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이'는 간단한 말이다. 사전적 의미가 100% 구술로 이해되는 쉬운 단어이다.
사전은 갈이의 첫 번째 뜻을 '낡거나 못 쓰게 된 부분을 떼어 내고 새것으로 바꾸어 대는 일'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대개 '갈이'는 그런 의미로 쓰인다. 누구라도 계기가 생기면 '갈이'를 하고 싶어진다.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새살림은 새집에서, 새 술은 새 부대에 담고 싶은 것이 사람이면 누구나 갖는 보통의 마음이다. 하물며, 정권을 잡았으면 오죽할까. 권력은 언제나 뭐든 '갈이' 할 수 있으므로, 그리고 때때로 갈이를 했을 때, 진짜 '우러름'을 받는 자리이기도 하다.
그 전에는 물론 민주정부라고 하는 지난 10년 동안도 '갈이'는 계속 있어 왔다. 한나라당이 주창해 온 '잃어버린 10년'을 까놓고 말하면, 한나라당이 '갈이 당했던 10년'이라고 하면 된다.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 입장에선 이 '갈이'가 참 억울한 일이란다. 남들도 다했던 갈이 했던 것뿐인데, '고소영', '강부자'라고들 하질 않나, 나머지 갈이 할 참에는 거짓된 '선전'과 '선동'에 의한 '사탄'과 같은 촛불이 일어나질 않나. 하여간 눈치 보느라 힘들었다.
그러나 이제 모든 방황과 혼란, 체면 차리기와 점잔빼기는 끝났다. 정권 잡은 지도 벌써 1년, 이제 갈지 않으면 언제 갈으리, 본격적인 '갈이'의 시간이 돌아왔다.
돈 갈리는 풍경
브라운아이즈가 부른 <벌써1년>이란 노래는 이렇게 시작한다. '처음이라 그래 며칠 뒤엔 괜찮아져' 이 노래는 지금, 누구의 심정을 대변하는 것일까? 노래가 발표된 당시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지 1년 된 어떤 이들. 과연, 그럴까? 아니다. 이 노랫말은 이명박 찍은 강남 부자, 법인세·양도세 내는 이들, 종합부동산세 내던 이들의 얼마 전 심경을 위로하던 노랫말 이었다. 12월 19일은 이명박 대통령의 당선이 확정된 날이었다. 벌써 1년이나 되었는데….
이 양면적 시간 앞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촛불을 제압하고, 교과서를 제압하고, 언론을 제압하고 그렇게 거침없이 하이킥을 날렸더랬다. 그리곤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이제 달려가고 있다. 산토끼를 다 잡았으니, 이제는 집토끼를 위로해야 할 시간이다. 예산안은 그렇게 날치기되었다. 형님예산은 한 푼도 덜어지지 않았고, 대운하와 관련된 예산 14조 원도 그대로 살아남았다. 이 정부는 그걸 SOC(사회간접자본)이라고 부르는 모양인데, 삭감된 복지 예산은 그저 기가 막힐 뿐이다.
돈갈이의 풍경이 가장 생생하게 묘사되는 장면은 주경복과 공정택의 경우이다. 주경복은 촛불과 전교조의 지원을 공정택은 정권과 학원의 지원을 받았었다. 누구의 죄질이 더 나쁘고 어떤 이들의 행동이 보다 사회 정의에 반하는 가의 판단은 물론, 각자의 몫이다. 개인적으로는 공정택, 정권, 사설학원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진행 과정은 어떠한가? 사법당국은 기각된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간부의 영장을 청구 할 때는 휘모리의 속도를 내더니, 공정택 수사는 가장 느릿한 진양조로 진행하고 있는 중이다. 돈이 갈리는 리듬감과 박자가 좀 느껴지시는가?
물 갈리는 풍경
물을 잘못 갈아 마시면 배앓이를 하게 된다. 과천이 집단 배앓이 증세를 앓고 있다는 풍문이다. 교과부를 시작으로 총리실, 외교부, 농림수산식품부, 국세청의 1급 고위 공무원들이 일괄 사표를 냈다. 기획재정부, 통일부, 국토해양부가 추가될 것이란 전망이다. 이쯤 되면 나머지 부처들은 버틸 재간이 없어진다. 오늘(12월 22일) <한겨레> 보도에 따르면, 고위공무원 일괄사표는 6공 이후 오래만이라고 한다.
이른바 2년차 국정운영이 필요하다는 설레발이 잠깐 있더니, 공무원 윗대가리들이 이명박 정부의 통치철학과 개혁에 걸림돌로 호명당하고, 그 다음부턴 일사천리 'KTX의 속도'이다. 장관들을 망치를 들었고 바야흐로 전 공직사회의 '공사판' 되어가기가 순조로운 공정을 보이고 있다.
