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논자들에 의해 지적된 바와 같이, 한국학계의 학문 내적인 고질적 모순 가운데 하나는 한국학계를 상징화할 만한 주체적인 학문이나 학파를 가늠할 수 없다는 점에 있다. 이유는 여러 가지일 것이지만, 오늘의 학계가 처해 있는 대외적 '식민성'이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될 수 있다. 한국의 연구상황을 두루 검토해 보면 '수입학'이 지배적이다. 국내적 사안이나 학문적 의제에 대한 방법론과 시각 모두가 이른바 '유학파'의 시선으로 도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정체불명의 '세계화'라는 구호가 일반화된 이후 한국학계의 대외 종속성은 더욱 심화되어 갔다.
그러면서도 1980년대를 기점으로 국내 대학원 박사과정 정원은 폭발적으로 증대했고, 이에 따라 박사학위 수여자 수도 꾸준히 증가했다. 1980년대 군사정부의 유화정책 중의 하나인 대학정원 자율화와 대학설립 요건의 간소화 정책에 따라,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는 박사학위 취득자들은 물론 석사학위 취득자들조차 비교적 용이하게 대학에 임용될 수 있었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고등교육상의 수용과 공급의 불균형 탓에 한국의 대학들은 전면적인 구조조정의 압력에 노출되었지만, 이러한 사회적 변화와 무관하게 과잉 연구인력을 양산하고 있는 대학원 교육은 별다른 변화 없이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면서도 이른바 '국내박사'에 대한 학계의 이유 없는 차별은 전혀 개선되지 못했다. 대학원 입학정원의 확대에 따라, 동시에 한국사회 전반의 기이하다고밖에 할 수 없는 고학력화 추세에 따라, 국내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는 연구인력은 말 그대로 폭발적으로 증가했지만, 그것이 이들의 대학사회로의 순조로운 '연착륙'을 보장하지는 못했다. 대학과 교육당국이 진심으로 합리적인 교원수급 정책과 '수입학'을 벗어난 주체적인 한국학문(자생학) 정책을 취하고자 했다면, 마치 영화계의 스크린 쿼터 제도와 비슷하게 일정한 수준에서 '국내박사 우대제도'를 취했어야 마땅하다. 동시에 이러한 정책과 함께, 박사과정 정원의 합리적인 축소를 포함한 엄격한 학사관리 제도를 도입함으로써, 과잉 연구인력의 공급을 조절하는 지혜를 발휘했어야 옳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여서 대학원 박사과정의 정원은 꾸준히 증가한 반면, 교원 임용시의 '해외박사' 우대, 거기서 더 나아가 '해외석학초빙사업'을 포함한 대외종속적인 학문정책을 대학과 정부가 오히려 노골화함으로써, 결국 국내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학문후속세대 및 비정규직 교수들의 대학사회로의 '경착륙'을 구조화하는 정책적 오류를 범하였다. 실제로 매학기 <교수신문> 등에 발표되고 있는 대학의 신임교수 공채 현황을 검토해 보면, 국문학을 포함한 한국학 분야와 의·약대를 포함한 일부 학과를 제외하고는 임용되는 신진교수들이 이른바 '미국대학 출신 유학파'가 과반수 이상을 점유하고 있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요컨대 이것은 한국의 국가나 대학당국, 그리고 많은 수의 전임교원들이 암묵적으로 한국의 대학원 교육을 불신하고 있거나, 해외학문에 비해 한국학문이 '비교우위'에 있어 대체로 미달된 상태에 있다고 인식하면서도, 한국의 고등교육 체제의 모순을 무책임하게 방치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하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아예 국내 대학원 박사과정에 진학하고자 하는 학문후속세대에게 '국내대학'은 희망이 없으니, '유학'을 가라고 조언하는 것이 보다 현실적이며, 정부나 대학 당국에서도 교육사업의 일환으로 박사과정을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면, 입학정원을 과감하게 축소하는 것이 오히려 합리적이다.
설사 국내박사가 개인적인 노력으로 학문적으로 뛰어난 업적이나 가능성을 보인다고 해서, 대학사회로의 부드러운 진입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한국의 대학입시가 전쟁인 것에서 볼 수 있듯, 소수 세칭 서울 명문대 중심의 학벌주의 카르텔 구조와 그것을 축소모방한 지역 명문대 중심의 동종수혈 관행은 여전히 강력한 것이어서, 개인적인 연구역량과 무관하게 이러한 학벌공동체에 소속되지 못한 많은 수의 연구자는 특별한 예외를 제외하고는 '중년의 88만원 세대'로 고착될 확률이 실상 다분한 것이다.
