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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메가박스 일본영화제, 미리 들여다보기

[Film Festival] 11월 13일 상영장 7편 리뷰

11월 12일부터 16일까지 열리는 메가박스 일본영화제의 상영작들은 1981년작에서 최신작까지 다양한 일본영화들을 통해 현재 일본의 모습을 반영한다. 프레시안은 매일매일 상영작들에 대해 프레시안무비 오동진 편집장이 쓴 리뷰를 전날 미리 게재한다. 13일(내일) 상영될 7편의 영화들의 리뷰를 모았다.
. 백팔~ 108 감독 모리 요시타카 주연 사이토 요시키, 나카무라 아오이 툭하면 신사에 올라 자신들의 야구인생이 잘 풀리기를 기원하는 고등학생 야구선수 마사토(사이토 요시키)와 노부(나카무라 아오이)는 어느 날 불교와 야구공의 오묘한 관계에 대해 얘기를 나눈다. 근데 그 대화가 재밌다. 노부가 마사토에게 얘기한다. 제야의 종이 108번 치는 거 알아? 108은 인간의 번뇌를 뜻하는 숫자래. 근데 야구공의 바늘땀 수도 108개잖아. 그러자 마사토는 아주 신기해 하며 아하 그렇다면 야구공의 바늘땀들도 하나하나 번뇌를 의미하는 거냐고 되묻는다. 그러자 노부는 곧바로 마사토를 실망시킨다. 야구는 미국에서 시작된 건데 걔네들이 바늘땀 수를 넣을 때 불교의 108 번뇌를 생각했겠느냐는 것이다. 그러자 마사토가 이렇게 얘기한다. "그것 참, 결론 한번 드라이하네."
백팔~ 108
두 꼬마, 아니 청소년 야구선수들이 나누는 대화엔 이 영화 <백팔~ 108>의 모든 것이 담겨져 있다. 언뜻 보면 참으로 특이해 보이는 것도 알고 보면 아주 단순한 해법들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세상사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것인데, 인생을 드라이하게 만들 것인지, 아니면 그 반대로 만들 것인지는 다들 자기 하기에 달렸다는 얘기다. 마사토와 노부는 주전 멤버에 들지 못해 노심초사다. 앞으로 자신들의 운명은 주전에 드느냐 마느냐, 벤치 후보선수 생활을 언제 벗어나느냐에 달려 있다고 그들은 생각한다. 늘 꽥꽥 소리만 지르는 감독도, 자신들을 골탕먹이고 바보 취급하는 선배 주전 선수들도, 심지어 고교야구를 취재하는 기자들까지 2등 인생은 살아갈 가치가 없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실제로 중요한 것은 1등과 2등 사이, 바로 그 지점에 놓여 있다. 2등이냐 1등이냐가 아니라 모두들 1등이 되기 위한 과정을 어떻게 치르느냐가 더욱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그때는 비록 1등을 하지 못하더라도 상관이 없다. 행복은 결코 성적순이 아니기 때문이다. 야구가 최고의 인기를 얻고 있는 일본에서는 수많은 야구영화들이 만들어져 왔다. 대부분 수많은 어려움을 뚫고 극적인 성공을 거두는 전형적인 얘기들인데 이 영화 <백팔~ 108>은 처음부터 발상을 뒤집고 간 영화다. 그래서 신선하다. 또 그래서 재미있다. 생각을 거꾸로 했다는 것은 이 영화가 주전선수들의 얘기를 그린 내용이 아니라는 얘기다. 시즌이 시작돼 끝날 때까지 허구헌날 벤치에서 대기만 해야 하는 후보 선수들이 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영화의 첫 장면을 보면 이들은 심지어 자청해서 관중석에 앉아 응원단보다 더 열심히 소리를 질러 대는 자원봉사 응원단 역할을 하기까지 한다. 그라운드가 아니라 관중석에 앉아있는 영화 속 야구선수들의 오프닝 장면은 이 영화가 우리가 아는 야구의 세계가 아닌, 또 다른 면을 보여줄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만든다. 고등학교 야구선수들이지만 자신이 처한 환경에 대한 고민의 폭과 깊이는 기성세대와 동급이기 십상이다. 다만 어리숙한 표정과 어투, 정리의 능력이 떨어질 뿐이다. 모자라면 모자라는 대로 청소년들이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조각해 내려는 모습은 귀엽고 대견해 보인다. <백팔~ 108>의 아이들이 한편으로는 안쓰러우면서도 믿음직스러워 보이는 건 그 때문이다. 우리가 치열한 경쟁사회를 뚫고 살아왔다고 아이들에게도 지나치게 똑같은 가치를 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미래의 청소년들은 앞줄에서만이 아니라 그 뒷줄과 하나 더 뒷줄에서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이 영화로 데뷔한 모리 요시타카 감독이 하고 싶은 말일 것이다. 