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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낯설지 않은 곳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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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낯설지 않은 곳이 없다"

[철학자의 서재] <페르세폴리스>

아이들 덕분에

내 책장 절반은 그림책과 동화책이 차지하고 있다. 만화책이 차지하는 자리도 제법 되는데, 책장 모양새가 이리 된 것은 아이들 덕분이다. 나는 어린 아이들과 책을 보고 이야기 나누는 일을 해왔다, 지난해까지는. 그 꼬마들이 자라서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됐다. 중·고등학생이 된 아이들과는 제법 묵직한 책을 보며 함께 세상을 논하기도 했다.

자식 나이와 상관없이, 요즘 애들은 만화책만 붙든다고 많은 부모가 걱정하곤 했다. 내 아이가 책을 읽길 간절히 바라지만 만화책은 안 된다. 내 어린 시절을 돌아봐도 충분히 이해는 된다. 누가 심어준 건지는 몰라도 '만화책은 저속하고 유치하니 그걸 읽는 건 부끄러운 일'이라는 논리가 내 과거 한 칸에도 떡하니 있다. '깊고 아름다운 심성을 기르려면 책을 봐야지 만화책은 안 된다.'

나이가 들면서 이런 논리가 다채로운 우리 삶의 가지를 얼마나 무참히 잘라내는지를 조금은 배웠다. 걱정을 털어놓는 부모들과 마주앉아, 아이가 어떤 삶을 살기를 원하는지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로 가는 데는 우리도 다 가늠할 수 없이 많은 길이 있는 게 분명하며 만화책도 얼마든지 아이에게 길을 내줄 수 있을 거라고도 말했다.

내 얘기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수도 있기에, 프랑스 작가 다니엘 페나크(Daniel Pennac)가 한 말을 덧붙이기도 했다. 다니엘 페나크는 아이가 책 읽기를 원한다면 먼저 이런 독서 권리를 허용하라고 주장한다. '건너뛰며 읽을 권리, 끝까지 다 읽지 않을 권리, 다시 읽을 권리, 아무 데서나 읽을 권리, 소리 내서 읽을 권리, 읽고 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권리' 같은 것들. 그리고 심지어 '아무 책이나 읽을 권리, 책을 읽지 않을 권리!' 아이들이 책을 붙들게 해야 하는 내 의무와는 모순되게도 '책을 읽지 않을 권리'를 얘기할 때는 늘 내가 먼저 신이 났다.

하지만 부모들에게 얘기하고 돌아와서는 내심 좀 바빠졌다. 좋은 만화책이 있다는 걸 (이렇게 말하려니 조심스럽다. 다니엘 페나크가 "저런, 쯧쯧." 혀를 차며 나를 걱정스레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 스스로 입증해야 했으니까. 조금 뒤지기 시작하니까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만화책에 빠진 아이들과 부모 걱정 덕분에 나는 여기저기 숨어 있던 좋은 만화책을 참 많이 봤다. <페르세폴리스>(전2권, 마르잔 사트라피 지음, 김대중·최주현 옮김, 새만화책 펴냄)도 그렇게 만났다.

파란 많은 역사 한 자락에 마르잔이 있다
▲ <페르세폴리스>(전2권, 마르잔 사트라피 지음, 김대중·최주현 옮김, 새만화책 펴냄). ⓒ프레시안

<페르세폴리스>는 이란 출신 마르잔 사트라피가 197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자신이 겪은 삶을 그리고 쓴 자전적인 이야기다. 여느 소설 못지않은 분량과 깊이를 지녀서 이런 책을 '그림 소설(graphic novel)'이라고도 하는 모양이다. 확실히 몇 장면은 그림만으로도 우리 문학적 감성을 아주 섬세하게 자극해서 놀라게 된다.

첫 책에서 우리는 마르잔이 꼬맹이에서 14살 소녀가 되기까지 이란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그 안에서 그녀는 무얼 겪고 무슨 생각을 하며 자랐는지를 보게 된다. 두 번째 책에선 이란을 떠나 유럽에서 낯선 문화에 부대끼며 성장통을 겪다가 다시 이란으로 돌아와 20대로 접어드는 마르잔을 만난다.

그렇다, 마르잔이 건네는 이야기는 한 사람의 삶이 사회와 역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또 하나의 증거다. 1979년, 마르잔이 아홉 살 때 이란에서는 왕정이 끝나고 '이슬람 혁명'이라는 이름 아래 공화국이 들어선다. 근대로 가는 큰 변화가 있던 걸로만 치면 '혁명'이라 부를 만도 하지만, 변화 흐름을 보면 '이슬람 근본주의'에 주도권을 빼앗긴 그야말로 '반혁명'.

