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까지 오바마 당선자의 행보를 보면, 거대규모의 공적자금 투입과 중산층 복원 계획은 확정적으로 보인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어 온 금융자본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규제할 수 있느냐가 정말 중요하다고 학계는 지적한다.
오바마 정권 출범과 함께 민주당이 의회를 장악하게 됐지만 큰 기대는 금물이라는 지적이 국내 학계에서 제기됐다. 새로운 자본주의 체제 구성은 어려울 것이라는 뜻이다.
"오바마, 새 버블 막을 준비 안 됐다"
27일 민주화교수협의회(민교협) 주최로 서울대에서 열린 토론회 '세계 경제위기와 자본주의의 미래'에서 김상조 한성대 무역학과 교수는 대공황 당시 루스벨트 대통령 하에서 케인스의 경제위기 해법이 생각만큼 적극적으로 실현되지 못했다고 지적하며 오바마 당선자 역시 새 체제를 만들어내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김 교수는 "2차 세계대전 막바지 새 경제체제 구축 논의 과정에서 케인스가 주장한 새로운 세계적 차원의 협조주의, 곧 세계은행 창설과 새 기축통화 발행, 무역 흑자국의 균형 회복 공동노력 등은 하나도 채택되지 못했다"며 "오바마에게서도 이를 기대하기는 무리"라고 말했다.
오바마에 대한 지나친 기대가 금물이라는 이유는 일단 오바마 자체가 미국의 금권정치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오바마 내각의 경제관료들 역시 이런 기대를 접게 만든다. 오바마 내각의 경제팀은 과거 클린턴 정부 당시 규제완화를 이끌었던 전 재무장관 로버트 루빈의 영향을 받은 이른바 '루빈 사단'으로 채워져 있다.
루빈은 미국 최대 투자은행이었던 골드만삭스 회장을 지낸 인물로 IT버블을 일으킨 장본인으로 평가받는다. 전형적인 월가 친화형 인물인 셈이다. 새 재무장관으로 발탁된 티머시 가이트너 뉴욕 연방준비은행 총재와 로런스 서머스 전 재무장관(백악관 국가경제위원회 의장 내정), 예산국장으로 유력한 피터 오자그가 대표적 루빈 사단 구성원이다.
결국 오바마 정권에게서 지금의 미국식 금융자본주의를 과감히 수술할 것이라는 기대는 접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김 교수는 "어느 정도 금융시장 재규제 논의가 활발해지겠지만 공시 강화나 금융시장 건전성 강화 정도를 넘어 일각에서 새 대안으로 나오는 토빈세 도입, 외환거래 직접통제 정도로까지 이어질지는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오히려 내년 말경 즈음으로 예상되는 지금의 유동성 과잉공급 부작용을 잘 막을 수 있을지도 걱정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새 버블이 나타날 조짐이 보이면 인기를 의식할 수밖에 없는 오바마가 이를 강력히 규제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말이다.
▲세계는 어쩌면 오바마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뉴시스 |
이정우 교수 "그래도 약간의 개혁이 낫다"
그래도 미국의 새 정당에 대한 기대 역시 있었다. 노무현 정권 당시 청와대 정책실장을 지낸 이정우 경북대 경제학과 교수는 역사적 사례를 들며 '그래도 민주당이 낫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 교수는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의 조사를 바탕으로 "지난 1948년부터 2005년 사이 미국 경제성장 성적표를 살펴보면 민주당에서 정권을 잡았을 때 경제성적이 더 좋았다"고 말했다.
이 교수에 따르면 민주당 대통령이 집권했을 때 경제성장률은 소득계층을 가리지 않고 모두 2%를 넘었다. 반면 공화당 대통령이 집권했을 때는 경제성장률이 채 2%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소득 하위 20% 계층의 경제성장률은 공화당 대통령 집권 시 0.43%에 불과해 민주당 대통령 집권기(2.64%)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한편 이 교수는 미국 민주당의 사례를 들며 노무현 정권 집권기에 대한 비판에도 적극 해명했다. 토론회 참석자 중 한 명이 노무현 정권도 결국 친시장주의 정책을 폈기 때문에 현 정부와 차이를 못 느낀다고 지적하자 이 교수는 "그래도 민주당이 공화당보다 낫다. 부자에게 돈을 안겨주는 극우파가 정권을 계속 잡는 것 보다는 약간은 더 온건한 정부가 들어서는 게 낫다"며 "한국의 경우 지난 수년 간 지나치게 극우적으로 변해 약간의 개혁조차 혁명만큼 어려웠다"고 말했다.