실제 고등학교 야구부를 기용해 찍어서인지 중간중간 경기 모습은 실제를 보는 것 같다. 우리에게는 오랫동안 잊혀진, 고등학생들의 야구시합을 보는 맛도 꽤 쏠쏠하다. . 가을비의 일기 감독 사와이 신이치로 주연 와타리 테츠야, 요시나가 사유리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지만 나카사토 츠네코가 [가을비의 일기]를 발표했던 1997년은 와타나베 준이치의 [실락원]이 나왔던 해다. 1990년대 후반은 일본이 거품경제의 충격에 휩싸였던 때. 장기불황의 그늘이 사람들의 머리 위를 덮칠 때다. 사람들은 도피처가 필요했을까. 유독 사랑의 아픔, 실연과 죽음을 그린 초절정 신파 소설들이 이때의 일본 열도를 휘감았다. 특히 일본여성들은 소설 속 주인공들이 겪게되는 비련의 결말처럼 자신들도 같은 경험을 공유하고자 열망했다. 원 세상에. 어쨌든 [가을비의 일기]와 [실락원] 모두 그러한 사회상을 일정 정도 반영했던 작품이다. 사회가 어려울수록 탐미적 애정행각에 대한 욕망은 더욱 커지는 법이다.
가을비의 일기
이유야 어찌 됐든 두 연인이 뜨겁게 사랑하는 모습을 목격하는 것은 가슴을 설레게 만든다. 이럴 때 청춘남녀의 사랑은 오히려 진부해 보인다. 이미 인생을 어느 정도 경험한, 그래서 사랑의 열정 따위는 추억 속에 남겨뒀을 법한 나이의 남자와 여자가 사랑에 빠지는 모습이 역설적으로 더욱 섹시하고 뜨겁다. 나가사토 츠네코의 원작을, 조금 뒤늦은 감이 있지만, 1998년에 동명의 영화로 만든 이 작품은 바로 그 점을 보여 준다. <가을비의 일기>는 56세의 대기업 중역의 남자와 플로리스트로 홀로 살아가는 48살 중년여성의 순애보다. 순애보이긴 순애보인데 둘 사이는 불륜이다. 56세 남성 미부(와타리 테츠야)는 이미 장성한 아들을 두고 있는 건실한 가장이다. 그는 지금껏 앞만 보고 살아 왔지만 어느 날 우연히 만난 여성 타에(요시나가 사유리)를 만나면서 인생의 큰 전환점을 맞게 된다. 이 둘은 이미 20년 전 한 장례식장에서 우연히 만난 적이 있다. 타에는 그때 미부의 우산에 걸려 넘어질 뻔해 남자의 품에 안긴 적이 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더니! 이 초절정 신파의 우연함이란!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영화에서는 두 사람이 벌이는 닭살 애정극이 그리 촌스럽지도, 어색하지도, 밉지도 않다. 오히려 그게 참 그럴 듯해 보인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다. 미부와 타에 역을 맡은 두 배우 모두 실제로 50대와 40대를 넘어서 있으며 그래서 그런지 초로의 남자와 중년의 여자가 나누는 사랑의 욕정이 추하게 보이지 않고 진실되게 보인다. 사랑은 20대만 하는 것이 아닌 법이다. 40대와 50대도 사랑을 나누며 살지만 현실의 삶에서 살짝 감추고 있을 뿐이다. 새삼 그걸 목격하게 되는 경험은 생각보다 훨씬 아름답다는 것을 이 영화는 보여준다. 물론 둘 사이에서 거친 섹스의 숨소리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게다가 미부는 협심증이다.) 둘은 다소 퇴락해 가는 타에의 집 안방 다다미에 요를 나란히 깔고 마주하며 잠을 자는 정도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장면만으로도 보는 사람들의 몸이 덥혀져 온다. 사람이 사람을 욕망하는 것은 육체만으로가 아니라 마음으로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두 연인이 다니는 교토의 공간엔 늘 낙엽이 밟힌다. 그 풍광 안에 들어가 있는 두 사람은 세상과 꽤나 세상친화적으로 보인다. 둘의 불륜을 세상 사람들은 인정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세상의 다른 것들은 그렇지 않다는 점을 보여주려는 것일까. 누가 이들의 사랑에 돌을 던지겠는가. 사랑한다면 이들처럼. 혹은 죽어도 좋아! . 귀향 감독 하기우다 코지 주연 니시지마 히데토시
귀향