여자들은 안 쓰던 헤자브를 다시 써야 하고, 혁명 수호대는 거리를 누비며 이슬람 율법에 조금이라도 어긋난다 싶은 사람이면 누구나 가두고 처벌하려 든다. 정치적으로는 민주화를 원하던 사회 운동가들을 가차 없이 처형하던 시기기도 하다. 이란 내부 변화만으로도 혼란스럽던 1980년, 이라크 침공으로 전쟁이 일어난다. 이런 시간, 공간에 마르잔이 있다.

마르잔 부모는 자기 딸이 '가까이서 힘든 것보다는 멀리서 행복한' 쪽을 선택해, 14살 어린 마르잔을 유럽으로 보낸다. 전쟁, 비민주적인 사회 분위기, 억압적인 교육 환경에서 자유로운 곳. 하지만 부모 기대대로 마르잔이 좋은 것들만 마주하기에는 너무 다르고 낯선 땅이기도 하다. 방황과 적응 사이를 오가던 마르잔은 실연의 아픔을 겪고 오스트리아 거리를 떠도는 밑바닥 삶까지 내려간 뒤 다시 이란으로 돌아간다.

이야기 줄기를 잡고 보니 꽤 무거운 느낌이다. 이슬람 혁명이 진행되는 과정을 볼 때는 1980년 서울의 봄과 광주가 그대로 떠오르는데 그러고 보니 시기도 우리와 비슷하다. 어릴 때 세계사를 보면서, 하는 행동이나 벌이는 일이 비슷하고 그걸 처리하는 과정도 아주 닮은 사람들이 많아서 놀라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 멀리, 다른 시간에 살면서 똑같은 욕심을 품고 똑같이 행동하는 사람들이 어쩌면 이리도 많을까?

그렇게 어렴풋이 '보편성'이란 말이 내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던 것 같다. 내 젊은 시절 우리나라와 마르잔이 자라던 이란은 비슷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이익이 되는 곳이면 어디나 끼어들고 조작하는 제국주의자들, 권력을 쥐기 위해서라면 모든 걸 기꺼이 배반할 준비가 돼 있는 독재자, 좌절하고 때로 소리도 없이 죽어가면서 끝끝내 이어지는 진보를 향한 사람들의 열망과 싸움 같은 것.

마르잔과 주변 사람들을 만나는 즐거움이 있다

책의 큰 흐름을 보면 무겁고 칙칙한 듯해도 실제로는 책을 읽는 동안 자주 웃게 된다. 때로는 코끝이 자극받는 걸로 시작해서 마음 어딘가가 촉촉해지는 느낌. 역사와 정치같이 큰 이야기는 마르잔과 주변 사람들 삶에서 자연스레 스며 나오다. 그 가운데 우리가 더 많이 만나는 건 바로 구체적인 사람들이다. 나와 직접 관계가 없더라도 '이 세상에 같이 살고 있다니 참 좋다'는 느낌을 주는 사람이 있다. 아이건 어른이건 이런 사람을 만나거나 알게 되면 반가운 소식을 마주한 듯 즐거워진다. 마르잔과 주변 사람들을 만날 때도 그런 느낌을 선사받는다.

누구보다도 마르잔 부모와 할머니는 쉬지 않고 그녀 삶에 뛰어 들어와 깊은 영향을 미치는데 그들이 참 아름답다. 건강한 의식과 열린 마음으로 자식과 세상을 대하는 마르잔 부모, 자존심과 재치와 지혜가 삶에 배어 있는 할머니를 보고 있노라면 아이들이 자라는 데 가장 섬세하고 효과적인 교육 자료는 바로 곁에 있는 사람(어른)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마르잔 부모는 잠시 터키로 여행을 가면서 마르잔에게 원하는 선물을 물어본다. 이란에서는 구하기 힘든 외국 가수 포스터 두 장. 여행지에 도착하자마자 딸이 원하는 포스터부터 구했지만 워낙 커서 까다로운 이란 세관을 무사히 통과하기 어려울 것 같다. 궁리 끝에 아빠 코트 등판의 안감을 다 뜯어내고 거기에 포스터를 잘 펴서 넣은 뒤 다시 꿰맨다. 커다란 포스터가 조금도 구겨지지 않은 채 아빠 코트에서 나올 때 마르잔의 기쁨이란! 이런 부모다. 원하는 대로 다 들어주는 부모가 아니라 아이가 원하고 생각하는 작은 것도 함께 소중히 여기는 어른.