▲ '중년의 88만원 세대' ⓒ이광수 |
그래서 한국의 제도학계는 미국의 동부지역 명문대를 중심으로 한 전지구적 학벌구조와 함께, 국내 대학의 중앙 및 지역의 학벌구조가 일종의 소용돌이 현상을 일으키면서, 이러한 구조로부터 배제된 연구자들로 하여금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처해 있는 가혹한 착취구조와 유사하게, 고등교육 부문에서의 비정한 착취 메커니즘에 순응하고 동화하게 만들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차라리 대학사회의 모순을 일찍이 인식하고 기대를 거둔 채 '박사 설렁탕'이나 '박사갈비'와 같은, 거리에서도 간간이 발견하게 되는 직종으로의 전업을 하는 것이 차라리 합리적인 선택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얼마나 심각한 사회적 낭비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비정규직 교수들은 이러한 항상적인 신분불안 상태 속에서, 대학체제 내부로의 편입이 언젠가는 가능할 것이라는 '선망'과 그것이 도로에 그칠지 모른다는 '공포'가 착종된 채로, 오늘도 낡아빠진 검은 가방을 어깨에 짊어진 채, 기약 없는 캠퍼스 유랑을 계속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심각한 구조적 모순에 대해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모두가 이러한 모순을 알고 있지만, 모순의 해결주체가 정작 '그 자신'이라는 것에 대하여 국가나 대학당국, 그리고 전임교수들과 비정규직 교수들 모두, 극히 예외적인 일부를 제외하고는 예리한 고민을 회피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한국 학문의 대외종속성은 더욱 깊어가고 있으며, 부유하는 박사급 연구자들의 누적은 오작동하는 사회를 향한 분노와 압력을 더욱 높여만 가고 있다.
연구와 교육에 투입한 이들의 막대한 '기회비용'은 무심하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형태 없이 휘발되고 있으며, 고등교육에 대한 열정과 자부심은 온 데 간 데 없어지고, 마치 노동시장에서의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노노갈등과 비슷하게 정규직 교수와 비정규직 교수의 은폐된 내적 갈등, 그리고 대학당국과 국가에 대한 신뢰의 상실은 더욱 깊어지고 있다. 이렇게 학력자본의 수준에서는 사회적 꼭지점에 속하면서도, 삶의 양식은 도시하층민과 유사한 지식계급의 불만이 집단적으로 누적되다 보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이 오작동하는 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장구한 한국사와 세계사를 고려해 보건대, 한 사회의 시스템이 근본적으로 재편되는 계기를 이룬 것은 이렇게 지식인 계층 내부에서의 누적된 불만이 일시적으로 폭발한 데 있었음을 우리는 드물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국가에 의해 기획되는 한국의 고등교육과 학문정책은 이들에게 학술진흥재단(학진)에 의한 연구비지원이라는 '안정제'를 단기적으로 투여함으로써, 체제에 대한 지식인들의 분노와 압력을 서서히 제거하는 정책을 써왔다. 결과적으로 김대중 정부를 기점으로 활발하게 가동된 이른바 '학진체제'는 사회적으로 공론화된 학문후속세대 및 비정규직 교수들의 집단적인 불만을 1년에서 3년에 이르는 단기 프로젝트 중심의 연구과제 및 연구비 지원으로 봉합하고자 했던 정책의 일환이었다.
사실상 이 시기를 기점으로 해서 한국의 전임교수들과 비정규직 교수들은 '중소기업경영자'나 '자영업자' 비슷한 처지로 가감 없이 전락했다. 연구책임자인 전임교수들은 대학 내에서의 '논문생산' 및 '연구비수주' 압박에 종속되는 동시에 학문후속세대 및 미취업 비정규직 교수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압력에 노출되었고, 학문후속세대와 비정규직 교수들 역시 생존을 위해 자신의 전공과 관심분야와 무관한 일회성 프로젝트에 골몰하면서, 소모적인 연구계획서를 작성하는 데 온힘을 쏟아 부어, 결과적으로 그 자신의 학문적 역량을 증대시키기 위한 시간을 소모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연구역량과 학문수준이 획기적으로 증대되고, 비정규직 교수를 둘러싼 구조적인 모순이 시원하게 해소되었다면 좋겠지만, 오히려 이러한 사태의 진전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가리지 않고 교수공동체 전체를 학문에서의 '총력전 체제'와 유사한 프로젝트 경쟁에 종속된 '노예상태'로 전락시켰고, 오히려 대학사회에 상존하고 있는 모순에 더하여 연구자율성의 상실이라는 학문공동체의 근본적인 위기를 구조적으로 심화시켰다.
사실 오늘의 고등교육과 학문정책을 기획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주체적인 학문의제의 설정과 실행, 그것을 가능케 할 연구인력의 안정적인 재생산, 포괄적인 연구 인프라의 제도·비제도적 구축에 있다. 학문영역에서의 선진화라는 것은 단지 외국인 교수와 해외박사를 더 많이 채용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중심을 잡지 못하는 한국학문의 자생성과 주체성을 끈질기게 확대하고, 이를 통해 구미의 학문경향과는 차별적인 한국의 학맥과 지적 생산물을 창안하는 데 있다. '수입'이나 '모방'이 아니라.
