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전태일, 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에게 붙는 칭호다. "노동자도 사람이다"를 외치며 산화한 전태일 열사의 뜻을 평생 온 몸으로 이어 온 이소선 여사가 올해 팔순을 맞았다. 사단법인 전태일기념사업회는 그의 팔순을 기념해 헌정 문집 <조선 질경이 이소선>을 발간한다. 여러 사람의 기억으로 재구성되는 이소선 여사의 치열한 삶은 깊은 감동과 함께 노동운동 또 우리의 삶에 큰 자극이 될 것이다. <프레시안>과 전태일기념사업회는 이 책에 실린 글 가운데 9편을 골라 연재한다. 전태일기념사업회는 오는 12월 5일 오후 6시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팔순 잔치 겸 출판기념회를 갖는다. |
"1970년대로 되돌아간 것 같아 요즘 밤잠을 못 잔다."
지난 3월,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 첫 노동부 수장이 된 이영희 노동부 장관을 만난 자리에서 이소선 어머니가 한 말씀이다. 1970년대는 생떼 같은 당신의 아들이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자신의 몸에 스스로 불을 붙였던, 그 즈음 이었다. 값싼 노동력을 바탕으로 경공업 중심의 국가 경제를 키우는데 모두 혈안이 돼 있던 시절, "노동자도 사람이다"라는 전태일의 외침은 그 시절 한국 사회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다. 기업의 이윤 축적을 통한 경제 성장만이 최고의 가치가 되고, 그를 위해서라면 법조차 '종이호랑이'가 되는 것이 당연시 되던 때다. 2008년의 노동부 장관에게 어머니는 그 시절을 얘기한 것이다. 그리고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불과 6개월만인 지난 9월, 90일 넘게 단식 농성을 하고 있는 기륭전자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두고 어머니는 "내 나이 여든에 이런 일은 처음 봤다"고 하셨다.
40년 세월의 무상함이 아니라 당신의 인생 전부를 얘기했다. 목소리는 한결 더 기운이 없었다. 거친 불길이 휩쓸고 지나가 새까맣게 타들어간 아들의 몸을 지켜봐야 했던 그 순간보다, "어머니가 내 뜻을 이어 달라"는 아들의 유언을 지키느라 밑바닥 노동자들과 먹고 자며 노동조합 한번 만들어 보려고 온갖 고초를 다 당했던 그때보다, 지금 이 순간이 더 절망스럽다는 말이었다. 띄엄띄엄 갈라지는 목소리는 노쇠한 육체 탓이 아니라 지치고 상한 마음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산전수전 다 겪었다' 해도 토 달 이 없을 이소선 어머니의 삶에 '처음'을 얘기하게 만드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죽는 것 빼곤 다 해봤다"와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죽는 것 빼고는 다 해봤다."
파업 1000일을 훌쩍 넘기고 다시 집단 단식을 시작하며 기륭전자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가 내뱉은 말이다. 이후 김소연 금속노조 기륭전자분회 분회장은 94일 동안 단식을 했고, 미처 회복되지 않은 몸을 이끌고 또 공장 앞에 쌓은 철탑에 올라갔다. 하지만 24시간도 채 못 돼 경찰은 특공대를 투입해 그녀를 강제로 끌어내렸다. 여성 노동자의 목숨을 건 단식에 안타까워하던 세상의 관심도 잠시였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비슷한 시기, 한가위를 앞둔 8월 서울역 앞. 40m 조명탑에 올라 고공시위에 들어가며 KTX 승무원들이 토로한 얘기다. 국가인권위원회가, 법원이, 교수들이, 사회 원로들이 나서서 이들의 직접 고용 정당성을 아무리 외쳐도 철도공사는 3년 내내 꿈쩍하지 않았다. 갈 곳이 없어 하늘로 올라갔지만 이들은 또 빈손으로 내려왔다. 철도공사의 '분리 대응' 입장에 따라, 뒤늦게 이들의 파업 행렬에 동참한 새마을호 승무원만 먼저 일터로 보내며, 이들은 또 울었다.
"아, 우리는 이 나라 국민이 아니구나."
