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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또 결혼하는 세상... 그런데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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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또 결혼하는 세상... 그런데 왜?

[이슈인시네마] 소설 vs. 영화, <아내가 결혼했다> 리뷰

박현욱의 원작소설 [아내가 결혼했다]를 읽은 건, 영화 판권을 산 이가 (다른 사람에겐 말하지 말라며) 책을 던져주었을 때였다. 소설이 영화화될 거란 사실을 누구보다 빨리 안 축에 속하는 편이다. 소설을 다 읽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과연 이걸 어떻게 각색한단 말인가. 아무리 유럽축구가 인기를 끌고있고 여성 축구팬이 늘었다고는 하지만 유럽축구 얘기가 반에, 여주인공의 선택을 설득하기 위해 소설 곳곳에 일부일처제의 부당함과 함께 '다자 간 비독점적 연애' 즉 '폴리아모리'에 대해 인류학적 설명들이 붙어있는데, 이걸 영화에서 대사로 설명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손예진과 김주혁이 캐스팅됐다는 소식이 공식 보도됐을 때조차 나는 이 영화가 과연 어떤 모양새를 띄게 될지 전혀 감을 잡지 못했다.
소설 [아내가 결혼했다]
사실 소설을 읽고나서도 여주인공 인아에게 전혀 설득당하지 못했다. 폴리아모리에 대해서가 아니다. 남자주인공 덕훈은 여주인공 인아의 선택에 소심하게 반항하기 위해 되도록 집안을 어질러두고, 주말마다 서울에 올라오는 인아는 군말없이 완벽하게 청소와 정리정돈을 한 후 일주일간 덕훈이 먹을 반찬까지 완벽하게 해두고 다시 내려간다. 이 세상에는 한집 살림도 힘들어 허덕대는 여성들이 널렸고, 내 경우는 겨우 혼자 사는 살림도 제대로 못 해서 자취방을 난장판으로 만들어놓고 다니기 일쑤인데, 그녀는 자신의 일에서도 인정받는 능력있는 여성인 데다 섹스도 잘 하고 가사노동에도 탁월한 실력을 발휘하고 시부모님께도 이쁨받는 완벽한 며느리다. 거기에, 주말마다 서울과 지방을 오가며 완벽하게 두집살림을 한다. 세상에 이런 슈퍼우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소설이 꽤 재미있었던 데다 일부일처제에 대해 발랄하게 문제제기를 한 면은 높이 사지만, 이건 결국 소위 진보적이라는 리버럴 남성의 완벽한 판타지에 불과할 뿐이라 생각했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은 뒤 결국 직장을 그만두었던 여자후배 한 명은 "원작자가 애를 낳아본 경험이 없는 게 분명하다, 이건 여자가 남편을 하나도 아니고 둘을 모시고 사는 격인데 이런 슈퍼우먼이 어디 있는가"라며 분노를 표하기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 영화가 베일을 벗었다. 놀랍게도 영화에는 '폴리아모리'라는 말이 단 한 차례도 등장하지 않는다. 축구에 대한 비유도 매우 적절한 수준에서 이뤄지는 데다, 축구를 전혀 몰라도 이 영화를 보는 데에 하등의 지장이 없다. 책과 영화는 매체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소설에서 그토록 여러 장을 공들여 설명해야 하는 부분도 영화에서는 컷 하나로 충분히 전달이 가능하며, 반면 소설에서 별 비중을 차지하지 못했던 부분이 영화에선 단 한 씬 등장한다 해도 관객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기 마련이다. 원작자도 어느 인터뷰에서 인정한 바 있지만, 인아의 선택을 합리화하기 위해 폴리아모리의 기원과 일부일처제의 부당함에 대해 소설에서 그토록 많은 설명이 붙어야 했던 것과 달리 영화에서는 손예진이라는 배우의 눈웃음 한 번으로 모든 설명이 불필요해진다. 인아의 성격도 살짝 바뀌었다. 영화 속 인아는 원작의 인아와 달리 애교가 흘러넘치고 보다 생동감이 있어졌으며, 집안일에 손을 놓고 있는 덕훈에게 투덜대기까지 한다. 게다가 덕훈이 지원이의 돌잔치 자리에 찾아가 비밀을 폭로하는 장면은 소설보다 훨씬 임팩트가 강렬하다. 덕분에 영화는 소설보다 훨씬 더 현실에서의 개연성이 높아진 게 사실이다. 게다가 정윤수 감독의 영화 만듦새도 매끄럽기 짝이 없다.
아내가 결혼했다
그럼에도 영화 <아내가 결혼했다>는, 소설 [아내가 결혼했다]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다. 손예진이 그리는 인아의 '적극적인 삶의 태도'는 분명 생동감이 넘치는 데다 일정한 설득력을 주는 게 사실이지만, 바로 그 점이 동시에 다시 캐릭터의 한계를 긋는 효과를 내놓고 만다. 밤새 술을 마시고 들어와도 칼출근을 하는 데다 일주일에 두 집을 오가며 살림을 하는 무쇠 체력, 어떤 남자든 홀릴 수 있는 아름다운 미모, 여자관객마저도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눈웃음, 그리고 모든 얼토당토않은 요구에도 결국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강력한 애교마저 갖춘 손예진의 인아는, 일부일처 가부장제의 모순의 틈을 파고들어 균열을 낸다기보다는 이를 악용해 다른 이의 감정을 착취하며 제 잇속만 차리는 여성으로 보이는 게 사실이다. 소설에서의 인아가 나름의 철학을 갖고 현실의 벽을 돌파하려는 힘과 노력을 보여주었다면, 영화 속 인아는 예쁜 여자 한 명이 펼쳐보일 수 있는 기행이 그나마도 "예쁘니까 용서되는" 상황, 즉 전적으로 남자들의 어리석음과 관용에 기대는 상황을 만들어낸다. 이는 과거 <엽기적인 그녀>가 엄청난 흥행에 성공했을 때에서 하나도 나아진 것이 없다. 과연, 여러 평자들은 이미 이 영화가 "실은 남자들의 바람기를 면피하고 싶은 뻔뻔한 욕구"를 드러내는 영화라며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 하는 글을 앞다투어 내놓고 있는 상태다. 원작소설의 도발적인 문제제기를 상업영화가 그대로 떠안아야 한다는 의무는 없다. 중혼을 하겠다고 남편을 졸라대는 아내를 관객에게 충분히 설득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누가 봐도 예쁜 여배우를 캐스팅해야 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말도 안 되는 슈퍼우먼'을 등장시켜가면서까지 원작이 관철시키고자 했던 문제의식이 영화에서 완전히 사라졌다면,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슈퍼우먼에 시부모와 주변인들을 설득할 생각은 전혀 없다면, 그리하여 오히려 영화가 원작이 문제를 제기하고자 했던 주제에 오히려 역효과를 내고 있다면, 과연 '아내가 또 결혼하려고 한다'는 설정이 주는 말초적인 호기심과 재미 외에 이 영화가 정말로 만들어져야만 하는 이유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영화 <아내가 결혼했다>를 매우 재미있게 보고 나온 뒤 날이 지날수록 심경이 복잡해지는 이유는 바로 이런 것들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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