담아 "미쳤어"를 외치고, 사람들은 또 그걸 모두 따라 부른다. 그러나 정작 우리는 무엇에 미쳐 있는 것일까?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었기에 십여 년의 시간이 순식간에 거꾸로 흐를 수 있는 것일까?

이것을 알기 위해 거울 앞에 서보는 것도 좋으리라. 그러나 거울에 비친 모습만 본다고 해서 그 뒤로 숨겨진 얼굴까지 제대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겉으로 드러난 얼굴의 이면을 정확히 보지 못한다면 왜 세상이 미쳐 가는지도 알 수 없을 테니까. 임석재 교수의 <건축, 우리의 자화상>(인물과사상사 펴냄)은 우리가 주목하지 못한 우리의 자화상을 쓰라릴 정도로 통렬하게 파헤치고 있다.

바쁘게 살다 지나치기만 했던 우리의 건축에 그토록 불행한 우리의 얼굴이 스미어 있다는 사실에 나는 책을 읽는 내내 저자에 공감하며 함께 분노하기를 여러 번 했다. 건축을 통해 드러난 우리의 모습을 저자는 이렇게 진단한다. "사람들은 모두 돈에 미쳐 날뛰고 있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에 책을 덮고 난 뒤 오히려 깊은 슬픔이 느껴진다. 하지만 분노도 슬픔도 어떻게 다듬느냐에 따라 추해질 수도 아름다워질 수도 있다.

건축 문외한의 낯선 체험

▲ <건축, 우리의 자화상>(임석재 지음, 인물과사상사 펴냄). ⓒ프레시안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난 우리의 전통 건축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우리의 건축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알게 된 것은 역설적으로 남의 것을 보고 감탄한 뒤의 일이다. 2001년 여름, 고대 그리스·로마 원전을 연구하고 번역하는 모임인 정암학당(鼎巖學堂)의 일원으로 나는 2주 동안 그리스를 방문했다.

18명의 학자들이 차 3대를 임대해서 지도를 보며 그리스 각지를 물어물어 헤매 다녔으니 실은 방문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무색한 점이 있다. 그러나 그때의 체험 덕에 건축을 보는 내 관점은 한꺼번에 바뀌었다. 몇 천 년 전의 그리스 건축을 보면서 건축 속에 깃든 당대 그리스 사람들의 삶과 사상을 조금씩 이해할 수 있었는데, 무엇보다도 내게 큰 격동을 가져다 준 곳은 에피다우로스였다. 사실 그리스에서는 가는 곳마다 오케스트라를 쉽게 볼 수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곳은 에피다우로스의 오케스트라였다.

알다시피 그리스 오케스트라는 비극과 희극이 상연되던 극장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 공간을 통해 당대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 모여 어떻게 삶의 노래를 즐겼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원래 고대 그리스 연극에는 운율이 있다.) 그런데 고대 그리스인들이 얼마나 놀랍도록 기능적인 측면을 충족시켰는가는 직접 가보지 않은 사람은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극장에는 아무런 음향 장치도 없지만 극장 밑의 작은 소리까지도 꼭대기의 관람석에서 낭랑하게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함께 했던 일행 중 한 분은 오케스트라 중앙에 서서 우리의 가곡 한 곡조를 멋들어지게 뽑았고 나는 나대로 극장 꼭대기에서 생생하게 들려오는 노랫소리에 감탄하다가 주변을 돌아다보게 되었다. 그리고 또 다른 경이감에 휩싸였다. 극장 뒤의 나무들은 너무 크지도 너무 작지도 않게 극장과 어울려 적도(適度)를 실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극장의 아름다움은 자연과 동화되어 있었으며, 오히려 자연 없이는 성립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고대 그리스 건축이 자연과 어울림을 보여주는 공간은 이곳만이 아니다. 아테네에서 남동쪽으로 한두 시간 남짓을 가다 바닷가 끝에서 맞이하게 되는 곳에 수니온 곶(串)이 있다. 그 곳에 신전이 하나 있으니, 영국의 시인 바이런이 낙서를 했다는 포세이돈 신전이다. 포세이돈 신전은 에게 해의 바닷바람을 맞이하며 높은 바위 위에 그렇게 선 채 묵묵히 있었다.

내가 그 곳의 풍광에 얼마나 도취되었으면 에게 해 바다에 빠져도 여한이 없다는 생각까지 떠오를 정도였다. (과장이 아니다!) 철학자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어다 쓰면 신전은 "광란하는 바다의 파도에 저항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안식과 대비되는 파도의 광란을 드러내" 주고 있었다. 신전은 거기 있음으로써 대지와 바다의 자연(physis)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의 작은 깨달음을 통해 나는 고대 그리스인이 건축을 할 때 인간만 고려한 것이 아니라 자연도 함께 고려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결국 고대 그리스 건축은 신과 인간, 그리고 자연이 만나는 장소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 건축에서 자연은 건축적 질서의 일부이다.

