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5일 "새로운 미국의 변화를 주창하는 오바마 당선인과 대한민국의 새로운 변화를 제기한 이명박 정부의 비전이 닮은 꼴"이라고 말했다. 과연 그럴까? 오바마 당선인의 등장은 미국의 변화의 신호탄이라고 받아들여진다.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불확실한 경제 위기 상황에서, 신자유주의의 첨병 역할을 하던 부시 대통령에 맞서 등장했기 때문이다. 과연 오바마의 개혁은 성공할 수 있을까? <프레시안>은 '건강과대안'과 공동으로 우리 삶에 큰 영향을 주는 보건의료, 여성, 환경 등 사회정책을 중심으로 오바마 개혁의 비전과 한계를 짚어본다. 더 나아가 이런 오바마 개혁이 이명박 대통령이 추진하는 각종 사회정책과 얼마나 다른지 살펴볼 것이다. '건강과대안'(대표 조홍준 울산의대 교수)은 시민과 함께 건강과 관련된 온갖 문제를 고민하고 대안을 마련하겠다는 포부를 밝히며 지난 10월 18일 출범한 싱크탱크이다. 이들은 보건의료를 넘어 환경, 노동 안전, 사회적 약자의 건강 문제를 포괄적으로 다룰 예정이다. (☞관련 기사 : "건강하고 싶다"…'촛불' 열망 모은 '건강과대안' 출범) |
한 나라의 경제가 성장함에 따라 노동 관련 지표는 좋아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미국은 경제 규모에 비해 노동 관련 지표가 좋지 않은 나라다.
이는 몇 가지 지표만 봐도 확인된다. 저임금 노동자가 많다. 전체 노동자에서 저임금 노동자가 차지하는 비율은 2006년 기준 24.2%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한국 다음으로 높다. 노동 시간도 긴 편이다. 2007년 기준으로 미국의 연간 노동 시간은 1798시간으로 OECD 국가 중 9위다. 일하다 죽는 사람도 많다. 노동자 10만 명당 산재 사망자 수는 4.69명으로 OECD 국가의 중간 수준이다. 소득 불평등 정도 및 상대적 빈곤율 역시 매우 높아 OECD 국가 중 2, 3위를 달리고 있다. 국제노동기구(ILO) 국제노동협약 비준 개수도 OECD 국가 중 가장 적다.
국가의 경제적 규모에 비해 노동 관련 지표들이 좋지 않은 이유는 명백하다. 노동 및 고용 정책을 비롯해 넓은 의미의 사회 정책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 정부는 전통적으로 정부의 사회 정책을 최소화하고, 모든 것을 시장과 기업의 자율에 맡기는 것을 미덕으로 삼아왔다. 이러한 경향은 특히 부시 행정부 들어 더욱 심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운동이 잘 될 리 없다. 미국의 노동조합 조직률은 지속적으로 하락하여 2007년 기준으로 12.1% 수준이다. 이 역시 프랑스, 한국 등을 제외하고 OECD 국가 중 최하위이다.
무엇보다 미국은 노동자들이 자신의 정당을 가지지 못하고 있는 나라다. 메이데이의 기원이 미국인 것에서 보이듯, 한때 전투적 노동조합운동의 대명사였던 미국 노동운동은 "미국 민주당의 정책속으로 가라앉아" 버리고 말았고 결국 두 보수 정당 중 하나를 지지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 결과가 바로 오늘 유럽에 비해 매우 후진적인 미국의 노동 관련 제도나 사회보장제도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바마의 노동정책이 고용인 친화적이라 해보았자 사실 유럽의 다른 나라들에 비하면 매우 후진적이고 또 립서비스에 불과해 보이는 것도 많다. 그러나 이러한 오바마조차도 이명박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 시카고 정권인수위원회 사무실의 오바마 당선자. ⓒ로이터=뉴시스 |
그런 측면에서 제일 먼저 지적해야 할 것은 두 사람의 주요 선거 구호의 차이와 노동조합의 지지 여부다. 오바마 당선자는 선거 기간 내내 당선시 '고용인(노동자) 친화적(Employee-friendly)' 정책을 펴겠다고 공언하며 관련 공약을 제시했다. 이에 반해 이명박 대통령은 선거 기간 내내 당선시 '기업 친화적(Business-friendly)' 정책을 펴겠다고 공언하였고, 노동 정책과 관련된 공약은 거의 없었다. 단지 규제를 완화하겠다는 말만 되풀이했을 뿐이다.
