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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이 '어~' 하는 새 문앞에 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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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이 '어~' 하는 새 문앞에 와 있다"

[화제의 책] 나오미 울프의 경고 <미국의 종말>

▲ <미국의 종말>(나오미 울프 지음, 김민웅 옮김, 프레시안북 펴냄) ⓒ프레시안
나오미 울프의 <미국의 종말>을 읽고 나니 한나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이 21세기 미디어 시대에 걸 맞는 옷을 입고 다시 태어났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만큼 이 책은 아렌트의 심각한 문제의식을 공유하면서, 그와 동시에 이 시대 젊은이들의 행동주의 감성에 직접 호소하는 어떤 직관적인 매력을 발산하고 있다.

원래 나오미 울프는 미국의 대표적인 페미니즘 사회비평가로 알려져 있다. 이른바 '제3의 페미니즘 물결'을 이끈 대표적 이론가의 한 사람이자 여성운동가인 저자가 민주주의에 대한 본격적인 평론서를 낸 것이다. 이것은 지성사로 보더라도 결코 작지 않은 사건이라 할 수 있다. 페미니즘-반파시즘-민주주의를 잇는 상징적인 연결고리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이 점은 본서의 영문 부제 "Letter of Warning to a Young Patriot(애국청년에게 보내는 경각의 편지)"에서도 잘 드러난다. 울프의 관점은 명확하다. 민주주의와 인권과 자유의 가치는 보편적 가치이고 그것은 좌파든 우파든, 공화당원이든 민주당원이든 존중하고 지켜내어야 할 어떤 공통분모라는 것이다. "이 '자유'는 고전적인 보수주의자들과 진보주의자들이 지지하는 미국적 민주주의의 기반이라고 할 수 있다."(258쪽)

이는 평자가 인권에 대해 가지고 있는 평소의 생각과 정확히 일치한다. 즉, 인권은 어느 사회이든 그것이 제대로 된 민주사회라면, '중첩되는 합의의 영역'으로 존중되고 보호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중첩되는 합의의 민주적 기반'은 진보-보수를 초월한 민주주의의 기본 정신이고, 이것에 반대하는 사람은 보수주의자가 아니라 반민주주의자이고 반인권론자이며 파시스트인 것이다. 참다운 보수주의 정치철학이라면 민주와 인권과 자유를 적어도 존재론적 원리상 반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말을 뒤집어 보면 민주주의가 위협받을 때 진보주의자만이 아니라 (참된 민주적) 보수주의자까지도 싸잡아 탄압받을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 된다. 나치 독일이 그랬고 피노체트의 칠레가 그러했다.

그렇다면 중첩되는 합의의 민주적 기반을 지키기 위한 투쟁에는 진보주의자, 중도주의자, (참된 민주적) 보수주의자들이 모두 나서야 하며,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들은 제대로 된 보수주의자로 불릴 자격조차 없다. 그런 사람은 스스로를 어떻게 부르든 상관없이 반민주주의자, 반인권론자, 유사 파시스트의 정체성을 갖고 있는 집단이라 보면 된다. 나오미 울프는 이런 메시지를 철저한 역사적 고증과 박학한 사상사적 지식을 동원해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울프는 전투적인 페미니스트이자 공화주의적 민주투사로서 이중의 월계관-결코 쉽지 않은-을 쓴 것처럼 보인다.

<미국의 종말>이 주는 메시지는 섬뜩하리만큼 예지적이자 기시감(旣視感)으로 가득 찬 역사적 진술이다. '기시감'이라 한 것은 우리가 20세기 역사를 통틀어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일들이 오늘날 되풀이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울프는 역사의 되울림(echoes)이라고 표현한다.

민주주의의 본산이라는 미국에서 오늘날 파시즘적 예후가 도처에서 늘어나고 있는 현상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울프는 이 질문의 단초를 1930년대 초 독일 사회에서 찾는다. 본격적인 나치 독일의 전사(前史) 쯤에 해당되는 시기이다. 당시 독일에서는 의회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법의 지배라는 도구를 이용해서 참된 법의 지배를 억누르는 조직적인 시도가 행해졌다.

