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상 정부가 주도한 이번 구조조정 안을 두고 벌써부터 잡음이 무성하다. 퇴출 기준이 지나치게 안이하다는 의견이 나온다. 자의적 해석이 가능한 평가 항목이 많다는 점도 우려스럽다는 지적이다.
정부 구조조정 안의 진짜 목적이 '업계 구조조정'이 아니라 '구조조정 안 하기'라는 비판이 제기되는 이유다. 정작 기업계에 메스를 들이대야 할 정부가 피를 보기 두려워 덜덜 떨고 있다는 말이다.
앞으로 2개월, 폭풍우 몰아친다?
새해 둘째 날, 건설·조선업계 중 상당수가 휴무다. 겹치기 휴일인데다 일감 자체가 그리 많지 않다는 것도 이유다. 하지만 업계를 둘러싼 상황은 그리 조용하지 않다. 폭풍우 전야나 다름없는 분위기다.
은행연합회의 구조조정 지침이 분위기를 대변한다. 금융감독원이 주도하고 은행 등 채권단이 실행하는 이번 방안에 따르면, 앞으로 채권단은 50억 원 이상의 빚을 진 건설·조선업체를 A부터 D까지 4등급으로 나눠 평가에 들어간다.
평가 결과 정상 기업(A등급)과 부실화하지 않은 기업(B등급)에는 신규 지원자금이 투입된다. 부실 징후가 보이는 기업(C등급)은 조기 워크아웃(채권단 공동관리) 대상이 된다. 이미 부실화한 기업(D등급)은 법정관리·청산 등의 절차를 거쳐 퇴출된다. 그간 말로만 무성히 나돌던 '구조조정' 얘기가 새해가 시작되자마자 현실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번 옥석 가리기는 앞으로 2개월 내에 끝날 것이라는 게 금융권의 관측이다. 지난해 4분기 보고서가 나오는 이른 봄에는 이미 '살생부'가 만들어 지리라는 얘기다.
은행연합회가 배포한 신용위험평가표에 따르면 부채비율이 300%를 넘고 현금보유비중이 2% 미만이며 차입금 의존도가 50%를 넘는 건설사는 시장에서 퇴출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조선업체 중에서도 차입금 의존도와 영업이익률이 낮고 매출채권 회전기간이 긴 회사의 경우 앞날을 보장받을 수 없다.
단순히 금감원이 지침만 내놓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다. 사실상 정부가 구조조정을 지휘한다. 채권단 간 이견을 조율할 권한을 가진 채권금융기관조정위원회의 위원장은 정부가 임명하기 때문이다. 만약 정부 바람과 달리 대형 건설사나 조선사 중 퇴출대상 기업이 나온다면 이 기업의 생사 여부를 정부가 임명한 위원장이 결정할 가능성이 높다.
▲김종창 금융감독원장(오른쪽 첫 번째)은 2일, 새해 첫 출근하는 직원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눴다. 올해 할 일이 많은 직원들을 독려하기 위해서라고 금감원은 이유를 밝혔다. ⓒ뉴시스 |
퇴출될 회사가 있기나 할까
일견 무시무시해 보이는 구조조정 안이 나왔음에도 금융권 반응은 영 신통치 않다. 구조조정이 제대로 되지 않으리라는 염려 때문이다.
가장 큰 이유는 퇴출기준이 지나치게 느슨해 실제로 문제가 있음에도 시장에 남을 회사가 많다는 데 있다.
건설회사 신용위험평가표를 보면, 재무항목평가 중 가장 높은 가중치를 적용받는 평가지표는 부채비율이다. 부채비율이 100% 미만이면 A등급이며 300% 이상이면 퇴출기준인 D등급이다.
그런데 주요 건설사 중 300% 이상 부채비율을 기록한 회사는 거의 없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유가증권시장에 상장한 38개 건설사 중 부채비율이 300%를 넘는 회사는 신성건설·풍림산업·남광토건·코오롱건설·한라건설·동부건설 등 6곳에 불과하다(지난해 3분기 기준).
이 중 지난해 도급순위 기준 상위 20위 회사는 코오롱건설(18위)과 풍림산업(19위) 두 곳 뿐이다. 신성건설은 지난해 이미 회생절차를 밟았으며 남광토건은 한국기업평가의 신용등급평가에서 향후 전망이 하향조정되면서 구조조정될 것이라는 소문이 이번 방안과 관계없이 시장에서 나돌았었다.
