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10일) <경향신문> 칼럼 "뉴라이트식 '대안 교과서' 읽기"에서 이만열 교수가 매우 요긴한 시각을 제시했다. (☞관련 기사 : "뉴라이트식 '대안 교과서' 읽기") 독립운동과 관련해 기존 교과서보다 전향적 서술이 꽤 있다는 것이다. 독립운동에 공산주의자들이 공헌한 몫이 컸다는 점, 미국의 임시정부 승인 거부에 이승만을 둘러싼 갈등이 작용한 점, 해방 당시 미국이 한국을 바로 독립시키지 않을 방침이었다는 점 등을 밝히고 김일성의 역할을 드러낸 사실 등을 예로 들었다. 학계에서는 상식으로 통하는 내용들이다. 그런데 '좌편향'이라는 기존 교과서들이 이런 내용을 담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역사 교육의 안정성을 위해서다. 반공 독재 시대에 학계의 상식을 교과서에 반영하지 못한 내용은 수없이 많다.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방향으로 교과서 내용이 바뀌어 왔다. 그러나 일거에 뒤집어 놓지 않고 공감대의 확장과 확산에 따라 점진적으로 바꿔 오늘에 이르렀고, 위의 내용들도 앞으로 차차 바꿔질 것을 바라보고 있는 참이다. 이만열 교수는 묻는다. 이런 내용들이 기존 교과서에 실려 있었다면 뉴라이트와 현 정권에서 뭐라 했겠느냐고. '친북 좌파', '국부 모독', 반미주의 등 안 하는 욕이 없었을 것이 뻔하다. 어느 기존 교과서를 "북한 교과서를 베낀 것"이라고 몰아붙인 정두언 의원은 <대안 교과서>를 읽어보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읽었다면 "북한 교과서가 베껴갈 책"이란 논평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현 정권의 핵심적 문제점을 '소통 불능'으로 지적하는 이들이 많거니와, 뉴라이트 담론의 특색이 바로 '소통 거부'에 있다. 편 가르기에만 골몰할 뿐, 다른 생각 하는 이들을 설득하려는 노력이 없다. 현행 교육 과정을 존중하며 서서히 개선을 바라보고 있는 기존 교과서의 사소한 문제들을 침소봉대해 붉은 색깔을 뒤집어씌우면서 자기네는 교육 과정을 무시한 튀는 소리를 멋대로 내뱉지만, 자기 눈의 들보는 보려 하지 않는다. 밑에 붙이는 내 글 "밥과 주체성"은 한국 경제 성장의 의미를 되새겨본 것이다. 뭐니뭐니 해도 경제 성장은 한국 현대사의 큰 축이다. 60년 전과 다른 '오늘의 한국'을 만드는 데 가장 큰 작용을 한 요소의 하나다. 좋고 싫음을 떠나 현실로 받아들이며 그 득실을 차분히 살펴보려 노력했다. <대안 교과서>에는 이와 관련된 내용이 4~6부에 걸쳐 여러 항목에 서술되어 있다. 경제 성장을 극도로 중시하는 뉴라이트인 만큼 서술 분량이 매우 많다. 그 소소한 내용을 따지기 전에 내용 전체를 덮어씌우는 '보편적 가치'란 관념이 길을 막는다. 가치 체계는 문명과 문화의 중심축이고 가치관은 사상의 알맹이다. 한 인간의 정신 활동은 안정된 가치관의 추구를 중심으로 이뤄진다. 가치관의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널리 통용되는 가치, 즉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게 된다. 그러나 절대적 보편성을 가진 가치는 신앙 속에만 존재할 뿐,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편적 가치'에 묶인 획일적 가치관을 구성원들에게 강요하는 사회를 전체주의 사회라 한다. 사상의 자유가 없는 사회다. 절대적 가치로서의 '보편적 가치'는 침략의 도구로도 애용되어 왔다. 근대 이전에는 관습과 종교를 달리하는 이웃 사회를 정복하는 이유가 되었고, 근대에 와서는 개인주의, 자유주의, 자본주의를 각지의 전통사회에 강요하는 근거가 되었다. 오늘날까지 '북한 인권'이나 '중국 인권'이 호전적 정책의 빌미로 활용되고 있는 것도 강자의 잣대로 약자를 재단하는 오랜 관행에 따른 것이다. (노파심에서 덧붙인다. 북한과 중국의 인권을 무시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그 사회의 역사의 흐름과 상황을 묵살하고 외부인의 기준을 기계적으로 적용시키는 짓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뉴라이트 논객들이 미사여구로 포장해 내놓는 '보편적 가치'란 것이 결국은 자본주의 가치관이다. 그 가치관으로는 일제의 식민 통치까지도 정당화되고 미화된다. 하물며 개발 독재야…. |
