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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주시던 월급 5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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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주시던 월급 5만원

[조선 질경이 이소선] <2> "돌아보니 당신이 늘 옳았습니다"

살아 있는 전태일, 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에게 붙는 칭호다. "노동자도 사람이다"를 외치며 산화한 전태일 열사의 뜻을 평생 온 몸으로 이어 온 이소선 여사가 올해 팔순을 맞았다.

사단법인 전태일기념사업회는 그의 팔순을 기념해 헌정 문집 <조선 질경이 이소선>을 발간한다. 여러 사람의 기억으로 재구성되는 이소선 여사의 치열한 삶은 깊은 감동과 함께 노동운동 또 우리의 삶에 큰 자극이 될 것이다.

<프레시안>과 전태일기념사업회는 이 책에 실린 글 가운데 9편을 골라 연재한다. 전태일기념사업회는 오는 12월 5일 오후 6시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팔순 잔치 겸 출판기념회를 갖는다.

전태일 동지가 일으킨 놀라운 기적 중 하나는 자신의 어머니를 수많은 사람들의 어머니로 만든 일일 것이다. 아마도 내가 아는 수백 명, 아니 내가 모르는 수천 명이 자신의 친어머니 외에 또 다른 어머니를 갖고 있을 것이다. 바로 이소선 어머니다.

내가 처음 이소선 어머니를 만난 것은 1985년, 스물댓 살 나이에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완전히 터득하고 있다고 굳게 믿던 객기 어린 시절이었다. 1980년에 해산된 청계노조를 복구해 노조 위원장을 맡았던 민종덕 형이 <청계노보>를 복간하게 도와달라는 말에 '이게 웬 영광이냐' 싶어 두말 않고 출근하게 되었다. 청계노조에서 일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전태일의 정신이 살아 있는 곳이요, 70년대 몇 안 되는 민주노조 중에서도 유일하게 살아남은 상징적인 노조였다. 또 1984년부터 수차례 합법성 쟁취를 위한 대규모 가두시위로 전두환 체제 아래 위축되어 있던 민주화운동에 새 숨을 불러일으킨 전설적인 노조였다.

막상 사무실에 출근해 보니 예상과 많이 달랐다. 한때 6000~7000명에 이르는 조합원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신발상가 4층의 넓기만 한 썰렁한 사무실에 드나드는 얼굴은 빤했다. 지금은 칸막이를 해서 좁아 보이지만 그때는 사무실이 훤히 트여 있어 더 그랬다. 저녁마다 나타나는 얼굴은 이승숙, 이경숙, 지수희, 장옥자, 김혜숙, 황명진, 정경숙…. 그리고 실무자 박계현, 황만호, 가정우, 문혜경 등등 다해야 서른 명이 넘지 않았다. 민종덕 위원장은 수배 중이라 사무실에는 잘 나오지 못했다. 궁금해서 확인해 보니 합법시절 최대 7000명이던 조합원은 백 분의 일인 70명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이럴 수가!

하지만 '일당백'이라는 말이 이처럼 실감날 수는 없었다. 나보다도 더 어린 스무 살 안팎의 젊은 조합원들의 투지는 경이로운 수준이었다. 앞서 세 차례 가두시위에서 보여준 용맹성은 물론이요, 경찰과의 일상적인 격투는 나처럼 몸싸움에 겁 많고 말싸움조차 못하는 샌님은 도저히 흉내도 낼 수 없는, 가히 예술적인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당시 서울에서 노동운동을 했던 사람이 아니라면, 그 적은 인원의 청계노조가 어떻게 전국의 노동운동과 나아가 민주화운동의 선봉대 역할을 해냈는가 실감하기 어려울 것이다.

조합의 운영은 팍팍했다. 조합비로는 나까지 댓 명이 넘는 상근자들의 활동비는 고사하고 함께 해먹는 점심의 쌀값, 반찬값도 부족했다. 너무 일찍 결혼한 나는 개봉동 복개도로 옆, 찻길보다도 낮은 250만 원짜리 전세방에서 갓난아이를 키우고 있을 때였다. 하루하루 어떻게 무얼 먹고 살았는지, 도대체 차비와 담뱃값은 어디서 났는지, 지금은 도무지 기억도 나지 않고 이해도 되질 않는 시절이었다.