주인공 하루오(니시지마 히데토시)가 기차를 타고 고향으로 가는 장면으로 시작해 이틀간의 우여곡절 끝에 다시 기차를 타고 직장을 다니는 도쿄로 돌아가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 하기우다 코지 감독의 영화 <귀향>은, 일종의 정서적 로드무비다. 사람들은 길을 가고, 오는 과정을 통해 삶을 배운다. 그런데 그 길이 꼭 물리적인 길일 필요는 없다. 사람들은 누구나 마음 속에 자신만의 길을 안고 살아간다. 그것을 걸어가느냐 그러지 않느냐는 오로지 자신만이 선택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종종 길이 사람을 부를 때가 있다. 주인공 하루오가 원했든 원치 않았든 짧은 귀향길에서 또 다른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하루오가 갑자기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는 건 순전히 어머니 때문이다. 노년을 홀로 살아가던 어머니가 갑자기 연하의 남자와 결혼식을 올린다고 통보해 왔기 때문이다. 오랜만의 고향 방문. 피로연 후, 친구가 운영하는 한 선술집에서 한잔을 더하게 된 하루오는 8년 전에 만났던 옛애인 미유키(가타오카 레이코)와 갑작스럽게 재회하게 된다. 결혼과 함께 고향을 떠났던 미유키는 이혼 후 7살된 어린 딸 치하루를 데리고 돌아왔다. 그녀는 선술집 주방에서 파트 타임으로 일하며 살아가고 있다. 8년만의 욕정일까. 친구가 돌아간 후 따로 남게 된 술집에서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몸을 섞는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다. 미유키로부터 딸의 얼굴이 자신의 눈매를 닮았다는 얘기를 들은 하루오는 아이가 정말 자신의 자식일지도 모른다는 혼란에 빠지기 시작한다. 하루오와 미유키가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지도 모른다는, 그렇고 그런 연애담으로 빠지는 척하지만 영화는 관객들을 엉뚱한 방향으로 유도한다. 미유키는 딸아이를 놓고 사라지고 엄마를 찾는 아이와 함께 하루오는 아침부터 밤까지 고향 시내 이곳저곳을 헤매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이제 하루오 대 미유키에서 하루오 대 치하루의 관계맺음으로 펼쳐진다. 하루오는 미유키에게 다시 만나자마자 너를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는 말을 반복한다. 하지만 하루오의 그 말은 정말이었을까. 하루도 잊은 적이 없다면 갑작스럽게 등장한 딸아이의 존재가 왜 당황스러운 것일까. 하루오의 사랑은 대상에 대한 욕망에 불과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자, 그렇다면 사랑이란 정말 무엇일까. 사랑은 상대방의 모든 것을 책임지는 행동일까. 아니면 오히려 그 책임을 부채나 부담으로 생각하지 않는, 그럼으로써 상대방도 구속하지 않으려는 '뼛속깊이 자유로울 수 있는' 자유로운 영혼의 관계일까. 만 하루동안 아이와의 찰라적 여정을 통해 하루오는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사람은 사랑을 통해 성숙해지지만 한편으로는 성숙해지지 않으면 상대방을 진정으로 사랑하기가 쉽지 않은 법이다. 사람들은 대개가 사랑을 먼저 원할 뿐, 그 사랑을 위해 스스로 성숙해지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하기우다 코지 감독이 얘기하려는 것은 바로 그 대목이다. 사랑을 확인하고들 싶으신가. 그렇다면 먼저 자신이 사랑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 돼가고 있는지를 되돌아 볼 일이다. 그것 참, 사랑이란 쉬우면서도 어렵고 쓸쓸한 일이다. .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감독 오모리 카즈키 주연 고바야시 카오루 무라카미 하루키의 데뷔작을 동명의 영화로 만든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의주인공 '나'가 하루키의 젊은 시절 모습을 그대로 빼닮아 있는 것은 차라리 별로 신기하지가 않다. 하루키 영화를 만들었다면 최소한 그 정도는 해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이 영화는 영화를 만든 오모리 카즈키 감독이나 주인공 역의 고바야시 카오루의 것이라기보다는 하루키 스스로가 메가폰을 잡고 주연을 한 것처럼 느낀다. 영화는 매우 '하루키적'이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영화로 만드는 일은 쉽지 않은 작업이다. 그의 소설은 마치 하나의 긴 독백과 같은 것인데, 그 의식의 흐름을 따라잡기가 만만치가 않다. 