▲민교협 주최 공개토론회에 참석한 각계 교수들은 각자의 전공 분야를 통해 이번 경제위기를 들여다 봤다. ⓒ프레시안 |
이날 토론회에 참석한 교수들은 각자의 전공을 바탕으로 현재의 경제위기를 진단하며 특히 위기를 맞은 한국 사회에 새로운 대안이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조흥식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우리 사회가 선진화 논리에 너무 깊이 빠졌다. 성장률에 집착하다 상품화 대상이 아닌 의료, 복지, 주거부문까지 상품화의 대상이 돼 버렸다"며 "모든 것을 돈벌이 수단으로 만들려 하는 탐욕에 대한 사회적 고찰이 이번 일을 바탕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최영찬 서울대 농경제학부 교수는 거시경제 담론만 얘기할 때가 아니라 미시 부문에 대한 철학을 잘 잡는 게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그 예로 최 교수는 농업 사회의 경우 협동조합 모델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주장했다.
최 교수는 "지금 많은 사람들이 케인스식 모델과 고전 경제학적 모델, 혹은 마르크스적 모델을 두고 논란을 벌이지만 이들 경제학이 모든 것을 다 설명할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며 "대안으로 90년대 우리 사회에서도 거론되던 농업협동조합(정부 자본이 들어온 지금의 농협과는 다른)이 있다. 미국이나 유럽에도 이런 모델이 있으며 농촌에서 우리와 같은 어려움을 겪었던 뉴질랜드는 농업협동조합을 통해 문제를 일시에 해결했다"고 했다.
마르크스 경제학을 연구하는 장시복 경상대 연구교수는 이번 경제위기를 30년대 대공황과 70년대 위기를 이은 '제3의 불황'으로 정의했다. 앞의 두 불황이 케인스식 경제학, 신자유주의라는 해법을 찾았던 것처럼 지금의 불황 역시 '새 체제(regime)'를 요구하고 있다는 뜻이다. 장 교수는 여전히 마르크스 경제학이 새로운 해법을 내놓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장 교수는 또 현재 상황이 매우 심각해 새로운 대공황이 올지도 모른다고 경고했다. 그는 "현재 위기는 부동산 붕괴(1막), 금융시장 붕괴(2막), 불황(3막)으로 이어져왔다. 문제는 1막과 2막이 지나면서 아무 것도 해결된 게 없다는 것"이라며 "무슨 일이 앞으로 벌어질지 예측하기는 어렵지만 대공황과 같은 상황이 오지는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과거 살펴보니…"버블 꺼져서 대공황 온 것 아니다" 한편 이번 토론회에 첫 발제자로 나선 양동휴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1930년대 미국 대공황기 연구결과를 요약 설명하며 당시 경제대공황이 버블 붕괴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는 1920년대 '광란의 시대(the Roaring Twenties)'를 거치며 형성된 버블 붕괴가 대공황으로 이어졌다는 통상적 생각과는 거리가 있다. 양 교수는 "대공황은 물론 1987년 '검은 월요일'과 이번 주가폭락 모두 거품 붕괴가 원인이 아니라 실물 경기침체가 근본 원인"이라며 "특히 대공황에는 경제구조 자체가 안은 불안정성이 큰 영향력을 미쳤다"고 밝혔다. 1920년대 말 미국은 대규모 호황을 지나며 주식투기 열풍이 과열되자 투기 규제를 위해 긴축정책을 고수했다. 그리고 당시 흑자국이었던 미국의 긴축정책은 해외차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적자국에 큰 충격을 미쳤다. 게다가 1차 세계대전을 치른 후 아직 완전한 해결이 되지 않았던 전후조정 문제와 이에 따른 배상금 지급 문제, 시장의 경직성, 금본위제 자체가 안고 있던 취약점이 쌓이면서 대공황을 불러왔다는 말이다.
양 교수는 "대공황 당시 미국처럼 긴축정책을 고수한다면 사태는 더 악화되며, 그 충격으로 이어진 보호무역주의를 추진해서도 안 된다"고 말했다. 지금처럼 금융의 세계화까지 대규모로 이어진 상황에서는 국제적 공조가 보다 중요하다는 뜻이다. 양 교수는 또 중앙은행의 적극적인 국채인수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다만 구조적인 개혁 추진 과정에서는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 국내적으로는 적극적인 재정정책과 구제금융 실시, 내수진작, 중소기업 및 서민대책 등을 해법으로 제시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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