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와 희망'
미국이 선택한 오바마는 우리 정치권에 어떤 의미로 다가오고 있을까?
"보수가 탐욕스럽고 오만했고 자기 혁신에 실패했기 때문에 대선에서 졌다."
오바마의 승리보다는 매케인과 공화당의 패배에 초점을 맞춘 홍준표 한나라당 원내대표의 발언은 오바마가 한국의 보수세력에게는 1차적으로 패배의 충격으로 다가왔음을 보여준다. 이런 인식은 필연적으로 보수의 혁신에 대한 자성과 주문으로 이어지게 된다.
"오늘부터 한나라당은 정부와 긴밀히 협의해서 신보수로 거듭나는 보수대개혁 운동을 해야 할 것" 이라는 발언이 그렇다. 한나라당만이 아니다.
"미국 네오콘의 상징인 부시와 매케인은 이번 대선에서 혹독한 패배를 치렀다. 탐욕과 오만, 게으른 보수를 우리 국민이 다시 용납할 것인가. 한국의 보수주의는 다시 태어나야 한다."
'진보적 보수'를 표방한 선진코리아국민연합의 신문광고 내용이다.
미국 대선을 오바마와 민주당의 승리가 아니라 매케인과 공화당의 패배로 보고 이를 우리나라 보수 세력에 대한 경고로 재해석해내는 이런 류의 관전법은 자칫하면 오바마의 승리가 함축하고 있는 긍정적이고 역동적인 변화와 발전의 메시지를 놓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세력구도적 해석이 갖는 현실정치적 의미를 인정하는데 인색하고 싶지는 않다. 사실 이분법적 단순도식일수록 자파세력에게 주는 메시지는 더 강렬해지지 않겠는가.
이에 비하면, "정치에 때 묻지 않고 변화를 이뤄낸 인물이 선택된 것"(정몽준 의원), "조직을 확보한 유력 후보가 아니라 시대의 흐름을 담을 수 있는 세력과 사람이 부각되는 계기가 될 것"( 김문수 지사의 측근 ), "'여성'이라는 벽을 넘어야 하는 박 전 대표에게 흑인 대통령 당선은 긍정적 신호" (박근혜 의원의 측근)와 같은 오바마를 자신들의 선거 전략에 기계적으로 연동해 해석하는 말들은 공허하게 들린다.
비록 단순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치열한" 세력구도 프레임에 비해 계파적 프레임에 갇힌 채 오바마 효과에 손쉽게 편승하려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이 전체적으로 고심하는 분위기라면 분명 민주당은 크게 반기고 있을 것이다. 왜 안 그렇겠는가. 이념적 성향도 가까운데다 '변화'라는 슬로건까지 어떻게든 변화를 이끌어내야만 차기 대선에 대한 작은 희망이라도 가져볼 수 있는 민주당에게 오바마는 그야말로 안성맞춤의 역할모델이 아닐 수 없겠다.
"대선에서 이기려면 젊은 리더들을 키워야 한다. 40대들이 스스로 치고 나가야 한다."(민주당 50대 재선의원)
"오바마의 당선은 단순히 젊어서가 아니라 변화이슈를 선점하고 신뢰를 받았기 때문이다. 한국의 정치인도 미래 세력으로서 실력을 갖추고 일관된 가치로 신뢰를 얻도록 노력해야 한다."(추미애 의원)
"케네디 당선이 40대 기수론에 영향을 주었듯이 오바마의 당선은 새로운 세대의 권력이동을 만드는 계기가 될 것이다."(송영길 의원)
이런 흐름은 "2012년 선거에서 오바마에 버금가는 인재를 어떻게 만들어 다시 집권할 것인가에 지혜를 모아달라"는 정세균 대표의 발언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화려한 말의 성찬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의 담론들에서는 한나라당처럼 세력구도적 프레임도, 심지어 계파적 프레임도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일종의 정치적 미분화 상태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뭔가 좋은 일이 일어난 것은 분명한데 그것이 당이나 개별 대권주자들과 어떻게 연관되는지에 대해 분명한 입장정리가 안되어 있는 듯 보인다는 말이다.
세력 프레임과 계파 프레임 사이의 긴장도 보이지 않는다. 막연히 오바마에서 배우자고는 하나 핵심 고리가 세대인지, 사회적 소수자인지, 신주류인지, 이미지인지 정책인지조차가 분명하지 않고 오바마의 선거전략에 대해서도 인상기적 비평만 하고 있을 뿐이다. 같은 젊은 리더십론이지만 민주당 보다는 한나라당 40대 정치인들의 행보가 돋보이는 이유다.
"진정한 21세기를 열어갈 주역이 등장했다. 우리도 변화의 흐름에 앞장서는 젊은 리더십이 필요하다."(원희룡 의원)
"우리나라에서도 (오바마가 이끌) 새로운 세계 질서의 변화에 대한 국민적 기대감이 커질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걸맞는 리더십을 보여줘야 할 것이다." (남경필 의원)
이들은 한나라당 지도부가 공화당과 매케인의 패배에 주목한 것과 달리 오바마의 승리에 주목하고 있다는 점에서 당 지도부의 프레임과 다른 세력구도 프레임을 갖고 있다. 더 나아가 오바마가 만들어내고 있는 새로운 변화라는 흐름과 자신들의 정치적 전망을 일치시켜 가려 한다는 점에서 유·불리만 따지는 선발 대권주자들의 단순 계산법과는 다른 역동적 계산법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의 발언이 한나라당과 정치권에 일종의 정치적 긴장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도 이들의 발언에서 인상비평이나 수동적 방어기제가 아니라 나름대로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 가고자 하는 적극적 의지와 열정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한나라당 주류가 오바마를 계속 외면할 수 있을까? 민주당이 오바마 효과를 독점해 갈 수 있을까? 민주당과 '선택적 친화성'이 더 큰 오바마가 오히려 한나라당 개혁파에 의해 더 현실적이고 더 역동적으로 해석되고 있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민주당은 언제까지나 바라보고만 있을 것인가.
당 지지도 10%대의 바닥 박스권에 갇힌 지 어언 2년여, 아직도 무기력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더 할 수 없는 호재를 덧없이 흘려보내고 있는 민주당의 현실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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