▲ '기적의 역사'로 '상식의 역사'를 덮어버리겠다는 것인가? 뉴라이트 세계관이 유사종교 수준의 자본주의 신앙임을 이렇게까지 드러내야 하나? 이젠 정말 더 놀랄 일이 없을 것 같다. 자본주의 신전에 대한민국을 봉헌하는 행사가 어느 날 열리더라도. ⓒ프레시안 |
밥과 주체성
1960년 4월 이승만이 축출될 때까지 남한은 국가의 틀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북한이 소련과 중국에서 받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원조를 미국에서 받고 있었지만 밑 빠진 독이었다. 권력자는 이권을 대가로 충성을 모으기 바빴다. 야당도 부정불의를 줄이자는 정도의 주장을 내놓을 뿐, 근본적 대안을 제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1961년 5월 남한을 장악한 군사정권은 반공과 경제 개발의 필요성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둘 다 절실한 과제였다. 아직 냉전의 초창기였던 당시 상황에서 국가 존립의 필수조건인 미국의 후원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반공의 깃발이 필요했다. 그리고 경제적 자립은 진정한 독립을 위해 가장 요긴한 조건이었다.
경제 발전은 반공의 맥락에서도 중요한 문제였다. 전쟁 후 남북 대결은 군사 대결에서 경제 대결로 옮겨가고 있었다. 그런데 1950년 남한의 군사력 열세가 10년 후에는 경제력 열세로 되풀이되고 있었다. 전쟁 파괴는 북한이 더 심했다. 그러나 북한이 회복과 발전을 위해 노력을 쌓는 동안 남한은 원조의 단물만 빨아먹으며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었다.
남한의 서민 생활은 일제 말기와 큰 차이 없는 열악한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일부 특권층의 치부는 상대적 박탈감을 더 심하게 만들었다. 또한 미국 등 서방 국가들과의 접촉을 통해 경제 선진국을 선망하는 풍조가 팽배했다.
박정희에게는 이승만처럼 국부(國父) 시늉을 할 밑천이 없었다. 그래서 집권을 정당화할 구호가 필요했다. 그런데 반공은 이미 써먹을 대로 써먹은 구호였기 때문에 국민의 지지를 새로 모을 힘이 없었다. 박정희 정권의 가장 유용한 깃발은 경제 개발이었다.
한 가지 짚어둘 것이 있다. 군사정권에게 반공이 절실한 과제였다고 앞에서 말했는데, 이것은 상당 기간의 국가 발전을 위한 여건 마련에 필요한 것이었다는 말이지, 정치적·도덕적인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 아니다. 쿠데타 전에 민족주의에 입각해 반공주의를 비판하던 움직임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세계정세에 비추어 보면 이 움직임의 의미는 상징적인 차원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군사정권에게는 일본의 돈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군사정권에게 반공은 채찍이고 경제 개발은 당근이었다. 반공은 쓴맛이 알려진 약이었고 경제 개발은 달콤한 새 약속이었다. 이 약속에 군사정권은 명운을 걸었다. 미국의 지시도 국민의 지지도 없이 일으킨 쿠데타였다. 미국에게 전폭적 신뢰를 받을 근거가 없던 군사정권에게는 국민의 지지를 불러일으켜 자생력을 키울 필요가 있었고, 그 수단이 경제 개발이었다. "우리도 한 번 잘살아 보세!" 당시 한국인들에게 더없이 매력적인 구호였다.