지금의 미국 사회와 비교하면 어떨까? 아주 닮았다. 전략과 전술에서만 그런 게 아니고 나치가 쓰던 이미지, 언술, 언어와 미국의 정치 지도자들이 쓰는 그것들이 확연히 유사하다는 것이다. 나치 독일만 그랬던 게 아니다. 1920년대의 이탈리아, 1930년대의 러시아, 1950년대의 동독, 1960년대의 체코, 1973년대의 칠레, 1980년대 말의 중국이 모두 그러했다. 이 모든 시대를 통틀어 독재 지망생들은 완전한 독재로 가기 위한 단계별 조처를 취했고, 오늘날 미국 사회가 바로 그 '독재로 가는 10단계'를 차근차근 밟고 있다고 한다.

이 10단계의 구체적 내용들이 <미국의 종말>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울프는 "독재체제 없이도 파시즘이 도래할 수 있다"고 단언한다. 민주시민들이 방심하고 있는 사이에, '어~ 어~' 하는 사이에, 어느새 파시즘이 문 앞에 와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민주시민들이 '독재체제 없는 파시즘' 앞에서 왜 경각심이 무뎌지기 쉬울까? '독재체제 없는 파시즘'은 선거 민주주의, 절차 민주주의를 어느 정도 따르는 척 하면서 정상적 민주주의 제도의 외양으로써 파시즘의 본질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체제는 벤자민 바버가 말하듯, 반민주도 아니고 민주도 아닌 탈민주 체제와 흡사하다. 탈민주 체제를 민주체제로 착각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독재체제 없는 파시즘'을 안방에 들여놓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것이 미국만의 문제일까? 울프는 고개를 젓는다. "무솔리니는 레닌을 연구했고, 히틀러는 무솔리니에게 배웠으며, 스탈린은 히틀러를 연구했다. 중국 공산당 지도자들은 스탈린을 통해 배웠고, 이런 식으로 독재체제가 재생산되었"다고 말한다(60쪽). 이런 연결 고리를 통해 미국의 부시 행정부가 주도하는 '독재체제 없는 파시즘'적 미국사회가 도래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우리나라는 현재 어떤 체제를 배우고 흉내 내고 있는가?

▲ 미국의 페미니스트 나오미 울프(Naomi Wolf, 1962~). ⓒoregonstate.edu
나오미 울프의 의미심장한 논지를 한국에 처음으로 소개한 역자의 노고에 대해 한 마디 보태지 않을 수 없다. 미국과 세계체제론의 대표적인 전문가인 역자는 정확하고 유려하게 울프의 저작을 우리말로 옮겼을 뿐만 아니라, 미국 정치의 역사적 뉘앙스와 정치 담론의 역동성(discursive dynamic)을 전달하는 데까지 성공한 듯이 보인다. 미국의 지적 풍토와 정치적 수사에 정통한 사람이 아니고선 도달하기 어려운 경지이다.

본 저작과 함께, 내친 김에 울프의 올해 최신작인 <내게 자유를 달라 : 미국 혁명가들을 위한 핸드북>도 우리말로 옮겨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게 된다. 이 글을 읽으시는 독자들 중 울프의 최근 생각을 더 알고 싶은 분은 다음 홈페이지를 방문하시는 것도 좋을 법하다. (☞바로 가기). 이와 더불어 애니 선드버그와 리키 스턴이 제작한 <미국의 종말> 영화 버전도 한국에 소개되면 좋겠다. 본 번역서와 멋진 짝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의 종말>은 미국 민주주의의 전망과 그것에 대한 현재적 경각심,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함의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진 모든 독자들이 두고두고 곱씹어야 하는 필독서의 자리에 이미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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