베끼고 또 베낀 서양 고전주의

그리스에 다녀오기 전에는 별로 의식하지 못했는데, 한국에 돌아와 보니 고대 그리스 신전을 본 뜬 건물이 정말 많았다. 백화점과 고급 오피스텔, 그리고 예식장에서 호프집, 러브호텔에 이르기까지 우리 주변에는 원래 우리 것이 아닌 서양 고전주의 건축이 넘쳐나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런 형태의 어떤 건축물에서도 그리스에서 느꼈던 경이로운 체험을 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저자의 말마따나 왜 모텔이 그리스 신전의 모습을 하고 있어야 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상황은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백화점의 명품관이나 대학교의 건물까지도 모두들 고대 그리스의 기둥 양식을 본뜨는 경우가 많다. 저자는 이런 양상을 서양 전통의 권위를 빌리고 싶어 하는 절박함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 그런데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런 경향의 배면에 일제와 미국의 영향이 자리하고 있다는 저자의 지적이다.

서양 것을 베끼고 그리고 다시 그것을 베끼는 세상. 나는 학문의 영역에만 중역(重譯)의 문제가 있는 줄만 알았다가 건축에도 이중삼중으로 베끼는 현상이 만연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베끼는 자가 권위가 있을 턱이 없다. 그러니 언제나 남의 것을 권위로 빌려오기 급급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우리의 건축은 우리의 영혼이 얼마나 궁핍한가를 흉한 모습으로 말하고 있었다. 우리가 듣지 못했을 뿐이다.

갈수록 높게 그러나 창도 없는 집

영혼의 궁핍은 물질적 가치를 지향하게 만들기 마련이다. 저자가 알려주는 바에 의하면 1998년 아파트의 평당 분양가는 200~300만 원이었다. 그런데 10년이 지난 이제는 2000만 원이 넘는 곳이 하나둘이 아니다. (서울 강남의 집값이 대폭 하락한 건 극히 최근의 일이다.) 어떻게 집값이 10년 사이에 10배나 뛸 수가 있는가?

저자를 통해 듣게 된 이야기는 우리를 경악케 한다. 1998년 경 건설 회사들은 이미 집값이 이렇게 뛸 것을 가정하고 새 아파트 모델을 개발했으며, 그 결과가 온갖 화려함으로 치장한 초고층 아파트라는 것이다. 이는 "투기와 투자가 구별이 안 되는 사회"였기 때문에 가능했으리라.

집을, 사람이 사는 공간으로 생각하기보다 재산 증식으로 생각하는 사회. 본말이 전도된 사회. 그러다 보니 별의별 우스꽝스런 일까지 벌어진다. 오피스텔처럼 오피스 기능을 하는 공간을 넣지 않으면 현재의 초고층 아파트는 주택법에 저촉이 된다. 그래서 건설 회사들은 초고층 변종 아파트를 세우기 위해 오피스 기능을 넣은 주상복합 건물로 짓고, 외관은 오피스 빌딩을 흉내 내었다.

오피스 빌딩이 으레 그렇듯이 전면을 유리로 짓다 보니 창을 열 수 없는 아파트가 생기게 되었다. 저자가 지적한 대로 사람 사는 집에 창이 안 열리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무슨 '캐슬'이니 무슨 '팰리스'니 하는 감옥 같은 집을 사지 못해 난리법석이다. 이런 부동산 광풍이 미친 것이 아니면 뭐겠는가! 저자는 모든 의식주를 자체 해결하는 주상복합 아파트의 폐쇄적인 자폐 공간을 두고 이렇게 일갈한다. "어항 속에서 산소가 부족해 물 위로 입을 내놓고 껌뻑이는 금붕어."

우리를 모욕하는 건축

인간이 없는 건축은 우리 주변에 하나둘이 아니다. 아니 근·현대 한국 건축의 본질은 인간성의 실종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자는 이를 휴먼 스케일의 결핍으로 이야기한다.) 고시촌의 고시원은 최소 공간의 측면에서, 쇼핑몰이나 고속철도 역사는 최대 공간의 측면에서 인간 없는 공간이 얼마나 사람을 모욕할 수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가끔씩 터지는 고시원 화재는 최소 공간에서 인간의 목숨이 얼마나 하찮게 취급되는가를 잘 보여준다. 또한 고속철도 역사에 가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천장은 왜 그렇게 높은지 승객은 굴욕감마저 느낄 정도이다. 사람이 살며 이용하는 건축물을 세우면서 사람을 고려하지 않는 몰지각. 여기서 이 모든 일이 비롯된 것이 아니겠는가.