어느 날 저녁, 이소선 어머니가 여러 간부들 있는 자리에서 내게 봉투를 하나 건네셨다. 어머니는 거의 매일 저녁 조합 사무실에 들리기는 했어도 조합 일에 관해 이래라 저래라 하는 말은 단 한마디도 않았다. 그저 고생한다고 손을 잡아 어루만지고 격려하고 집회 현장에서 경찰과 싸운 이야기를 너무 신나고 재미있게 들려주실 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돈 봉투를 건네시며 갓난아이 키우느라 어렵지 않느냐고, 차비라도 하라고 내 양손을 잡고 두 손 사이에 넣어주시는 것이었다.

봉투에는 5만 원이 들어 있었다. 청계노조 가기 직전 동일제강에서 한 달에 하루도 쉬지 않는 주야 2교대로 20만 원 가량 받았으니 요즘 돈으로 환산하면 50만 원 정도의 가치가 되는 액수였다. 그 돈은 차비는 물론 애 우유며 이것저것 생활비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던 기억이 난다.

그 뒤로도 한 달에 한 번씩, 날짜만 되면 정확하게 5만 원씩 월급을 받았다. 그 돈을 벌기 위해 이소선 어머니가 길바닥에서 헌옷 장사를 하시고 있다는 것도 몰랐고, 다른 상근자들에게는 제대로 주지 못했다는 것도 몰랐다. 그저 아쉬운 마음에 고맙게 받아쓰기만 했다. 결코 많은 액수는 아니었지만, 청계노조에 가면서 월급을 받게 되리라곤 생각도 못했기에 더욱 귀한 돈이었다.

오래 일하지는 못했다. 청계노조에 가기 전부터 여러 후배들과 강원도 탄광에 내려가 노동운동을 하자는 약속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5만 원짜리 월급생활 반 년 만인가, 보안유지가 유행이던 시절이라 제대로 인사도 못 드리고 청계노조를 떠났다.

지금 세상에서는 이해가 안 되는 일이겠지만, 탄광에 가기 위해 두 달 넘게 십여 명이 집단으로 합숙하며 사회과학 공부도 하고, 몇 차례 탄광에 내려가 연줄 닿는 광산 노동자들과 모임을 만드는 등등의 사전 준비를 하다 그 이듬해인 1986년 3월 들어서야 모든 준비를 끝낼 수 있었다.

식기도구며 이불 따위를 붉은 함지박에 담아 청량리역에서 화물로 보내놓고, 사북행 기차표까지 사놓고 출발을 기다리던 밤이었다. 새벽 두 시가 넘었을 때 동일제강에서 함께 일했던 절친한 벗 박영진이 분신해 사망했다는 전갈을 받았다. 황망히 강남성심병원에 도착했을 때 먼저 눈에 띈 분은 다름 아닌 이소선 어머니였다. 온통 분노와 눈물로 범벅이 된 사람들 사이에서 다시 만난 어머니께 눈인사조차 제대로 드릴 수가 없었다. 그래도 어머니가 오셔서, 아무것도 모르는 채 실신상태에 빠진 영진이의 어머니를 달래는 모습이 너무나 고맙고 안도가 되었다.

다음 날로 탄광으로 떠난 내가 이소선 어머니를 다시 뵌 것은 2년 후, 또 다시 장례식장에서였다. 탄광에서 분신 항거한 절친한 벗 성완희의 장례식이었다. 성완희는 박영진과 마찬가지로 나이도 동갑이어서 별나게 친했던 노동자였다. 영진이 때는 슬픔도 그리 몰랐는데 또 다시 친구를 잃고 나니 정신이 나가버리는 듯했다. 장례식 날 마석 모란공원으로 이소선 어머니가 오셨지만 일주일 째 잠도 못 자고 목이 쉬도록 울고 또 울어 기진한 나는 이번에도 제대로 인사를 드리지 못했다. 그래도 완희의 장례식에 어머니가 와주신 것이 너무도 감사하고 마음이 놓였던 것이 잊혀지지 않는다. 젊은이 수백 명이 모여 있어도 이소선 어머니 한 사람이 더 의 강하고 비중 있게 느껴지던 것이 그 시절이었다.