군사정권은 경제 개발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5개년 계획'은 소련에서 개발되어 공산권에 유행한 정책 구조였다. 권력자 아닌 사람이 '5개년 계획'을 제안했다면 반공법에 걸렸을 것이다.
베트남 파병은 미국의 환심을 사는 데도 물론 목적이 있었지만, 기본 목적은 역시 경제의 활로를 찾는 데 있었다. 민족사에 오점으로 남은 파병이지만 경제 활성화에는 역할을 했다. 다른 참전국에 비해 작은 봉급이라도 당시 경제 수준으로는 적지 않은 외화 수입이 되었고, 부수적 사업 기회도 당시 남한의 기술 수준으로는 파병 없이 얻기 어려운 것이었다.
군사정권 초기 정책으로 가장 큰 국민 반발을 불러일으킨 것이 일본과의 수교였다. 일본의 전면적 국가 범죄에 시달렸던 민족에게 군사정권의 수교 조건은 굴욕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군사정권에게는 일본의 돈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군사정권의 경제 개발 정책이 상당한 성과를 거두어 정권이 꽤 오래 지속될 수 있었던 데는 일본과의 관계가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다.
"정권이 국가를 제대로 대표하지 못하는 상황"
1960년대 초 경제대국으로 성장하고 있던 일본에게 아쉬운 문제 하나는 입체적 경제 구조를 뒷받침해줄 배후지(背後地)가 없다는 것이었다. 제국주의에서는 식민지가 배후지 역할을 해준다. 서방 열강의 옛 식민지들은 대개 독립 후에도 배후지로서 경제적 역할을 계속했다. 그런데 일본의 옛 식민지들은 모두 일본으로부터 절연되어 있었다.
배후지의 역할은 인적·물적 자원을 제공하고 상품 소비에 가세하는 것이다. 국교 수립 후 남한은 일본 산업과 경제에 보완적인 방향으로 발전의 틈새를 찾았다. '신(新)식민지' 역할을 자청한 셈이었다.
일본과의 긴밀한 경제 관계는 공산권에 가로막혀 섬과 같은 위치에 있던 남한에게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그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 관계에 임하는 자세가 협력적인 것인가 종속적인 것인가 따질 여지가 있는 것이다.
군사정권의 대 일본 자세가 당당한 것이 못된 것은 국교 수립 단계에서부터의 일이었다. 정권이 현금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식민지 시대의 피해에 대한 보상금을 형편없는 헐값으로 흥정해 버렸다.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정권이 국가를 제대로 대표하지 못하는 상황이었고, 이로 인해 외국과의 거래에서 손해를 감수한 것은 박정희 집권기 내내 거듭된 일이었다.
박정희를 비롯한 정권의 핵심 인물 몇이 해방 전 만주국에서 일한 경력 때문에 그들이 만주국을 한국 경제 개발의 모델로 삼은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도 제기되어 왔다. 합당한 추측이다. 만주국은 일본 관동군의 손으로 만들어지고 운영된 괴뢰국가였다. 군부가 국가 운영의 주체가 된다는 점에서부터 일본 경제에 종속적인 위치를 자청하는 구조까지, 군사정권의 경제 정책 방향은 우연으로 볼 수 없을 만큼 만주국의 틀을 따라갔다.
박정희 정권의 구체적 모델이 만주국이었다면 그 배경인 군국시대 일본이 궁극적 선망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 국가와 재벌의 결탁, 그리고 노동운동의 철저한 탄압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지표들이다. 재벌 중심 산업·경제구조는 군사정권이 끝난 오랜 뒤까지도 후유증을 남기게 된다.