하루키가 소설 속에서 만들어 내는 수많은 에피소드들은, 분명 하루키 본인이 경험한 일에 근거한 것일 텐데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비현실적이며 몽환적으로 느껴진다. 깊은 잠 속에서 만나는 꿈의 이야기를 영상으로 표현해 내는 일은 흰색의 캔버스에 비구상의 그림을 그리는 작업과도 같다. 그건 하나의 언어로 이해될 수 없다. 그리는 사람이나 그걸 보는 사람이나 각자의 관념대로 스스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낼 뿐이다. 1981년에 만들어진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꽤나 현대적이다. 하지만 영화적 표현의 기교란 늘 하루가 다르게 빠르게 발전하는 법이어서 이 작품의 기법들은 어쩔 수 없이 다소 낡아 보인다. 근데 그게 그래서 오히려 다분히 키치적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하고 심지어는 코믹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 영화의 줄거리를 몇 줄로 설명하기란 다소 난망한 노릇이다. 무엇보다 쓸데없는 노력이기도 하다. 재즈 바 'J's 바'를 드나드는 주인공 '나'는 다양한 인간군상을 만난다. 거기엔 영화를 만든다는 '쥐'도 있고 이상하면서도 자유분방한 성격의 여자도 있다. '나'는 그들과 때로는 지금 시점에서 얽히기도 하고, 또 때로는 과거의 이야기로 뒤섞이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주인공 '나'가 찾고 있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과연 '나'는 누구인가. 무엇이 되려 하는가. 근데 꼭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나'는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 근데 꼭 어디로 가야만 하는 것인가.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영화는 중간중간 짧은 사진 컷으로 대체되기도 하고 갑자기 대화의 오디오가 끊긴 채 자막으로만 보여주기도 하며 뉴스화면을 이어 가며 마치 다큐멘터리인 양 굴기도 한다. 급기야는 액자영화를 한편 던져놓고는 그 액자 속에 또 다른 액자를 만드는 식으로 종횡무진한다. 이야기는 이야기일 뿐 삶의 진실은 이야기 너머에 있다며, 영화는 그것을 각자 스스로 찾아 가라고 얘기한다. 이른바 전후 '로스트 제너레이션(lost generation)'의 대표격 작가로 불리는 하루키의 원작을 영화로 만든 만큼 영화는 온통 허무주의의 감성으로 채워져 있다. 그런데 그 상실감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비어 있는 것'일 수밖에 없는 탓에 영화는 무언가로 채워져 있되 텅 비어 있는 듯한 모순된 느낌을 준다. 하루키와 그의 얘기를 영화로 만든 오모리 카츠키의 의도는 분명하다. 짐짓 정돈돼 있는 듯 차분해 보이는 일본사회가 그 내면에서는 엄청난 의식의 혼돈과 분열증을 앓고 있으며 따라서 다분히 도착적인 자화상을 지니고 있음을 고백해 내는 일이다. 우리는 과연 어떤 일본사회를 원하는가. 진실이 무엇이든 다소곳하게 포장된 모습이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파격과 파열음이 느껴진다 해도 진실된 얼굴이기를 원하는가, 그건 언제나 그렇듯이 보는 사람들의 몫이다. . 빌딩과 동물원 감독 사이토 다카시 주연 고바야시 카츠야, 사카이 마키 사이토 다카시 감독의 2008년작 <빌딩과 동물원>은 제목에서 암시하듯 공간의 댓구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주인공 오무라(고바야시 카츠야)가 아르바이트 동료와 함께 일하고 있는 곳은 고층빌딩의 유리창 밖. 곤돌라를 타고 창문을 닦는 일이다. 오무라의 동료는 창문 안쪽, 회사원들이 일하는 사무실을 늘 동물원 구경하듯 낄낄거리며 즐거워한다. 결국 오무라가 사랑에 빠지는 여인 가코(사카이 마키)를 만나게 되는 것도 이 과정이다. 가코는 고공에 매달린 오무라와 눈이 마주치게 되고 오무라는 곧 이 연상의 여인에게 마음을 빼앗기게 된다. 오무라는 가코를 자신이 즐겨찾는 동물원으로 데리고 간다. 가코는 오무라처럼 울타리 밖(유리창 밖)에서 울타리 안(유리창 안)의 동물(자신)을 바라보게 된다. 가코에게는 그건, 새삼 새로운 경험으로 다가선다.