시간을 거슬러 더듬어보자. 이미, 지난 3월 10일 정부부처 첫 업무보고로 기획재정부를 만난 자리에서 공무원 밥그릇이 너무 깨지지 않는다고 질타하셨었다. 공무원을 '머슴'으로 불러야 마땅하다던 대통령이셨다. 누가 뭐래도 당신이 하고 싶은 일 하는 실천력 하나만은 단연 압도적이시지 싶다. 대통령이 '세경' 비싼 순서대로 머슴 자르겠다는 데 누가 뭐랄 수 있겠는가. 다만, 대통령 자신이 신분을 착각하고 있는 것이 안쓰러울 뿐이다. 가장 세경 비싼 국민의 '머슴'은 바로 대통령이란 말이다.
사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공직사회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머슴'들이 아니다. 가장 악랄한 이들은 다름 아니라 이명박 대통령이 임명한 국무위원이란 '마름'들이다. 몇몇의 경우 특히나 '능력', '도덕성', '공정성' 등에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갈이 되는 것이 마땅한 이들이다. 워낙, 물길을 좋아하시는 대통령이시니 그 인식론적 수준에 맞춰 비유를 들어드리자면, 아무리 물을 갈아봐야 그 물이 전달되는 최종적 과정이 수도꼭지가 낙후되어있으면 정수장의 품질 개선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1급만 갈아치우는 공직사회 물갈이가 딱 그 꼴이다. 실제 사용자인 국민의 의견은 듣지도 않고, 이전 정권이 만들었단 이유로 정수장의 물만 검사해대니 상황을 오판하고 문제를 엉뚱하게 만드는 것이다. 지금의 물갈이가 딱 그러하다.
법 갈리기 직전의 풍경
그리고 이제 한나라당은 여의도에서 올해의 마지막 무논갈이를 준비하고 있다. 무려 100개의 법안을 중점법안으로 선정했다. 중점이 100개라면, 그야말로 무차별 난사이다. 현실적으론 거의 모든 것이라고 해도 좋을 100개 법안에 들지 못한 나머지 법안들이 느낄 극도의 소외감을 생각하면 내 가슴까지 시릴 정도이다. 국회는 극한이다. 동시에 100개의 법을 며칠 안에 갈겠다는 한나라당과 그걸 막는 이들을 '깡패'로 모는 모리배적인 입법 인식을 가진 언론들이 판을 키우고 있다. 자아도취, 감흥감응 받은 한나라당은 선택의 시간은 25일까지 뿐이라고 못을 쳤다. 그 마음씨 그리스도의 은혜처럼 자비롭다.
경제입법과 이념입법으로 구분되는 MB의 개혁은 한국 사회의 구조적 전환, 방향적 후진을 목적으로 한다. 노무현의 개혁이 주로 입으로 하던 것이었다면, 노무현 시대의 사상누각을 목도한 MB는 개혁은 자고로 법갈이로 하는 것이란 깨달음에 이른 것이다. 100개의 법안 중 대략 10여개 정도의 핵심적 조준점으로 압축된다. 금융과 산업이 하나 되고, 집회 그 자체가 아니라 복장부터 단속되고, 미디어의 기능이 송두리째 시장으로 넘기는 것들이다. 이 여의도 무논갈이를 막기 위해선 미디어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단순히 법안의 이름과 개수를 전화는 스트레이트 말고, 소화기와 망치가 만들어내는 구태의 풍경을 전하는 사진 말고 이번 법갈이의 실제적 내용들이 얼마나 독소적인 것인지 대안의 문제가 아니라 갈이 그 자체가 타당한 것인지 가려줘야 한다. 정말, 시간이 며칠밖에 남지 않았다.
이번 주의 열쇳말은 '갈이'이다. 글을 시작하며 갈이의 사전적 의미가 '낡거나 못 쓰게 된 부분을 떼어 내고 새것으로 바꾸어 대는 일'이라고 했다. 지금 각종 갈이가 이뤄지고 있다. 대통령과 한나라당은 예산을 완전히 뒤엎고, 사람을 치우고, 법을 송두리째 바꿔야 할 만큼 한국사회가 낡고 못 쓸 무엇이란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큰일이다. 그것은 뉴라이트들이 그토록 저주해마지 않는 자학적 현대사 인식이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현대사 특강>이 시급한 곳은 청와대와 한나라당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조심해야 할 '갈이'가 있다. 사전에 없는 갈이의 뜻 중에 '후리'라는 접두어가 붙어 쓰이는 '후리가리(갈이)'라는 것이 있다. 경찰간부들이 직원들에게 개인당 무조건 몇 건씩 잡아들여 실적을 채우라고 할당량을 주는 일제 단속을 일컫던 속어이다. 딱히 단속할 게 없는 경찰들은 누굴 잡아들일까? 가장 만만한 사람부터다. 이 모든 갈이가 끝나고 더 이상 갈이할 게 없어지면, '후리가리'가 시작될 지도 모를 일이다. 조심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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