임금 인상도 정규직화도 아닌, 단지 '고용 안정'을 요구하며 매장을 점거하고 파업에 들어간 뒤 1년이 지나도록 일터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이랜드 비정규직의 탄식이다. 2007년 여름 대한민국은 이들의 '반란'으로 뜨거웠지만, 1년 6개월이 다 되어가는 지금 그들에게 남은 것은 떠나간 동료들과 쌓여가는 고지서들과 연체된 카드빚뿐이다. '비정규직의 상징? 남들에게만 빛이고 희망이고 정작 우리 자신은 뭔데?' 오랜 파업 기간 바뀌어 버린 홈에버의 새 주인 삼성테스코를 상대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며, 이들은 되뇌었다.
"길어지는 파업으로 카드빚을 갚지 못해 전셋집을 줄이며 울었다."
'원청인 코스콤의 직원이 맞다'는 법원 판결문을 손에 쥐고도 '대법원 확정 판결까지 기다리겠다'는 회사 때문에 여전히 여의도 한복판에서 두 번째 겨울을 맞고 있는 코스콤 노동자의 하소연이다. 입법, 사법, 행정부가 모두 이들이 현행법상 코스콤의 직원이라고 손을 들어줘도 이들이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란,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뿐이다. 게다가 한때는 동료였던 정규직 노동자들이 이들의 직접 고용을 반대하는 기막힌 현실에 자다가도 불쑥 화가 치밀어 오른다.
그뿐일까? 노동조합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생트집'을 잡아 간부 11명을 해고한 동우화인켐, 역시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해고된 뒤 165일 동안 고공농성을 했지만 여전히 싸우고 있는 GM대우 비정규직, '2년 고용 후 정규직화' 조항을 피하기 위해 1년 364일 째날 계약이 해지된 뒤 수차례 쫓겨나고 다시 들어가기를 반복하고 있는 강남성모병원 간호보조원 노동자.
이처럼 최근 노동계의 투쟁은 비정규직 노동자가 '도맡아'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의 투쟁은 나이, 성별, 하던 일만 다를 뿐 비슷하게 전개되고 있다.
"파업이 길어지면 사업장은 달라도 하는 일은 다 비슷하다. 점거, 단식 아니면 어디에 올라가고…. 며칠을 굶느냐, 어디를 점거하느냐만 다를 뿐이다. 3년간 몇 차례나 다 해봤던 일이다. 그런데 안 됐다. 또 하자고 하면 조합원들 반응은 '그거 해서 정말 되는 거야? 안 되면?'이다. 울고 싶어도 마땅히 울 공간도 없다. 화내고 싶어도 화 낼 사람이 없다. 자다가도 문득 생각이 나면 울고, 샤워하다가도 눈물이 난다."
KTX 승무원 오미선 씨의 말이다.
한 번 시작하면 끝날 줄 모르고 이어지는 지난한 파업의 길에서 이들이 느끼는 절망은 깊고도 긴 현재 진행형이다.
▲ 한 번 시작하면 끝날 줄 모르고 이어지는 지난한 파업의 길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느끼는 절망은 깊고도 긴 현재 진행형이다. ⓒ연합뉴스 |
그 시절엔 "지켜 달라" 호소할 법이라도 있었다
그리고 이들의 절망은 38년 전 자신의 몸에 제 손으로 불을 지를 수밖에 없었던 전태일 열사의 절박함과 닮아 있다.
용역 깡패가 농성장에 들이닥쳐 말간 대낮에 버젓이 폭력을 행사하고, 대통령이 그토록 좋아하는 '법과 원칙'은, 없는 이들에게만 엄격하다는 진실은 어쩌면 '밑바닥 인생'들에게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지 모른다. 하지만 40년 전, 그 시절엔 그래도 "지켜 달라"고 호소할 법이라도 있었다. "법대로 하자"고 따져 물을 무기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없다. 지난 2007년 7월 처음 시행된 기간제법 등 비정규직 관련법이 보호하고 있는 대상은 한정적이다.
2008년 8월, 839만7000명으로 추산(노동사회연구소)되는 비정규직 가운데 이 법을 손에 쥐고 따지고들 수조차 없는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다. 이른바 '간접 고용 비정규직'이다. 용역‧도급‧파견과 같이 실제 사용자와 근로계약상의 사용자가 다른 경우, 현행법으로는 원청의 사용자 책임을 규정할 어떤 근거도 없다. 또 그나마 '기간 제한'과 '차별 시정'이라는 두 가지 보호 대책을 담고 있는 비정규직법도 이들을 보호하지 못한다. 코스콤, 기륭전자, KTX 승무원, 강남성모병원 등 사회적 이슈가 된 비정규직 투쟁이 대부분 간접 고용 노동자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라는 점은 '비정규직보다 더 열악한' 이들의 처지를 드러낸다. 비정규직법 시행과 동시에 터져 나와 대한민국 사회를 들썩이게 했던 이랜드 비정규직의 투쟁은 사용자의 이 같은 '간접고용화(化)', 즉 계산업무 외주화를 막기 위해 시작된 것이었다.
