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정부와 정책협약을 체결한 한국노총의 얘기가 아니었다. 정권 출범도 전부터 "전면전"을 얘기하며 대립하다 유례없이 위원장이 장기간 수배 생활을 하고 있는 민주노총(위원장 이석행)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심지어 "임금 동결 결단도 가능하다"는 말까지 나왔다. 정갑득 금속노조 위원장은 3일 서울 종로구 청운동 동사무소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우리가 결단 해 경제를 살릴 수만 있다면 (결단)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다만, '조건'이 있었다. '정부가 먼저 잘 해야 한다'는 것이 그 조건의 요지다.
구체적으로 민주노총은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을 비롯한 "내각 총사퇴"를 얘기했다. "전세계적 흐름과 정면으로 어긋나는 부자 중심의 경제 정책를 무리하게 추진하면서 경제와 민생을 파탄으로 몰아넣은 책임을 지라"는 것이다. 이는 또한 "무리한 신자유주의 정책의 폐기" 요구와도 같다.
또 민주노총은 "'돈 놀이'에 미쳐 경제를 거덜지경으로 몰고 간 자본에게 그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했다. "민생 살리기를 위한 사회공익기금을 헌납하라"고 따지고 들었다. 정갑득 위원장은 "위기 상황에 대해 제대로 정부의 역할은 하지도 못하면서 우리 노동자에게만 희생을 강요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민주노총은 이명박 대통령과의 면담을 요구했다. 이 대통령과 민주노총의 만남은 당선인 시절 인수위 측이 일방적으로 약속을 파기해 하루 전날 무산된 바 있다. 민주노총은 또 '경제 위기 극복을 위한 노사정 TV 공개토론'도 제안했다.
대화 제안하면서도 "기만적인 사회적 대타협은 안 된다"
민주노총의 이 같은 주장은 현재의 경제 위기 속에서 국내 양대 노총 가운데 하나로서 책임 있는 모습을 보이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풀이된다.
특히 인수위 시절 간담회 무산 이후 "만날 필요조차 없다"던 이 대통령과의 면담을 먼저 요구한 것도 눈에 띈다. 비록 조건이 달려있고 오는 9일 대정부 투쟁의 일환으로 전국노동자대회를 열 예정이긴 하지만, 현 정부 출범 이후 일관됐던 투쟁 노선에서 대화와의 병행으로 무게 중심을 옮겨가는 것 아니냐는 추측이 나온다.
하지만 민주노총은 "기만적인 '사회적 대타협'은 절대 안 된다"고 못 박았다. 이는 "정부가 또 다시 경제 실정을 모면하면서 국민에게 모든 고통을 전담시키기 위한 술책"이라는 것이다.
또 홍준표 한나라당 원내대표가 제안한 바 있는 '노사정 대타협'에도 고개를 저었다. 우문숙 대변인은 "기존의 노사정위원회와 같은 형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민주노총의 대화의 손짓, 메아리 없이 흩어지나?
정갑득 위원장은 이날 "만일 정부가 한 쪽(노동계)을 짓밟고 현 경제 위기를 극복해보려 한다면 우리도 저항 뿐 선택지가 없다"고 말했다.
민주노총의 '대화의 손짓'이 메아리 없이 공중 분해될 가능성은 바로 이 지점에 존재한다. 우문숙 대변인은 "정부가 노동계를 파트너로 인정하고 함께 위기를 극복해나가자는 진솔한 의지를 먼저 보여줘야 한다"고 강조했지만, 정부는 당장 이날도 민주노총의 요구를 외면했다.
이날 정부가 내놓은 '경제난국 극복 종합대책'에는 비정규직법의 조속한 개정을 통해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에 따른 중소기업의 부담을 완화하겠다는 방침이 담겼다. 이는 이영희 노동부 장관 등이 수차례 언급한 바 있는 비정규직 사용 기간 연장을 의미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비정규직을 사용할 수 있는 사유를 제한하자"는 등의 현 정부와 180도 다른 해법을 제시하고 있는 민주노총의 입장에 대해서는 일말의 고려도 없었다. 이영희 장관에 대해 양대 노총이 최근 유례 없이 한 목소리로 비난하고 있는 것도 관계 없다는 태도였다.
"정권과 자본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사용해 온 '책임 전가', '고통 전가' 수법은 절대 안 된다"며 정부를 상대로 '함께' 위기를 극복하자고 요구하는 민주노총의 외침이 공허하게 들리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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