"군사정권 하의 정경유착은 구조적이고 지속적인 것이 되었다"
재벌의 뿌리는 이승만 정권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1950년대 남한의 대자본가들은 재벌이라기보다 거상(巨商)의 모습이었다. 삼성그룹 창업자 이병철을 사람들은 '돈병철'이라고 불렀다. 돈 많은 사람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당시 자본가들은 돈 냄새를 피웠을 뿐, 권력의 냄새는 풍기지 않고 있었다.
이승만 정권의 부패공화국에 정경유착이 없었을 리가 없다. 4·19 후 대부분 자본가들이 부정축재 혐의를 받았다. 5·16 후 경제개발을 절체절명의 과제로 인식한 쿠데타 세력은 이 자본가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기왕의 부정축재 혐의를 최대한 무마시켜 주면서 앞으로의 긴밀한 협력 관계를 제안한 것이었다.
이승만 정권 하의 정경유착이 특혜 한 건 한 건을 놓고 흥정하는 단발식 유착이었다면 군사정권 하의 정경유착은 구조적이고 지속적인 것이 되었다. 정권은 재벌들을 위해 모든 일을 해주었다. 사업 기회를 만들어주고, 싼 금리의 자금을 제공하고, 노동운동 봉쇄를 통해 낮은 임금을 보장해주었다. 세금도 낮게 매기고 적당히 거뒀다.
그 대가는 정부가 요구하는 산업 구조에 공헌하는 것, 그리고 권력 집단에게 돈을 대 주는 것이었다. 그런대로 명분이 있을 때 거두는 '준(準)조세'라는 제도 아닌 제도는 검은돈의 거대한 빙산에서 한 모퉁이가 때때로 드러나는 것이었다. 이 거래 관계를 원활히 하기 위해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이라는 기구도 만들어졌다.
초기의 재벌 체제에는 순기능이 적지 않았다. 수출드라이브 경제 정책을 위해서는 규모의 경제가 필요했다. 그리고 시장 조건이 미비한 상황에서 계열회사 간의 내부거래 비중을 높임으로써 거래비용을 절감하는 효과가 컸다. 그런데 경제 성장의 결과 순기능을 위한 조건이 해소된 뒤에도 재벌 체제가 계속해서 강화되어 엄청난 역기능을 일으켰다.
군사정권은 정치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가로막는 무단적(武斷的) 속성을 가진 것이었다. 1961년의 남한 상황에는 쿠데타의 필요성을 정당화해 주는 면도 없지 않았다. 그런데 박정희 집단은 군사정권을 영속시키려 했기 때문에 사회의 발전과 갈등을 일으켰다. 재벌 체제는 이 권력중독증이 경제계에 투영되어 나타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재벌 체제는 군사정권과의 호응관계 속에서 발전한 체제였다"
1960년에서 1990년 사이 남한의 경제성장을 타이완,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 경쟁국들과 비교해 보면 전체적 성과에 별 차이가 없었다. 다만 남한 경제가 다른 나라들에 비해 산이 높고 골짜기가 깊었다. 고속 성장기에는 남들보다 빠른 속도를 보였고, 침체기에는 유별나게 충격이 심했던 것이다.
이것은 경제와 산업에 대한 정권의 개입과 통제가 강했던 결과라고 생각된다. 여건 변화에 대한 정권의 판단과 대응이 시장에 맡겨두는 것보다 효과적일 때도 있었고, 경직된 인위적 체제가 위험에 둔감한 면도 있었던 것이다.
전체적 성과가 크게 뒤지지 않은 것은 인위적 경제 운영치고 괜찮은 성적이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외적 지표보다 재벌 중심 경제체제의 체질에 남아있었다. 이 문제가 1998년 IMF 사태 때 혹심한 타격을 받는 결과를 낳았다.
재벌 체제는 군사정권과의 호응관계 속에서 발전한 체제였다. 그리고 군사정권 초기에 가치를 발휘하다가 후기에는 역기능이 늘어나고 있었다. 그런데 군사정권이 물러선 1987년 이후에도 위정자와 기업가들은 재벌 체제의 매력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위정자들에게는 정치 자금을 쉽게 조달하는 것이 매력이었고, 기업가들에게는 경쟁을 회피하고 특혜를 따내는 것이 매력이었다. 그래서 정권과 밀착된 인물들이 특혜융자를 통해 재벌 흉내를 내는 '모의(模擬)재벌'의 기현상까지 나타났다.