노동조합의 지지 역시 차원이 달랐다. 오바마 당선자는 미국의 양대 노동조합인 미국노동총연맹-산업별조합회의(AFL-CIO)와 '승리를 위한 변화 연맹(CWF)'으로부터 물심양면의 전폭적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은 노동조합으로부터 외면당했다. 선거 시기 한국노총과 맺은 '정책 연대'를 내세울지 모르겠지만, 이는 단순한 해프닝이었을 뿐이다. 당시 얼토당토않은 정책 연대를 천명했지만 현재는 정부로부터 찬밥 대접을 받는 한국노총의 현 상태가 당시 정책 연대의 비현실성을 웅변한다.
물론 미국 노동조합은 전통적으로 민주당 후보를 지지한다. 민주당 후보가 상대적으로 공화당 후보에 비해 친노동자적 정책을 내세우기 때문이다. AFL-CIO는 오바마 지지를 공식화하며 오바마가 2% 부족하지만 그가 노동자와 그 가족을 위한 정책을 펼 것이기에 지지한다고 밝혔다. 이러한 지지는 오바마 당선자의 상원의원 활동을 종합한 결과에 근거한 것이다. 오바마 당선자는 상원의원 시절 상원에 계류된 대부분의 노동 관련 사안에 노동조합이 주장하는 쪽으로 표를 던졌다. 이러한 나름의 객관적 자료에 근거해 미국의 노동조합은 오바마 당선자에게 기대를 걸었다.
미국 노동조합은 오바마 당선자가 노동조합의 단결권과 쟁의권을 보호하여 노동조합의 조직률을 높이는 데 기여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더불어 최저임금 인상 등 저임금 노동자를 위한 정책을 펴나가며, 노동 관련 정부 기구를 개혁하고, 법을 어기는 사용자를 강하게 처벌하는 법제도와 문화를 만들 것이라고 기대한다.
특히 미국의 노동조합이 가장 많은 기대와 관심을 보이는 것은 노동자자유선택법(Employee Free Choice Act)의 도입이다. 2007년 초 민주당이 제출한 노동자자유선택법은 2007년 3월 1일 연방 하원을 통과하였으나, 상원에서 공화당의 표결 처리 반대로 부결된 바 있다. 노동조합은 오바마 당선자의 집권과 상원에서 민주당의 득세가 이 법을 처리하는데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 법은 근래 미국 노동운동 내에서 가장 많은 관심을 받은 법이다. 이 법은 연방노사관계위원회(NLRB)의 노조대표권 인증 선거 절차를 생략하여, 신생 노동조합의 탄생을 쉽게 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현행 제도에 의하면 노동조합이 노조 인증 및 사용자 교섭권을 가지기 위해서는 연방노사관계위원회가 주관하는 노조 지지 여부에 대한 비밀 투표를 통과해야만 했다. 그런데 새로 제출된 법은 노조가 50% 이상의 노동자로부터 지지 서명을 받았을 때, 이러한 선거 절차를 생략하도록 하고 있다.
이것은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월마트 등 미국의 기업이 무노조 정책을 유지할 수 있었던 배후에 이 법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 기업은 자신의 기업에 노조 설립 신청이 들어오면 이 '비밀 투표 인증 제도'를 악용해 신생 노조에 대한 지지율을 조작하는 수법을 써왔다. '비밀 투표'이니만큼 노동자들을 하나하나 설득하여 해당 노동조합에 대한 지지 투표를 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 법은 이 법을 어기고 부당 노동 행위를 한 사용자에 대한 처벌 수준을 높였다는 측면에서도 관심을 받고 있다. 미국 노동조합은 현재 미국의 노동조합 조직률이 정체 상태에 있는 주요한 이유 중 하나로 현행 법을 든다. 그러므로 이 법을 개정한 노동자자유선택법 제정은 미국 노동조합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다.