마르잔 할머니는 매일 아침, 자스민 꽃을 따서 속옷에 넣는데 덕분에 늘 향기로운 여인이다. 그런데 그녀 인품에서 흘러나오는 향기는 더 그윽하고 깊다. 유럽으로 떠나는 마르잔에게 할머니는 이야기한다. 앞으로 많은 남자들을 만날 텐데 상처를 주는 남자가 있다면 그가 어리석기 때문이라 생각하라고.

"그렇게 생각하면 네가 남자들의 잔인함에 대응하려는 걸 막을 수 있을 거야. 상대를 비꼬고 복수하는 것만큼 나쁜 건 없으니까".

움베르토 에코가 말했던가, 인류가 가장 공평하게 나눠가진 천성이 있다면 그건 바로 '어리석음'일지 모른다고. 그는 어리석음에 맞닥뜨렸을 때 어리석지 않게 대처하는 길을 웃음과 관련해서 찾았던 것 같다

에코의 말도 마르잔 할머니 말도 내겐 쉽지 않다. 그런데 할머니 이야기를 들으며 에코가 생각났고 할머니와 에코가 만나면 이야기 상대가 되겠다는 생각과 함께 웃음이 나왔다. 둘이 만난다면 꼭 옆에 껴서 이야기를 듣고 제대로 이해하고 싶다는 엉뚱한 바람까지 들었다. 사람들을 만날 때, 남자를 만날 때 내 진지함이 갖는 위험성에 대해서는 오래 생각하게 된다. 그러고도 할머니는 나로선 쉬이 넘어갈 수 없는 말씀을 또 이어간다.

"언제나 네 존엄성을 잃지 말고 자기 자신에게 진실해라."
▲ <페르세폴리스>는 이란 출신 마르잔 사트라피가 197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자신이 겪은 삶을 그리고 쓴 자전적인 이야기다. ⓒ프레시안

자기 자신과 마주하는 법, 다른 사람과 관계하는 길을 배워가는 시절에 이런 지혜로운 생각을 들려주는 어른이 곁에 있다는 건 크나큰 축복이다. 그래서 <페르세폴리스> 이후 마르잔의 삶이 궁금하기는 해도 걱정은 안 된다. 그리고 나쁜 예를 통해서도 보편을 보지만 아름답고 훌륭한 사례가 됨직한 마르잔 가족을 통해서도 보편을 확인하게 된다.

격동하는 역사로 들어서기 몇 해 전, 태풍의 눈처럼 고요한 어린 시절의 마르잔을 만나는 즐거움도 크다. 여섯 살 마르잔은 예수나 마호메트의 뒤를 이은 '마지막 선지자'가 되는 게 꿈이다. 부처도 생로병사의 고통을 보고 출가를 결심하지 않았던가. 어린 마르잔도 그녀 눈이 미치는 세상 곳곳에서 고통과 차별을 본다. 이를테면 함께 식사하지 못하는 가정부, 남들과는 다르게 커다란 케딜락을 타고 다니는 아빠. 그리고 오랫동안 무릎 아픈 할머니도 신경이 쓰인다. 이런 고통을 해결하는 선지자가 되기 위해 마르잔은 자기만의 경전을 만든다.

"모든 사람이 차를 가져야 한다. 모든 가정부는 주인과 한 상에서 식사해야 한다. 어떤 노인도 아파서는 안 된다."

아이와 있다 보면 이 비슷한 아이 세계를 만나게 마련인데 그럴 땐 누구든 행복하게 웃으리라. 경험에 따르면 아이들은 생각과 행동 사이가 그리 멀지 않다. 아이들과 오래 지내다 보니 세상이 왜 아이들 뜻대로 바뀌면 안 되는지 이해하기 힘들 때도 있다.

페르세폴리스에서 모두를 만나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페르세폴리스'는 옛 이란, 페르시아 제국의 거대한 왕궁 도시다. 마르잔 사트라피는 자기 나라의 뿌리를 제목으로 내놓으며 이란에 대한 사랑과 자긍심을 강하게 보여준다. 심지어 책을 쓰는 첫머리를 이렇게 시작한다. "기원 후 두 번째 밀레니엄을 맞이하며 엘람 왕국은 바빌론 주변의 문명을 발전시켜가고 있다." 그녀는 우리 호기심을 자극하여 세계사를 뒤지게 만든다. 페르시아를 더 거슬러 올라가면 엘람 왕국에 이른다.