사용자는 각종 노조법상 의무 및 비정규직법 회피를 위해 점점 더 외주화 등 간접고용을 선호하고 있다. 그냥 비정규직 사용으로는 성이 차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정부는 있는 법조차 '비즈니스 프렌들리'에 맞게 더 완화해주려고 시동을 걸었다. 직접 고용 의무가 발생하는 비정규직 사용 기간을 2년에서 더 늘리려는 분위기다. 명분은 "비정규직 대량 해고"를 막기 위해서라지만, 사실상 비정규직 사용에 대한 규제를 완화해주려는 것이 진짜 목적이다.
비정규직은 점점 더 밑바닥으로 내몰리고 있는데, 세상은 참 무심하다. "죽으라면 죽겠다"는 절규가 빗발치는데도, 사람들은 참 무감각해졌다. 지난 2006년 여름, 포항건설노조의 포스코 점거 농성 등 파업 과정에서 경찰의 토끼몰이식 진압으로 노동자 하중근 씨가 사망했고, 2007년에는 전기공 정해진 씨가 단체협약 체결을 위해 몸에 불을 붙였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가 비단 이들 뿐일까 만은, 어느 주류 언론도 이들의 죽음을 주목하지 않았다. 당연히 세상도 조용했다. 자신의 처지를 세상에 알리려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몸부림이 점점 더 극단으로 치닫는 이유다. 파업 800일을 맞으며 "지금 우리는 꼭 고립된 섬 같다"던 KTX 승무원의 말은 그래서 더 처절하다.
"하나로 힘을 모으면…" 진실은 간단하고 쉽다
꿈쩍 않는 것은 세상만이 아니다. 같은 노동자들도 이들을 외면하고 있다. 이미 공장 울타리를 넘어 하나로 나가겠다며 산업별 노동조합으로의 전환을 해 놓고도 금속노조 현대차지부는 비정규직을 자기 조합원으로 받아들이는 노조 규약 개정안을 세 번이나 거부했다. 얼마 전까지 같이 일하던 비정규직 노동자가 거리에서 1년 넘게 노숙 농성을 하는데도, 이들을 돕는 것은 고사하고 회사보다 더 나서 문제 해결을 반대하는 정규직노조도 있다.
그래서 지금 다시 전태일을, 이소선 어머니를 되새기게 되는 것이다. 몇 해 전부터 이소선 어머니는 틈날 때마다 새삼스런 '노동자의 단결'을 강조해 왔다. 사소한 차이로 틀어져 좀처럼 회복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는 양대 노총을 향해서도 "서로 힘을 합치지도 않고 노동자의 힘이 모자란다고 말하는 것은 다 핑계"라 했고, 비정규직 노동자를 보듬어 안지 못하는 정규직 노동자를 향해서도 "더디더라도 가장 낮은 사람들과 함께 가야 한다"고 호소했다.
명쾌하고 간단한 말이었다. "힘들다, 힘들다고 하지만 하면 된다"는 얘기는 많은 것을 담고 있었다. 기회가 닿을 때마다 이소선어머니는 자신이 생각하는 '묘책'도 내놓았다.
"딱 사흘 만 모두가 집에서 안 나오면 된다. '아프다'고 하거나 '일이 있다'고 하거나, 아무튼 핑계를 대고 딱 사흘만 전체가 집 밖으로 나오지 말자. 무슨 일이 벌어질까? 세상은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노동자의 요구를 이렇게 우습게 알지 못한다."
꼭 2년 전 이맘때 인터뷰에서 이소선 어머니로부터 이런 얘길 들었을 때는, 놀라울 만치 단순한 그 '제안'에 고개를 갸우뚱했었다. 하지만 '법과 원칙'이라는 허울 아래 노동자의 손발만 꽁꽁 묶인 이 시대, 숨 막힐 듯 답답한 현실의 탈출구는 아주 간단한 곳에서 시작될지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이소선 어머니의 간단한 말이 내내 머릿속을 맴도는 것은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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