오바마 당선자는 노동안전 측면에서도 의미 있는 법 개정을 지지하고 있다. 이는 미국노동자보호법(Protecting America's Workers Act)이다. 이 법은 노동자 건강과 안전 수준을 개선하기 위한 전향적 내용을 담고 있다. 첫째, 이 법에 의해 보호를 받는 노동자의 범위를 넓혔다. 둘째, 자신의 사업장 안전 문제를 신고한 노동자를 보호하는 조치를 담고 있어 위험 신고가 두려움 없이 이루어지도록 했다. 셋째, 고의로 혹은 반복적으로 법을 어겨 노동자가 중대 재해를 입었을 경우 사업주를 엄하게 처벌하는 제도를 도입했다. 넷째, 사업주가 노동자에게 보호구를 지급해야 할 의무를 강화했다. 오바마 당선자는 이러한 법의 제정과 더불어 그간 예산이 삭감되어 제대로 된 관리, 감독이 어려웠던 직업안전보건청을 개혁하는 프로그램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정책은 노동자 안전이라는 측면에서 하위권에 있는 미국의 상황을 개선하는 데 일조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한편, 오바마 당선자는 미국에 산재해 있는 저임금 노동자를 위해 최저 임금 수준을 올리겠다는 공약도 했다. 현재 미국의 최저임금은 2009년까지 7.25달러로 인상되도록 계획되어 있는데 이를 2011년까지 9.50달러로 추가 인상하겠다는 것이다. 최저임금이 물가 인상과 연동되도록 하여 잦은 법 개정 없이도 최저 임금 상승이 가능한 체계를 만들겠다고 공약한 바도 있다. 법 개정 뿐 아니라, 노동부의 임금 및 노동시간 관련 부서를 강화하여 사업주의 법 준수 여부를 보다 확실히 감독하게 하겠다는 의지도 밝혔다. 법은 법대로 현실은 현실대로 따로 노는 것을 방치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상의 오바마 당선자의 노동 정책을 요약하면, 노동조합 단결권 및 교섭권의 강화, 최저 임금, 노동 시간 등 노동자의 노동 조건 개선, 작업장 내 노동자 및 노동조합의 권리 강화, 노동행정기관 강화를 통한 엄정한 법 집행 및 사업주 책임 강화가 큰 방향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이명박 대통령은 후보 시절에 아예 노동 관련 공약이 없었던 게 특징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후보 시절 경제 살리기를 위해 노동자들이 '양보'해야 한다는 언설만을 늘어놓았지 제대로 된 노동 정책을 한 번도 제시한 적이 없다. 이는 인수위원회 시절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인수위원회에 노동 관련 인력은 노동부 파견 공무원 1인뿐이었다. 정책이 없었던 반면 이데올로기적 공세는 요란했다. 노동조합을 한국 경제 발전의 걸림돌로 묘사하며 '무쟁의'와 '노사화합'을 외치는 전도사를 자처했다.
오바마 당선자와 이명박 대통령의 정책 및 발언 내용 중 노동 정책만큼 큰 차이를 보이는 것도 드물 것이다. 물론 '글로벌 스탠다드'를 기준으로 보았을 때 오바마 당선자의 구체적 노동 정책이 그리 진보적인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러한 정책조차 경제 위기 상황에서 제대로 추진할 수 있을지 의문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정책 방향을 '노동 친화적' 방향으로 잡았고, 구체적 정책을 제시했다. '비즈니스 프렌들리'한 정책과 무대책으로 일관한 이명박 대통령과는 차원이 다르다. 근시안적인 안목과 무시로 일관한 이명박 대통령의 노동 정책의 결과가 어떨지는 뻔하다. 고쳐서 쓰는 게 불가능해 보이면 갈아치우는 게 상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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