"이 오래되고 거대한 문명을 광신적인 근본주의와 테러 등에 관련지어서만" 이해하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마르잔은 이란은 그런 곳이 아니라고 손사래를 쳤고 결국은 <페르세폴리스>를 쓰게 됐다. 그녀는 확실히 성공했다. 우리는 그동안 갖고 있던 오해와 무지의 베일을 걷고 이란이라는 나라, 그리고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생생하게 만난다. 그런데 '페르세폴리스'라는 제목에는 그녀가 살아온 여정이 남긴 복합적인 감정이 서려 있다는 느낌이 든다.

"새로운 문화에 들어가 적응하고 자신을 그 사회에 통합시키고자 한다면 우선 자신의 본래 문화는 잊어야 한다. 만약 당신이 다른 문화가 자신의 안으로 들어오길 원한다면 그건 우선 갖고 있던 것을 내보내야 한다는 것이며, 그러고 나서 그 둘로부터 원하는 것들을 선택하고 그걸 다시 삼켜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그 순간 모든 것을 정체성의 혼란 속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다. 더 이상 자신이 누군지 모르게 된다. (…) 그게 어딘가를 떠났다 돌아왔을 때의 문제다."

역사에서 최초의 세계 제국이랄 수 있는 페르시아는 정복민에 대한 정책이 아주 너그러웠다. 페르시아 울타리에 들어간 민족들은 자기 민족의 고유한 종교와 풍습을 그대로 지키고 가꿀 수 있었다. 포용 정책은 다채롭고 풍요로운 문화로 이어졌다. 페르세폴리스 왕궁 건축과 조각에는 그들이 정복한 민족들의 뛰어난 기술과 솜씨가 한 데 어우러져 있다고 한다. 궁전 입구에는 사람 얼굴을 하고 날개를 단 황소로 조각된 거대한 문이 있는데 페르시아 제국 모든 민족이 자유로이 드나들었던 '만국의 문'이다.

마르잔은 다른 나라에서 청소년기를 보냈고 지금도 자기 나라를 자유롭게 오갈 수 없다. 그녀가 나라를 떠났다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더 이상 '그리운 고향'은 없었다. 떠나고 돌아오는 삶이 지니고 있을 '기대와 두려움, 낯섬과 적응, 외로움, 고단함, 패배와 극복' 같은 것들이 그녀 삶에도 매달려 있다. 이제 그녀는 낯선 땅으로 되돌아가 산다.

"난 이란에서 외국인이다. 더 이상 위험을 무릅쓰고 내 나라에 돌아가기 어려워졌지만 한편으로 세상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다는 것 또한 좋다. 그리고 동시에 힘들기도 하다."

나는 지난 몇 달 동안 서울을 떠나 지방에서 지냈다. 컴퓨터도 안 쓰고 TV도 없는데다가 게으른 내 천성까지 겹쳐서, 수입 쇠고기 반대 촛불 집회로 매일 밤 나라가 붉게 타오를 때도 한동안은 전혀 몰랐다. 그래서 지금 나는 이 책을 정확히 말하기에 적절한 사람은 아니다. 이 책 서평 제목은 객관성이 많이 떨어지고 심지어 엉뚱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내가 선 자리에서 보이는 게 그렇다. 책을 직접 읽어서 내가 드리운 오해의 베일을 걷는 것도 재미있겠다.

마르잔 경험에 견줄 수야 없지만 떠나고 돌아오는 일, 길 위에 있는 우리 삶에 대해 생각한다. '세상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다'는 말의 무게를 생각한다. 때로 낯설지 않은 곳은 어디에도 없다는 생각도 든다. 마르잔은 어디서도 이방인이기에 옛 페르세폴리스가 더 그리운 걸지도 모르겠다. 서로 다른 많은 민족과 사람들이 한 데 모여 살면서도 자기 빛깔을 살리며 풍성하게 어우러져 살던 곳. 누가 어디서 살든, 세상이 그런 곳이기만 하다면.
마르잔 사트라피(Marjane Satrapi)는?

이란 수도 테헤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4살에 오스트리아로 가서 프랑스계 학교에서 몇 년 지내다가 다시 제 나라로 돌아갔다. 대학에서 일러스트레이션을 공부하며 결혼도 하지만 결국은 남편과 헤어지고 지금은 프랑스에서 신문과 잡지에 일러스트를 기고하거나 만화 작업을 하며 살고 있다. 만화책 <페르세폴리스(Persepolis)>를 각색해서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는데 원작 느낌이 아주 잘 살아 있는 훌륭한 작품이라는 찬사를 받는다. 책과 애니메이션 어느 쪽을 봐도 마르잔 사트라피가 전하려는 이야기와 느낌을 충분히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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