빌딩과 동물원
<빌딩과 동물원>의 외피는 30대의 여인과 이제 막 21살이 된 대학생 청년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얘기를 그린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영화의 초점은 대부분 여주인공 가코에게 쏠려있다. 그녀는 한 사무실 안에 있는 중년의 유부남과 불륜관계에 놓여 있으며 얼마 전 남몰래 중절수술을 받기까지 했다. 사무실 안의 일상은 지루하고 짜증나는 일 투성이다. 엄혹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녀는 자신이 '잘하는 것'이 무엇이고 실제로 '하고싶은 것'이 무엇인지, 그 구별의 의지조차 상실한지 오래다. 그녀의 일상은 죄다 '상실'의 의미로만 다가서 있는데, 그리워하는 고향집 어머니는 이미 세상을 뜬지 오래고 평생을 어부로 살아온 아버지에게서는 따뜻한 말 한마디는 기대조차 잊은 지 오래다. 불쑥 딸이 살고 있는 도시의 집으로 상경한 아버지는 앞뒤 가리지 않고 선을 봐 시집을 가라며 그녀를 다그칠 뿐이다. 가코는 불륜관계의 직장상사에게서도 사랑을 잃은 지 오래다. 직장 일에 대해서는 언제 열정이 있었던가 싶다. 그렇다면 가코는 결국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많은 도시인들의 상실의 정서를 대변하고 있는 셈이다. 가코는 오무라의 연정을 일순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이 진짜 사랑인지, 아니면 외로움 때문인지, 혹은 상실감에 대한 보상심리 때문인지는 분명치 않다. 이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어촌 고향집에 가코가 들르자, 아버지가 자신도 곧 어부 일을 그만둔다며 오랜만에 딸자식에게 저녁을 차려주려 할 때다. 남루한 주방에서 딸을 등진 채 이 생선, 저 생선을 뒤적이다 아버지는 눈물을 감추려 인상을 구기며 숨을 죽인다. 아버지의 등뒤에서 가만히 그를 바라보던 가코도 결국 숨죽여 흐느끼기 시작한다. 한마디의 대사없이 둘 사이를 오가는 카메라가 전하려는 것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외로움의 두께다. 사람들은 다 자기 나름의 아픔과 고통을 안고 산다. 누군가 그런 자신을 위로해 줄 수 있다고 믿지만 그건 늘 환상과 꿈에 불과하다. 어찌 됐든 사람들 모두 스스로의 고통과 외로움을 딛고 홀로서기를 해야 한다. 그 과정은 아프고 또 외롭지만 우리 모두 통과의례로 겪어야 할 일이다. 오무라와 가코의 사랑은 애당초 결실을 맺기 힘들다. 연상의 여인 취향이라며 이 영화를 선호할 젊은 남성관객들에게는 좀 안된 얘기다. 하지만 연애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를 사랑할 줄 아는 방법이다. 그래서 에히리 프롬이 그런 얘기를 했다. 사랑의 기술이라고. 영어로 얘기하면 아트 오브 러빙, 곧 사랑하기의 기술이다. 사랑도 트레이닝이 필요한 법이다. . 행복의 스위치 감독 야스다 마나 주연 우에노 주리, 혼죠 마나미 시골집에서 조그만 전파상을 운영하는 아버지는 이른바 '홍반장'이다. 마을구석구석 어디선가 누군가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나 문제를 해결해 주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도쿄에서 견습 일러스트레이터로 살아가는 레이(우에노 쥬리)에게 그런 아버지는 늘 애증과 부담의 대상이다. 그녀의 삶의 모토는 아버지처럼 살지 않는 것. 게다가 아버지는 레이의 재능을 한번도 제대로 인정해준 적도 없으며 늘 당신과 다른 삶을 살아가는 것 자체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반면에 일찍 세상을 뜬 엄마는 레이의 그림 그리는 재능을 아껴줬다. 레이가 아버지에게 표출하는 분노는 엄마에 대한 상실감의 또 다른 표현이다. 레이의 몸과 마음은 이미 간사이 지방의 고향마을을 등진지 오래. 그런 그녀에게 어느 날 언니 히토미가 위독하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레이는 급하게 귀향 길에 오른다.
