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두 분의 어머니께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두 분의 어머니께

[조선 질경이 이소선] <5>

살아 있는 전태일, 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에게 붙는 칭호다. "노동자도 사람이다"를 외치며 산화한 전태일 열사의 뜻을 평생 온 몸으로 이어 온 이소선 여사가 올해 팔순을 맞았다.

사단법인 전태일기념사업회는 그의 팔순을 기념해 헌정 문집 <조선 질경이 이소선>을 발간한다. 여러 사람의 기억으로 재구성되는 이소선 여사의 치열한 삶은 깊은 감동과 함께 노동운동 또 우리의 삶에 큰 자극이 될 것이다.

<프레시안>과 전태일기념사업회는 이 책에 실린 글 가운데 9편을 골라 연재한다. 전태일기념사업회는 오는 12월 5일 오후 6시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팔순 잔치 겸 출판기념회를 갖는다.

▲"전태일이 제 몸을 불사르며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한 그 절규가 다시 들리는 듯했습니다."ⓒ프레시안
어머님!
11월도 중순이 지나 가을의 끝자락
이 깊은 밤에
조용히 어머님을 불러봅니다
어머님!
어머님 가신지 벌써 16년 반
돌아가시기 한 주일 전 어머님께서는
말기 위암의 그 고통을 감추시고
몸단장 곱게 하시고 형들 앞세우고
안양 교도소로 특별면회를 오셨지요
그때 생각만 하면 지금도 가슴이 미어집니다
나도 살만큼 살았고 형네들 다 무고하니
너는 바깥 걱정은 조금도 말아라
부디 몸 건사 잘 하고
마음 흔들리지 않도록 해라
이미 각오를 하시고
마지막 당부
그 말씀 하시러 그 어려운 길
진통제 맞아가며 오신 줄
어머님 돌아가신 뒤에야 깨달았으니
내가 얼마나 못난 놈입니까?
쇠창살 붙들고 하염없이 울어본들
어머니의 그 깊은 속을
어떻게 다 헤아렸겠습니까?

어머님!
어머님을 생각하면 질경이가 떠오릅니다
조선 땅 길가
어디서나 자라는 질경이
지금은 대구광역시가 된
달성군 가창면 행정동 산골마을 시절
어린 나에게 어머님은 빼빼장구라고 일러 주셨죠
수호야
이 풀은 키도 작고 이뿌지도 않고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소나 개에게까지 밟히면서도
아무데서나 잘 자란단다
어릴 때는 나물로 먹고
뿌리째 캐서 말려 놓았다가
배 아플 때 다려먹으면 직통이란다
너도 이렇게 씩씩하게 자라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지
아들 셋에 막내인 나는
이렇게 엄마 치마폭에서
나물하고 밥 지으며
딸처럼 자랐지요

어머님!
질경이 생각하면 떠오르는
또 다른 어머님이 계십니다
한평생을 질경이처럼
그렇게 짓밟히고 또 밟히면서도
꼿꼿하게 살아가시는
이 나라 민중의 어머니
이소선 어머님이십니다
어머님 돌아가시고
내가 더 확실한 노동자가 되면서
이소선 어머님은
나의 새어머니가 되셨습니다
어머님과는 두 분이
따로이되 한 몸으로 느껴지기도 해서
너무나 좋습니다
더욱이나 이소선 어머님의 아들
태일이 나와 동갑내기여서
나를 각별히 아껴주시니
나는 버릇없이 그냥 내 어머니려니 하면서
마냥 행복해합니다

어머님!
가끔 어머님을 뵙기 위해
창신동 그 좁은 시장 골목이나
봉재 공장 골목으로 들어서면
마치 내 어릴 적 시골 동네
질경이 밟으며 다니던
그 골목 같아서
정겹기도 합니다만
언제나 지치고 찌든 가난한 얼굴들이
마음 아프게 합니다
어머님 또한 그 골목 한 쪽에
짓밟히는 질경이로 계시니
그 좁은 방에서 어머님 뵐 적마다
포근하면서도 마음 아픈 것은
나만의 느낌은 아니겠지요?
그렇게 어머님은
태일이 가고 38년을
아직도 너무도 많은 태일이 친구들과 함께
그렇게 전태일이로 살고 계십니다
비정규직이나 어려운 노동자가 있는 곳이면
어디나 달려가
전태일이의 사랑의 풀빵을 나누어주고
안아주고 함께 울어주고
그렇게 바보로 가난하게 살고 계십니다

그런데 어머님!
전태일이나 어머님을 따라 배우며
입만 열면 그렇게 살겠다고
떠들던 우리를 돌아보면
부끄러움과 죄스러움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지난 13일 전태일 묘역에서 벌어진
38주기 추모행사에서의 추태는
우리 운동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듯하여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전태일이 제 몸을 불사르며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한
그 절규가 다시 들리는 듯했습니다
어머님이 기회 있을 때마다
누구에게나 간곡히 당부하던
'어떻든지 하나로 뭉쳐야 산다, 그래야 이긴다'
그 말씀이 쟁쟁한데
극우보수반동의 무리들은
잃었던 독재 10년을 되찾겠다고
저렇게 똘똘 뭉쳐 난린데
우리는 노동운동이든 진보정치든
갈라질 데로 갈라져
저만 옳고 잘 났다고 설치고 있으니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어머님과 전태일 열사께 죄스러울 뿐입니다

어머님!
밤이 더욱 깊었습니다
새벽이 어둠 속에서 서성이고 있습니다
어머님을 추억하면서 지새운 이 밤이
나에게는 한없는 축복입니다
노동운동과 진보정치의 말석에서
제가 이렇게 조그만 역할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두 분
어머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짓밟히면 다시 일어나고
불탄 자리에도 먼저 퍼렇게 돋아나는
조선 질경이로 사셨고
또 그렇게 살고 계신
어머님의 그 삶 자체가
내 삶의 교과서가 되고 있습니다

어머님!
어머님이 벌써 팔순
태일이도 어언 환갑이 되었네요
그러나 태일이는 스물두 살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로
늙지 않는 삶을 살고 있고
어머님 또한 민중의 어머니로
고운 삶 살고 계시니
나이가 무슨 큰일이겠습니까?
부디 살아계신 동안 더욱 건강하셔서
몸과 마음이 평안하시길
기도드릴 뿐입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