1997년 후반에 세계적으로 확산된 경제위기는 유동성의 위기였다. 경제의 기반이 흔들린 것이 아니라 운영 방법의 불안정성이 표면적 문제를 일으킨 것이다. 국가권력 중심 재벌 체제에 묶여있던 남한 경제의 약점을 정통으로 때린 문제였다. 국가가 주축을 맡고 있던 금융계는 재벌이 떠넘긴 부담을 모두 덮어쓴 채 무너졌고, 부담은 대부분 국가로 넘어왔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 "잃어버린 10년"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대통령이 군부나 절대다수의 여당을 끼고 모든 일을 시원시원하게 해치우던 시절을 그리워할 만한 상황이 그 동안 여러 차례 거듭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IMF 사태 와중의 정권 교체는 특권 구조의 청산을 바라는 민의가 반영된 것이었다. 과거처럼 특권의 주재자로서 권력자가 아닌 두 대통령 아래 남한은 상당한 자생력과 안정성을 가진 국가로 변신할 수 있었다.
"1970년대 초까지 남한보다 우위에 있던 북한 경제의 몰락"
넓은 의미의 세계화라 할까, 모든 인류의 시장이 통합되는 추세는 유럽의 산업혁명에서부터 구체적인 궤적을 그리기 시작했다. 산업화, 자본주의, 무역 자유화를 주축으로 하는 이 변화는 19세기 중에 두 가지 큰 모순을 드러냈다. 제국주의 충돌로 드러난 민족모순과 공산주의 대두로 나타난 계급모순이었다.
제국주의 충돌은 20세기 전반의 두 차례 대전으로 파국을 맞았다. 그 뒤에는 공산주의의 도전이 반세기 가까이 세계를 냉전 구조에 묶어놓았다. 돌이켜보는 입장에서 말한다면 공산주의의 도전은 하나의 대안 제시에 그쳤을 뿐, 세계 경제 구조 변화의 흐름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결정적 역할에 이르지 못했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지금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세계화의 흐름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서방세계 안에서 본류를 지켜온 것이다. 1960년대까지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로 대표되는 선진국들로 그 주류가 구성되어 있었다. 1970년대 유가파동에 따른 경제격동을 계기로 한국 등 신흥 산업국들이 주류에 접근하기 시작하면서 지금 진행되고 있는 세계화의 규모와 틀이 나타나게 되었다. 커진 무대 위에서 남한의 역할은 엑스트라에서 조연급으로 격상되었다.
1970년대 경제 격동은 당시 자본주의 세계에서 심각한 위기로 인식된 것이었지만 "위기가 곧 기회"라는 말대로 세계시장의 역동성을 키우는 계기가 되었다. 공산권 경제는 대조적으로 침체상황에 빠졌다. 1960년대까지 연 5% 이상을 유지하던 소련의 GNP 성장률이 1970년대를 지나는 동안 계속 떨어져 1980년대에는 연 2% 수준이 되었다. 이 장기침체가 곧장 공산권 붕괴로 이어졌다.
1970년대 초까지 남한보다 우위에 있던 북한 경제의 몰락은 이 흐름 속에 이뤄진 것이다. 어떤 이유로든 세계화를 거부한 나라들이 지금 세계에 가난한 나라로 남아있다. 옛 공산권 국가들이 1990년대에 개혁과 개방을 받아들이는 가운데 북한은 홀로 흐름 밖에 서있어 왔다. 미국의 적대적 봉쇄 정책에도 이유가 있지만, 북한의 비타협적 자세가 더 근본적 이유다.
바닥을 친 북한 경제의 건드려지지 않은 잠재력이 21세기 초반에 어떤 모습으로 터져 나올지, 한반도가 이제부터 겪어나갈 변화에서 핵심적 작용을 할 것이 기대된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