이런 작업은 물론 단기적인 땜질식 학문정책으로 실행될 수 있는 성질이 아니고, 지식생산의 장기적인 전략과 주체적인 학문의 정립에 필요한 학문철학의 구상, 그리고 연구자의 수요와 공급 상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기 위한 합리적인 교원정책의 수립, 특히 학문후속세대와 비정규직 교수로 하여금 연구에 전념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제도적 장치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러한 희망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학문구조 속에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거의 총체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무책임 구조'의 심화와 전면화다. 비정규직 교수에게는 교육자로서의 '헌신'과 같은 '비시장적 가치'를 구조적으로 강제하면서도, '시장논리'에도 결코 부합하지 않는 노동력의 과잉 착취를 노골적으로 감행하고 있는 것이, 부정하고 싶지만 오늘의 고등교육이 처해 있는 명백한 실상이다.
그러나 가장 우려스러운 것은 고등교육의 절반을 담당하는 비정규직 교수들의 연구와 강의에 대한 '자부심'의 급격한 상실현상이다. 사회적 여론화를 통해서 비정규직 교수들이 처해 있는 한계상황은 선정적으로 전파되고 있으면서도(미디어에 재현된 비정규직 교수들의 처진 뒷모습, 블라인드 처리된 얼굴, 변조된 음성 등을 상기해보라), 이에 대한 현실적인 처방은 전혀 가해지지 않은 채, 명백한 '구조적 모순'을 '개인의 무능'으로 돌리는 오도된 상징폭력에 이들은 속수무책으로 노출되고 있고, 이것이 연구와 교육 행위는 물론 그 자신의 포기할 수 없는 연구자로서의 '존재감'을 근본적으로 침식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직업으로서의 학문>에서 사회학자인 막스 베버조차 자신이 동료들보다 학문적 역량은 없었지만 운 좋게 교수가 되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이는 아무리 합리적으로 제어한다고 해도, 학문세계의 경쟁논리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는 것의 은유로 읽혀질 수 있다. 그러나 오늘의 대학사회에서 비정규직 교수들이 처해 있는 상황은 막스 베버 시절처럼 '운'을 논의하기에는 생존 그 자체가 문제된다는 점에서 매우 우려스러운 상황이다. 막스 베버는 같은 책에서 근대학문을 은유적으로 "종교상의 평일이며 오직 진리라는 유일신을 섬긴다"고 말한다. 그러나 한국의 비정규직 교수들이 처해 있는 한계상황은 학문이라는 유일신은커녕 한 덩어리의 빵조차 안심할 수 없는 '절대빈곤' 상태에 처해 있다.
그러나 비정규직 교수를 둘러싼 구조적 모순이 물질적 빈곤의 문제로만 그친다면, 차라리 그것은 더디기는 하지만 언젠가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이나마 품음직하다. 사실 가장 큰 문제는 한국의 비정규직 교수들의 대다수가 어쩌면 더 치명적이라 할 수 있는 '학자로서의 자부심의 붕괴'라는 악순환에 대부분 노출되어 있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과거의 학자들이 스스로를 일컬어 '딸깍발이'라는 겸양의 표현을 쓰면서도 도도할 수 있었던 것은 학자로서의 '자부심'에 대한 사회적 인정과 존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의를 수강하는 학생들에게서조차 '강사님' 하는 마뜩찮은 호칭을 듣고 있는 오늘의 비정규직 교수들에게 이는 체감하기 힘든 덧없는 과거의 추억일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비정규직 교수들의 대사회적 주장, 즉 그들을 '교원'으로 인정하라고 국회를 향해 촉구하는 풍경에서 연상하는 것은 '빵'의 문제인 듯하다. 그러나 이것은 지식인의 일원인 비정규직 교수를 결과적으로 일방 모욕하는 단견이다. 오히려 오늘의 비정규직 교수들은 사회적 보상논리와 가장 먼 거리에서 삶의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실천하고 있는 자신들의 연구와 교육이 공적 '자부심'을 가질 만한 일이라는 점을 타인들은 물론 스스로에게 납득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 비정규 교수들의 '교원회복' 주장은 '빵'의 문제가 아닌 공적 '자부심'의 문제다. ⓒ이광수 |
바로 이 평범한 사실을 과거 30여 년 간의 한국사회가 그래왔던 것처럼, 오늘의 한국 사회 역시 몰염치하게 무시하거나 간과한다면, 학계의 미래는 매우 어둡다. 학계는 물론이고 정부가 앞장서서 비정규직 교수들의 붕괴된 자부심을 회복시켜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한국학문의 주체성과 자부심을 고양시킬 수 있는 실천의 첫걸음이라는 점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
* 이 연재는 한국비정규교수노조 교원법적지위쟁취특별위원회의 기획으로 진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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