서울에 돌아오고도 한참의 세월이 지나 2000년이 되어서야 전태일문학상 때문에 다시 이소선 어머니를 뵙게 되었다. 수첩이 있다면 최소한 1000명 이상의 명단을 갖고 계실만큼 인맥 넓고 바쁜 어머니가 불과 몇 달 머물다 가버린 나를 기억하리라곤 생각도 못했다. 나를 보자마자 옛날에 노보 만들던 사람이라는 것을 떠올리며 반가워하시는데 도리어 송구스러울 지경이었다. 두 번의 장례식 때 뵙고도 제대로 인사를 못 드려 죄송했다는 말씀을 드려야 했는데 그만 잊어버리고 말았다.

▲ "믿기 어려우면 이소선 어머니 곁에서 일주일만 살아보라. 무슨 말인지 잘 알게 될 것이다.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의 수많은 원로와 선배들이 있음에도 이소선 어머니를 제일로, 아니 거의 유일하게 꼽는 이 마음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뉴시스

어머니와 각별히 친해질 기회가 생긴 건 아니었다. 시골에 사는 처지라 일 년에 서너 번 올라가 문학상 회의하는 길에 마주치면 잠깐 인사를 드리는 정도였다. 어머니를 제대로 알게 된 것은 다시 두어 해가 지나 청계노조사를 맡아 쓰게 되면서였다.

어머니를 자주 만나거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말은 아니다. 청계노조사 집필 과정에서 이소선 어머니는 단 십분도 면담을 하지 못했다. 세 차례나 찾아가 만났지만, 어머니가 건강이 안 좋았던 데다, 노동조합사는 조합원들의 생각을 모아서 쓰는 게 좋겠다는 의견이셨다.

그런데도 청계노조사를 쓰면서 이소선 어머니를 잘 알게 되었노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청계노조 출신 모든 사람들의 증언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이가 이소선 어머니였기 때문이다. 등장 횟수로만 보면 이소선 어머니가 압도적일 것이다. 10년 이상 15년까지 너무나 헌신적으로 조합 활동을 한 선후배들이 스무 명은 되지만, 그 누구도 전태일동지의 분신부터 오늘 이 시간까지, 근 40년 가까운 세월을 노조와 함께하지는 못했다. 그런 사람은 단 둘, 전태일 동지의 영혼과 그리고 이소선 어머니였다.

청계노조사를 쓰면서 취재한 백여 명의 조합원들이 가진 이소선 어머니에 대한 생각은 다양했다. 각자 자기 생각의 방향에 따라 어머니를 이해했기 때문이다. 청계천 피복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싸운다는 점은 누구나 같았으나 그것을 위해 어떻게 싸우려는지, 오늘의 세상을 어떻게 해석하고 내일의 세상은 어떻게 만들려는지에 대한 생각은 세대별로, 개인별로 다 달랐기 때문이다.

지금이 바로 혁명적 시기라 믿고 선도적 투쟁을 하고자 했던 세대들에게는 어머니가 지키고자 하는 노조의 틀이 너무 작아 보였을 것이다. 노동조합 고유의 업무를 수행하기에도 가혹했던 군사독재 아래서 조합의 일상 활동을 위해 발이 부르트고 입술이 터지도록 뛰어다니던 조합 간부들에게는 전국 노동자의 문제와 정치민주화를 위해 싸워야 한다는 어머니의 요구가 힘겨웠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내가 판단하기에, 어머니는 거의 늘 옳으셨다. 조합의 현실 역량으로 보아 정치투쟁의 요구가 부담스러울 때가 많았고, 반대로 이소선 어머니가 조합주의적 한계에 매몰된 것처럼 보였을 때도 있었지만, 냉철하게 보아 분명 어머니가 옳으셨다. 조합 간부들과 충분한 소통이 이뤄지지 않을 때는 어머니도 힘들고 간부들도 힘들고 그래서 서로 언성을 높이고 돌아서서 원망도 했지만, 어머니는 거의 늘 옳으셨다.

