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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조'는 '하나회'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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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조'는 '하나회'가 아니다

[완군의 워드프로세서] 일그러진 교육

'정치인' 이문열도 '정치'가 아니라 '문학' 쪽에 가까웠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에 썼던 소설 중에는 괘 괜찮은 우화도 있는데,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도 그 시절의 수작 가운데 하나이다. (물론, 후에 찜찜한 표절 논쟁이 있긴 했다.)

어디서라도 한 번쯤은 들어봤을 테니, 대략의 줄거리를 읊는 일은 생략하겠다. 그 소설은 자유당 정권이 막바지 패악을 일삼던 1959년을 배경으로 교실이라는 무대를 통해 독재정치, 영웅주의, 시민의식, 민주주의 그리고 그 모두의 부조리함까지를 정교하게 직조해낸다. 그리고 그 소설의 시대적 배경으로부터 50년 가까이 흘렀다. 그 교실을 지배하던 '엄석대'는 과연 사라진 것일까? '엄석대' 체제를 붕괴시켰던 정의롭던 그 담임 선생님이 아직 교실에 남아 있냐 이 말이다.

서울시교육청이 7명의 교사를 파면·해임했다. 지난 10월 치러진 일제고사에서 체험 학습을 허락했다는 이유이다. 시교육청이 밝힌 징계사유는 '불법 행위'이다. 표면적으로는 '성실의 의무 위반', '명령 불복종', '자료 제출 불응'이라는 3가지 이유를 들고 있다. 복잡하게 말할 것 없다. 시교육청이 말하는 불법 행위라 함은 교사들이 일제고사와 관련한 가정통신문을 발송한 행위이다.

석연치가 않다. 설명이 분명하지 못하다. 가정통신문 발송 자체가 불법일 리는 없다. 시교육청의 징계가 최소한의 논리적 구성이라도 되려면, 그 가정통신문이 발송된 '형식' 아니면 '내용' 중에 한 가지는 반드시 불법이어야 한다. 시교육청의 설명은 이렇다. 형식에 있어 학교장의 '결재'를 받지 않고 가정통신문을 발행했단다. 내용에 있어서는 일제고사 불참을 '유도'했단다. 결과적으로 '학습권'을 침해했단다.

의문은 당연하다. 시교육청의 징계는 논리적으로 구성조차 안 된다. 먼저, 형식의 문제이다. '결재'를 받지 않고 가정통신문을 발송했다고 해서 교사를 파면·해임시킬 수 있는가? 그건 상식이 아니다. 이번에 해임·파면된 이들은 대개 담임을 맡고 있는 이들인데, 담임에겐 법적 권리인 업무상의 재량권이란 것이 있다. 평소, 교사라는 특수한 직위는 더더욱 그 재량권이 강조되어 왔다. 흔한 말로 '수업 시간은 대통령도 침범하지 못 한다'고 한다. 다소, 형식상의 문제가 있다손 치더라도 가정통신문 발송 그 자체의 '형식'을 이유로 교사를 자를 순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담임들이 결재 없이 가정통신문을 보낸다. 그 모두를 교장이 결재할 수도, 해야할 이유도 없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내용이다. 반드시 불법적 문제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시교육청은 시험 불참을 '유도'했다는 애매한 표현을 쓰고 있다. 그것이 결과적으로 학습권을 침해했다는 말이다. 백번 양보하여, 사회의 다원성 측면에서 그 행위가 과연 전적인 합목적성을 갖는지는 다퉈볼 만도 하다고 생각한다. 어디까지나, 논쟁의 측면에서라면 말이다.

그러나 시교육청의 말처럼 그것이 '불법'이라고 하는 법적 언어로 표현되는 것은 말도 안된다고 생각한다.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법적 언어로 규정하기 위해서는 그 행위의 합목적성에 대한 논쟁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 행위의 불법성을 증명해야 한다. 가정통신문의 내용이 불법이라는 시교육청의 태도와 말은 한 마디로 얼토당토않다.

과연, 무엇이 불법인가? 만약, 시교육청의 논리가 일제고사에 참가하지 않는 것이 불법이라는 것이면, 일제고사를 거부한 모든 학생들이 범법자가 된다. 그런 얘기인가. 거기까지 가겠다는 말인가. 그것이 아니라면, 참가하지 않아도 되는 시험이란 걸 교사가 학생에게 알려주는 것이 불법인가? 문장을 구성해보려고 키보드를 치고 있는 내가 다 한심해지는 문장이다. 시험 참가 여부 자체가 법적 영역의 문제가 아니라면, 가정통신문의 내용이 무엇이건 상관없이 불법 여부를 따져 볼 이유조차 없다.

그렇다면 명백하다. 이번 징계의 성격이 이 대목에서 나온다. 결국,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교사 솎아내기이다. 조·중·동을 앞장세워 정치적으로 압박하고, 임단협을 무기로 경제적으로 탄압하더니 비로소 물리적, 실존적, 생존의 박탈을 시작한 것이다. 가정통신문을 '나는 전교조 교사요'의 메시지로 해석한 것이다. 맞다. 매카시즘이 맞다. 서울시교육청이 그 금기의 봉인을 푼 이상, 마녀사냥의 활극은 이제 시작됐다고 봐야 한다. 공정택 교육감이 바로 매카시이다.

교육의 주요한 목표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정치적 입장, 이념적 대립과는 상관없이 대답은 하나뿐이다. 교육의 목표는 학생들이 자기 삶에 개입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하는 것이다. 학생은 어른들이 만든 온갖 경쟁과 각종 시험에 동원되는 도구가 아니다. 학교는 그 비루한 사회적 모순들을 자기 삶에서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를 가르치는 곳이어야 한다.

교사는 지성인이다. 학교는 그저 객관적인 제도일 수 없다. 교사는 과거와 미래에 대한 전망을 학생들에게 전달하는 자이다. 학교는 어떠한 사회적 형식과 지식이, 도덕과 규율이 정당한 것인가를 구체화하는 장이다. 교사는 군인이, 학교는 연병장이 아니란 말이다. 이 멍청한 바보들아, '전교조'는 청산해야 할 '하나회'가 아니란 말이다.

이번 주 열쇳말은 '교육'이다. 비감하고 무서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 딱, 1950년대의 풍경이다. 공정택 교육감에 이르러 시간은 또 그렇게 몇 십 년을 거스르고 있다. 교육이 아닌 훈육 기관으로 부활하려는 '학교'. 명령과 복종, 폭력과 야만으로 내리 꽂아지는 말죽거리잔혹사의 귀환. 다시 한 번 묻는다. '엄석대'는 과연 사라졌는가? 자처하는 이 누구인가?

꿈꾸지 않으면

양희창 글, 장혜선 작곡

꿈꾸지 않으면 사는 게 아니라고
별헤는 맘으로 없는 길 가려하네
사랑하지 않으면 사는 게 아니라고
설레는 마음으로 낯선 길 가려하네

아름다운 꿈꾸며 사람하는 우리
아무도 가지 않는 길 가는 우리들
누구도 꿈꾸지 못한
우리들의 세상 만들어가네

배운다는 건 꿈을 꾸는것
가르친다는 건 희망을 노래하는 것
배운다는 건 꿈을 꾸는것
가르친다는 건 희망을 노래하는 것

우리 알고 있네 우리 알고있네
배운다는 건 가르친다는 건
희망을 노래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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