그나마 이 부채비율도 최근 문제가 된 PF 사업의 우발채무(아직 확정되지 않은 채무)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 전문가들은 우발채무까지 포함한 부채비율은 실제보다 훨씬 높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우발채무까지 감안하면 대차대조표상 부채비율의 두 배를 가볍게 뛰어넘는 건설사가 부지기수다. 과장을 섞어 말한다면 부채비율은 현 상황에서 큰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다른 재무지표 기준 또한 큰 실효성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최근 자금 경색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유동성 지표인 현금보유비중(현금성자산/매출액)의 경우 가중치가 부채비율의 절반인 1에 불과하다. 차입금의존도(차입금/총자산)를 기준으로 보면 상위 50대 건설사 중 D등급 기준에 해당하는 건설사는 단 한 곳에 불과하다.
경영진 평판, 산업 내 지위 등 자의적 해석 가능한 잣대
더 큰 문제는 정량적 해석이 아니라 정성적 평가 지표인 비재무항목평가 점수가 전체의 60%를 차지한다는 점이다. '회사의 업력과 경영진의 평판', '시공능력순위 및 자기자본 규모', '평균분양률' 등이 주요 평가항목에 포함된다.
조선업체의 경우 지배구조, 경영진의 경험과 평판, 산업 내 지위 등의 항목이 주요 평가대상이다. 계량화하기 힘든 부분이며 얼마든지 이해관계에 따라 자의적 해석이 가능한 부분이다.
물론 어느 정도 현실적 한계도 있다. 가장 중요한 지표인 PF 관련 위험의 경우 비재무항목인 우발채무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비재무항목평가에 넣어야 한다. 하지만 이를 감안하더라도 비재무항목평가 점수가 지나치게 높다는 점은 문제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했다.
박상근 현대증권 채권분석팀장은 "정성적 평가가 큰 비중을 차지하면서 융통성이 발휘될 공간이 넓어졌다"며 "경제외적인 요소를 많이 고려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되면 대상기업들은 회계적 선택사항, 곧 융통성을 발휘해 부채비율 등을 낮출 수 있는 여지가 많다"고 말했다. 소위 말하는 대차대조표 '마사지'로 얼마든지 퇴출기준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박태근 한화증권 채권전략팀장은 "부채비율도 세밀하게 나뉘지 않았고 PF 우발채무의 경우 기준이 모호하다"며 "구조조정 대상 기업이 이 기준을 억지로 맞추기 위해 얼마든지 회계적 노력을 할 여지가 있다"고 우려했다.
정부가 바라는 건 '오렌지' 아닌 '레몬'
이처럼 평가 항목이 느슨하게 적용되면 결국 구조조정이 현실화되더라도 뒷말이 무성해질 가능성이 높다. 퇴출된 기업은 억울함을 하소연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신환종 우리투자증권 연구위원은 "일단 정부가 구조조정 방침을 내놨다는 사실 자체는 높게 평가할 수 있다"면서도 "구조조정이 현실화하면 뒷말이 많을 것 같다. 정성적 평가 비중이 커 명쾌하게 '이 기업은 퇴출 요건에 해당한다'고 말할 근거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우려를 표했다.
결국 정부가 발표한 이번 구조조정 안의 진짜 메시지는 '살아 남으라'는 것으로 보인다. 정부가 퇴출대상 기업에 시장에 남을 수 있는 시간을 줘 퇴출을 막으려고만 할 뿐, 시장이 원하는 '과감한 옥석 가리기'는 머뭇거린다는 뜻이다.
신 연구위원은 "지난해 4분기 보고서가 발표될 때까지 퇴출 사정권에 든 기업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재무제표를 '예쁘게' 다듬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정부가 제한한 기간 내에 이 작업만 완료해놓으면 퇴출되지 않고 자금지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건설업계는 물론, 조선업계도 소형 업체를 중심으로 구조조정 여파를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사진은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음). ⓒ뉴시스 |
이는 경제 체력을 갈수록 떨어뜨려 안전기업에도 부실화 압력을 가할 수 있다. 장기적으로 본다면 당장 아픔을 벗어나기 위한 노력이 오히려 국민 경제의 목을 죌 수 있다는 뜻이다.
박태근 팀장은 "큰 기업을 망하지 않게 하기 위한 가이드라인으로 보인다. 기준이 약해 시장이 요구한 '과감한 구조조정'이 일어나기는 어려울 것"이라며 "당장은 충격이 오더라도 과감한 구조조정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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