가는 곳마다 인도를 점유하고 있는 가판대. 그 때문에 길을 지나기조차 힘들다. 그리고 도심 양편으로 군림하고 있는 고층빌딩. 행인은 그 사이로 움츠린 채 종종거리며 걸어갈 수밖에 없다. 또한 길거리의 무시무시한 간판과 네온사인은 어떤가. 그것들은 날름거리는 혀로 행인을 위협하고 있다. 주변의 건축물과 건축 공간 중에 사람을 모욕하지 않는 것이 없을 정도이다. 어쩌다 사태가 이 지경이 된 것일까.

읽어버린 능선과 기슭, 그리고 잃어버린 역사

저자의 책에는 더 심오한 통찰이 '숨겨져' 있는 것 같다. 저자는 한국의 현대 건축이 도시나 시골이나 할 것 없이 능선을 파괴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능선이 가로막힌 곳은 공기가 가두어져 열 환경이 악화될 수밖에 없다. 저자를 모방해서 표현하자면, 능선이 파괴된 도시는 사람을 금붕어처럼 가두어놓고 만다. 그러니까 늘 답답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저자의 통찰을 '건축은 인간과 자연을 소통하게 할 때 온전해질 수 있다'는 통찰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나라의 지형은 산도 강도 주름이 많기로 유명하다. 산의 능선을 좇아가다 보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계곡과 강기슭을 만나게 된다. 강물은 늘 산자락을 휘감아 돌기 마련이니까. 그리고 그렇게 자연의 주름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앞만 보며 달릴 수가 없게 된다. 주름을 통해 굽어진 계곡도 뒤돌아보게 되며, 또 어느 새인가 쏜살같이 지나가는 청솔모도 마주치게 된다. 그러다가 쉬엄쉬엄 가며 디디는 발걸음마다 흘러나오는 낙엽소리도 즐기게 된다. 그렇게 발걸음을 옮기다 우리는 굽이굽이 흘러가는 물결자락에서 누(樓)와 정자(亭子)도 만나게 된다.

정자는 문학의 산실이기도 했다. 정자는 마을 어귀에 있기도 했지만, 강길 따라 기슭에 있기도 했다. 한국의 정자는 대개 문이 없기 마련이다. 한국의 전통 건축이 대개 그러하듯이 정자는 자연과 소통한다. 자연에 열려 있는 건축이 자연의 형태를 거스를 리 없다. 그런 공간에서 시인은 건축과 동화되는 동시에 자연과 동화된다. 그리고 이것이 가사문학의 경우처럼 우리의 역사가 되었다. 결국 이렇게 말해도 지나친 건 아닐 것이다. '능선과 기슭을 잃게 되면 그와 함께 그 공간에 깃든 삶의 역사마저도 잃게 되리라!'

자연과 역사를 모르는 건축, 이렇게 모욕해도 되는가

건축은 인간이 인간을 위해 세운 것이지만, 건축의 개념은 '인간'만을 가지고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건축의 공간은 '근원적으로는' 자연의 공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공간을 어떻게 구성하느냐는 바로 삶의 공간을 구성하는 문제로 귀착된다. 또한 이 같은 만듦이 통시적으로는 역사를 구성하게도 되는 것이다. 결국 건축을 인문학적 관점에서 볼 때 건축 자체는 그것의 배경이 되는 자연과, 건축을 사용할 인간의 소통, 그리고 그런 소통의 역사를 기반으로 성립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건축을 잘못하게 되면 사람살이가 망하게 된다.

그런데도 물길을 살린다는 미명하여 우리 산천의 모든 주름을 파헤치겠다고 난리다. 미친 짓이다. 우리의 물길은 주름을 통해 켜켜이 쌓이며 흘러왔고 그래서 이제는 역사를 안고 흐르고 있는데 말이다. 그런 물길을 뱃길을 만들겠다고 곧게 펼쳐놓았을 때 물길 자체도 흉물스럽겠지만, 우리의 역사도 사장되고 말 것이다. 수천수만의 유적이 흔적도 없이 물속으로 사라져버릴 것이다. 살아남는 유적마저도 제 모습을 잃게 될 것이다.

우리의 전통 건축은 우리의 산천을 닮아 주름과 곡선으로 가득 차 있는데, 그 건축이 곧고 넓은 강줄기를 배경으로 할 때 건축과 자연의 부조화는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아마 앞으로는 외국인뿐만 아니라 우리 한국인도 왜 우리의 전통 건축이 자연과의 조화를 꾀했다고 하는지 더는 알 길이 없게 될 것이다. 20세기 중후반의 한국 건축이 살아가는 우리를 모욕했다면, 21세기의 토목 건축은 우리의 선조까지 모욕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도대체 이런 모욕을 언제까지 참아내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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