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전태일, 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에게 붙는 칭호다. "노동자도 사람이다"를 외치며 산화한 전태일 열사의 뜻을 평생 온 몸으로 이어 온 이소선 여사가 올해 팔순을 맞았다. 사단법인 전태일기념사업회는 그의 팔순을 기념해 헌정 문집 <조선 질경이 이소선>을 발간한다. 여러 사람의 기억으로 재구성되는 이소선 여사의 치열한 삶은 깊은 감동과 함께 노동운동 또 우리의 삶에 큰 자극이 될 것이다. <프레시안>과 전태일기념사업회는 이 책에 실린 글 가운데 9편을 골라 연재한다. 전태일기념사업회는 오는 12월 5일 오후 6시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팔순 잔치 겸 출판기념회를 갖는다. |
▲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고 존경하는 이소선 어머니에 대해 새삼스레 내가 한 번 더 말을 보태는 이유는, 어머니의 삶이 자신을 위해 눈물을 흘리는 일 보다 남을 위해 눈물을 흘리는 일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뉴시스 |
고난의 시대를 헤쳐 오면서 어머니는 너무나 크고 힘든 일들을 떠맡아 해오셨고, 팔순을 눈앞에 둔 지금과 또 앞으로의 삶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고 존경하는 이소선 어머니에 대해 새삼스레 내가 한 번 더 말을 보태는 이유는, 어머니의 삶이 자신을 위해 눈물을 흘리는 일 보다 남을 위해 눈물을 흘리는 일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내가 기억하는 어머니와의 첫 인연은 우리의 남편들이 소위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사형을 당한 이후이다. 1974년 4월 헌법에도 없는 '긴급조치 4호' 위반으로 23명이 '인혁당'이라는 누명을 쓰고 군사재판에 넘겨졌고 그중 8명이 1975년 4월 9일 3심인 대법원 확정판결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후, 단 18시간 만에 형집행으로 죽임을 당했다.
세상을 떠난 남편들과 남은 가족들이 국가와 국민들로부터 철저히 버림받고 외면당하던 그 시절에, 그래도 우리는 남편들의 무고함을 세상에 알려야 했다. 마침 명동성당에서 시국에 관한 기도회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인혁당 가족들은 하얀 소복 차림으로 명동성당으로 향했다. 인혁당의 억울함을 알아줄 신부님이든 목사님이든 누구라도 만나 우리의 간절한 이야기를 호소할 작정이었다.
멀리 함석헌 선생님도 계셨고 목요기도회에서 자주 만나던 분들도 또 우리를 빨갱이 가족이라 외면하던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주눅들린 마음에 더 이상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마당 한구석쯤에서 멈칫거리며 서있는 우리들에게 멀리서 전태일 어머님이 달려와 "여기서 이러고 계시면 어떡해요? 용기를 가지고 저기 앞으로 가서 당신들의 억울함을 외쳐야 합니다! 백방으로 어디든지 달려가 억울함을 외쳐야 합니다!"하며 우리의 손을 잡아 끌어주셨다.
모진 칼날과도 같던 그 시절! 우리에게 달려와 용기를 주신 어머니이다.
어머니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수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도 나는 그 때의 고마움을 잊지 못한다.
어머니 마음이 향한 곳이 어디인지를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이 나라 민주화의 역사와 나란히 함께 한, 언제나 높은 곳을 바라보기보다 낮은 자리에서 자신의 배고픔보다 다른 이들의 배고픔을 먼저 걱정하는 이소선 어머니. 어머니의 굳은 의지와 이에 따른 고단함을 너무도 가까이 잘 알고 있기에 그것을 굳이 말로 하기가 무척 어색하다.
어머니!
부디 건강하시고 마음의 안녕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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