이렇게 말하니 마치 이소선 어머니가 청계노조를 좌지우지한 듯 오해할 수 있겠다. 결코 그런 뜻은 아니다. 어머니는 내게 그러하셨듯이, 조합 사무실이나 창동 집에 오는 모든 사람에게 마음을 나눠주고 사랑을 나눠주는 일로 당신의 가장 큰 역할을 하셨다. 마음을 다독거려주고 밥을 해주고 손을 잡아주는 그런 분이었지 노조 일에 시시콜콜 관여하고 좌지우지했던 분이 아니었다.

다만 노조의 명운이 걸린 중요한 문제가 생겼을 때, 조합 간부들 사이에 의견 충돌이나 갈등이 생겼을 때, 최종 판단을 어머니께 맡겼을 뿐이다. 어머니도 그때만큼은 냉철하게 사리를 나누고 때로는 언쟁도 불사했다. 그러다 보면 서로 서운한 것도 있고, 상처도 입기 마련이지만, 돌아서면 또다시 끌어안고 내 어머니, 내 자식하며 함께 우는 세월이었다.

놀라운 것은 더 많은 세월이 지나, 청계노조사를 위해 증언하는 조합원들은 거의 똑같이 말했다는 점이다. 그때는 이해를 못할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어머니가 옳았다고 생각한다고. 이소선 어머니는 전태일의 모친이기 때문에 청계노조를 지킨 것만은 아니라, 어머니 자신이 올바른 판단력을 갖고 계셨기에 조합이 우측으로 기울면 좌측으로 밀어주고, 좌측으로 기울면 우측으로 밀어주는 역할을 했던 것이라고 말한다. 어머니가 옳았다는 것은 나만의 생각이 아니라, 조합원 대다수의 말이었다.

사실 지금까지도 나는 이소선 어머니와 개인적으로 많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다. 어머니는 노동자를 위하려는 마음뿐 아무 능력도 없는 가난한 젊은이에게 적지 않은 돈 5만 원을 챙겨주시며 너무 돈이 적다고 미안하고 고맙다는 말씀만 하셨다. 중년이 되어 돌아온 내게 말 많고 탈 많은 청계노조사 쓰기에 힘들지 않느냐고, 고맙고 미안하다고, 거듭 거듭 미안하다는 말씀만 하셨다. 정말 다시 생각해 보니 미안하고 고맙다는 말이 어머니께서 내게 하신 말의 거의 전부였다.

실은 박영진, 성완희 장례식에 와주셔서 너무 힘이 되고 고마웠노라고, 분신 장례를 치룬 후에는 마음고생 때문에 며칠 동안 정신을 놓고 계신다는 것 다 안 다고, 저야말로 어머니가 계신 것이 이렇게 감사할 수가 없다고, 이 땅의 노동자들은 어머니가 계서서 행운이라고…. 그런 말씀을 드리고 싶었는데 제대로 한 일이라곤 없는 내가 도리어 고맙다는 말을 듣고 보니 참으로 송구스럽다.

나이 오십이 다 되다 보니 세상일이 점점 심드렁해진다. 예전에 존경했던 선배들이 우스꽝스럽게 살아가는 것도 그렇고, 나 역시 후배들의 기대만큼 역할을 해주지 못해 매일 부끄럽다. 세상에 진정한 위인이란 없다는 생각을 갖게 된 지는 벌써 오래되었다. 하지만 존경하는 사람은 몇 분 있다. 이소선 어머니를 그 제일로 뽑는다면 과장이라고들 생각할까? 결코 과장이 아니다. 평생 진실을 위해 싸워온 내가 이제 와서 무엇 하러 거짓말을 하겠는가? 믿기 어려우면 이소선 어머니 곁에서 일주일만 살아보라. 무슨 말인지 잘 알게 될 것이다.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의 수많은 원로와 선배들이 있음에도 이소선 어머니를 제일로, 아니 거의 유일하게 꼽는 이 마음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이소선 어머니가 부디 오래도록 우리 곁에 남아 계시기를 빈다.

안재성 선생은 청계피복노동조합의 역사를 기록한 <청계, 내 청춘>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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