행복의 스위치
야스다 미나 감독이 연출한 2006년작 <행복의 스위치>의 영어제목 'Switch to happiness'를 보다 정확하게 의역하면 일종의 '행복 버튼'이 될 것이다. 영화 속에서 레이는 결국 아버지와 함께 마을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전등을 갈아주고 냉장고나 오래된 TV를 고쳐주게 되는데 그 작업 공정의 마지막은 늘 스위치를 넣어서 시험해보는 것이다. 전기 기술자들이 느끼는 최고의 만족감은 그렇게 스위치를 켰을 때 불이 들어오거나 작동이 제대로 되는 순간이다. 야스다 미나 감독은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그런 순간 같은 것이라고 얘기한다. 행복은 X파일의 진실마냥 산 너머 저 멀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 늘 존재하지만 그것을 발견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우리들 스스로에게 달려있다는 것이다. 살다보면 별 것도 아닌 일을 가지고 마음 속의 행복 버튼을 잘 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늘 실패하는 사람들도 있다. 영화 속 레이는 후자인 경우다. 그녀는 처음엔 아예 그 버튼이 있는 것조차 알지 못한다. 레이가 고향 집에 머무는 잠깐의 기간 동안 스스로 성장해 가는 모습이 유쾌하다. 아빠의 전파상을 마치 자신들의 동호회 장소마냥 사용하는 동네 노인들은 장난꾸러기 귀염둥이의 모습이다. 툭하면 애프터 서비스를 요구하는 심술꾼 할머니도 사실은 그럴만한 사정이 있다. 결국 레이가 마을의 삶에서 깨닫는 이치는 단순하면서도 심오하다. 일단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레이는 특히 오랫동안 아버지의 외도를 의심해 왔으며 그 점을 한번도 툭 터놓고 얘기해 보지 못함으로써 오해와 불신의 벽을 쌓아왔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아버지의 불륜이 사실이었는지 아니었는지가 아니다. 일단 소통이 이루어지면 인식하지 못했던 많은 문제들이 자연스럽게 이해되는 수순으로 다가온다. 한국에서 꽤나 인기가 높은 우에노 주리는 이쁜 척하는 연기를 하지 않는다는 점, 의도적인지는 모르겠으나 매우 평범한 캐릭터를 척척 소화해 낸다는 점에서 스스로가 단순한 아이돌 스타가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입증해냈다. '일본영화의 새로운 힘' 부문으로 상영되지만 새롭다는 걸 파격적인 무엇으로 기대하지는 않는 것이 좋다. 평범한 일상 속의 행복찾기가 이 영화의 주제다. 그런 점에서 역설적으로 '새로운 힘'이 느껴질 수도 있겠다. 그거야 엄연히 보는 사람의 맘이다. . 카페 이소베 감독 요시다 케이스케 주연 미야사코 히로유키 <카페 이소베>로 제목이 붙어 있지만 이 영화의 진짜 제목은 <동네 다방 이소베>가 더 어울려 보인다. 실제로 영화 속 아버지 이소베가 개업한 찻집은 자전거를 타고 다닐 만큼 가까운 동네 어귀에 있다. 규모도 작고 인테리어도 변변치 않다. 지역적인 문제나 공간의 문제만은 아니다. 이소베의 찻집 혹은 카페, 아니 다방에 모이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2류 인생이거나 사회의 변방을 맴돌고 살아가는 주변부 인생들이다. 이들에게선 패기나 희망 같은 건 당최 찾아보기 힘들다. 그저 하루하루를 대충대충 때우며 살아갈 뿐인데 설상가상으로 아예 정신줄 한두 줄은 놓고 살아가는 듯한 사람들까지, '카페 이소베'의 인물들은 대책이 별로 없다.
