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읽은 동화 중에 '벌거숭이 임금님'이 있다. 사기꾼에게 속은 임금이 벌거벗고 다니지만, 아무도 지적하지 않았다. 이 나라에서는 다들 눈을 뜨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장님과 다를 바 없었던 셈이다. 사기극은 한 어린아이의 솔직한 고백으로 막을 내렸다.
이 동화가 인상적인 이유는 결말 때문이다. 벌거숭이 임금님은 눈으로 본 것을 그대로 이야기한 아이를 처벌하지 않았다. 자신이 벌거숭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몹시 창피스러웠을 텐데도 그랬다.
그런데 동화는 역시 동화인가보다. 현실은 다르다. 눈으로 본 것을 그대로 이야기했다가는 정보기관의 사찰을 감수해야 한다.
"임금님이 벌거벗었다"고 외친 아이와 '미네르바', 차이는?
12일자 <매일경제신문>은 정보당국이 최근 온라인 경제논객 '미네르바'의 신원을 캤다고 전했다. 이 신문에 따르면, 정보당국은 미네르바에 대해 "나이는 50대 초반이고 증권사에 다녔고 또 해외에서 생활한 경험이 있는 남자"로 파악하고 있다.
잘 알려져 있듯, '미네르바'는 현 경제 상황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포털 사이트 '다음'에 있는 '아고라' 게시판에 종종 풀어 놓았다. '벌거숭이 임금님'을 본 아이가 "임금님이 벌거벗었다"라고 외친 것과 크게 다를 바 없다.
'미네르바'가 국가 기밀이라도 누설한 걸까? 그렇지 않다. 쉽게 구할 수 있는 통계와 언론 보도를 기초로, 논리적인 분석과 전망을 했을 뿐이다. 증권사 애널리스트들이 으레 하는 일이다. '미네르바'의 정체가 '50대 초반 전직 증권사 직원'이라는 보도가 나오자, 많은 누리꾼들이 "역시"하며 무릎을 치는 것도 그래서다.
"'막걸리 보안법' 시절로 돌아가려나"…'정확한 정보' 대신 '두려움' 푸는 정부
정보당국은 미네르바를 조사한 이유에 대해 "미네르바가 잘못된 자료를 근거로 정부 정책을 비판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그에게 정확한 통계 자료와 정부의 입장을 전해줄 필요가 있다고 판단해서 대강 누구인지는 알아 봤다"고 밝혔다고 한다.
"정확한 통계 자료와 정부의 입장"을 정보당국이 어떤 방식으로 미네르바에게 전했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미네르바는 지난 4일 공개적으로 '절필'을 선언했다. 임채진 검찰총장이 '경제위기 조장사범'에 대한 집중단속을 지시한 날이다. 정보당국의 조사가 이뤄졌으리라고 추정되는 시기와도 엇비슷하다.
그래서인지, 온라인 공간에는 온갖 스산한 이야기들이 떠돈다. '막걸리 보안법'이 있던 시절, 술자리에서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잡혀갔다는 것과 비슷한 내용이다.
온라인 공간에 '잘못된 자료'가 떠돈다면, '정확한 자료'를 공개하면 된다. 경제 관련 통계가 군사 기밀일 리도 없다. 하지만 정부가 온라인 공간에 풀어놓은 것은 '정확한 자료'가 아니라 공포였다. "글 한번 잘못 쓰면, 국정원에 불려가겠구나" 하는 두려움이다.
'무차별 사찰, 감청' 허용되면…"다음은 당신 차례"
마침, 한나라당 의원들이 국정원의 권한을 대폭 강화하는 내용의 법안을 국회에 내놓았다. 국정원이 사실상 국내 모든 분야에 대해 사찰할 수 있도록 규정한 국정원법 개정안, 휴대전화 감청설비 설치를 합법화하는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 등이다.
어이없이 붓을 꺾는 게 미네르바에서 끝나지 않으리라는 점을 예상할 수 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미네르바의 뒤를 이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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