카페 이소베
그렇다고 주변부 인생들은 필요없는 존재들인가. 곰곰히 따져보면 현대사회는 온통 8:2의 구성으로 돼있는데(이른바 파레토의 법칙이 적용되고 있어서) 전체 인구의 20%가 전체 부의 80%를 차지하고 있거나 혹은 거꾸로 전체 인구의 80%가 전체 부의 20%만을 소유하고 있을 뿐이다. 지지리도 못나고, 남루하며, 도통 쓸모없는 존재들처럼 보이지만 80%라는 수치는 실상 우리의 시선이 보다 어느 쪽에 더 가깝게 쏠려 있어야 하는 것인가를 보여준다. 요시다 케이스케 감독의 두 번째 작품으로 알려진 이 영화가 기본적으로 시선이 좋다, 라고 느껴지는 건 그 때문이다. 영화는, 못난 사람들에 대해 하향식의 애정과 관심을 보이려 하기보다는 스스럼없이 자세를 낮추고 동일한 눈높이를 만들어 내려 애쓴다. 이소베의 카페는 어쨌든 늘, 요지경이다. 허구헌날 고향이 어디냐고 묻는 초로의 남자에서부터 여종업원 모토코(야소 쿠미코)의 몸을 만지려는 더듬수 놈팽이에다 뿔테 안경을 쓰고 고등학생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소설을 쓰고 있다는 사기꾼 작가에 이르기까지, 이소베 카페는 참으로 한심한 인간들의 집합체다. 그런데 바로 그런 인물들이 이 영화에서는 역설적으로 돋보인다. 올바른 시선을 지니고 있는 영화답게 중심인물만큼 주변 캐릭터에도 세심한 배려의 흔적이 느껴진다. 이 영화의 보는 감칠맛은, 그렇게 할일없이 빈둥대는 카페의 손님들 개개인의 에피소드에서 찾아진다. 이 영화의 화자는 아버지를 도와 카페를 운영하는 까칠한 성격의 고등학생 딸 사키코(나카 리이사)다. 아버지는 일보다는 백수로 지내기를 꿈꾸는 전형적인 '루저(loser)'인데 처음에 그는 오로지 부친이 남기고 가는 유산에만 관심이 쏠려있는 인물로 나온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딸에게 딱 한마디로 말하고 태연스레 바깥사람과 통화를 한다. 아버지는 딸에게 이렇게 얘기한다. "네 할아버지가 죽었어." 그는 아버지의 유산을 털어 카페를 차린다. 만났다 하면 아웅다웅대는 부녀에다 아르바이트를 하겠다며 카페를 찾아왔다가 아빠와 묘한 관계에 빠져드는 여종업원 모토코가 얽힌다. 이 여자의 문제는 스스로로 인정했듯이 색정광에 빠져 있어서 이 남자, 저 남자에게 도통 '거절을 못한다'는 데에 있다. 하지만 결국 아버지와의 '썸딩'은 사키코의 철저한 감시 탓에 성공하지 못하게 된다. <카페 이소베>는 할리우드의 전형적인 가족 소동극의 형태를 따라가면서도 일본사회의 해체된 가정의 문제를 우회적으로 걱정하는 빛이 역력한 영화다. 결국 일본사회가 우선해서 복원해야 하는 것은 바로 가족의 가치라는 것이다. 성격이 비뚤어진 듯해 보여도 결국 사키코가 못난 아버지를 받아들이는 것은 그가 바로 가족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아무리 3류 인생을 살더라도 내 아버지인 것이다. 어쩌면 지금의 신세대에게 일본의 기성세대들이 부탁하고 싶은 얘기일 것이다. 아버지 세대와는 바로 그런 식으로 서로 이해하고 화해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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