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박사로 채워진 대학, 금융자본주의 위기 앞에서 할 말 잃다
경제학 교수들의 이력만 살펴도, 이런 현상은 쉽게 설명할 수 있다. 2006년 2월 기준으로 수도권 대학 경제학과 교수 중 미국 박사가 차지하는 비율은 85.7%에 달한다. 흔히 주류경제학이라 불리는 이론을 전공한 비율은 90.5%다. 아예 100% 미국 박사만으로 경제학 교수진이 채워진 대학도 6곳(경희대, 중앙대, 단국대, 동덕여대, 홍익대, 서울여대)이나 된다. 이런 분위기에서 미국식 금융자본주의를 벗어난 경제 질서를 상상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미국 월스트리트의 위기 앞에서 할 말을 잃어버린 이런 교수들에게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라는 속담이 어색하지 않다.
물론, 미국에서 보수 주류 이론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이들이 대학 강단을 독점한 상황은 다른 사회과학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정치학의 경우, 2003년 말 서울대학교, 연세대학교, 고려대학교의 정치외교학과에 재직 중인 49명의 교수 중 외국 박사 학위 소지자는 48명이고 국내 박사 학위 소지자는 1명뿐이다. 외국 박사 학위 소지자가운데 미국 박사학위 소지자는 43명으로 외국박사의 90%에 달했고 전체 교수의 88%에 이른다. 이들은 주로 미국식 주류 정치 이론을 연구한 사람들이며 한국 사회에 이를 무비판적으로 적용하는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학술단체협의회. 2003. <우리 학문 속의 미국>)
"숫자에만 갇힌 경제학을 거부한다"
이런 상황에 대해 답답해하던 이들이 결국 뭉쳤다. 미국식 주류 사회과학이 놓치고 있는 현실에 대해 탐구하는 대학원 과정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이들의 문제의식은 크게 세 가지다.
첫 번째는 미국식 주류 보수 이론의 패러다임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 두 번째는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현실을 분석하는 사회과학의 본령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 그러려면 기존 분과 학문 체계를 허물어야 한다는 게 세 번째다.
이런 세 가지 문제의식이 만날 수 있는 자리는 많다. 그 중 하나가 '정치경제학'이다. 아담 스미스 시절부터 경제학은 '정치경제학' 이었다. 경제학이 지금처럼 숫자에만 갇혀있지 않았다는 뜻이다. 하긴, '경제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아담 스미스가 가장 자랑스러워한 책은 <국부론>이 아니라 윤리를 다룬 <도덕 감정론>이었다. 경제학은 태어날 때부터, 철학과 형제지간이었다. 통계 뒤에 숨어 있으면서, 옳고 그름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경제학이 오히려 이단에 가깝다.
'진주사회과학연구회', 학제간 연구로 정치경제학 기틀 다지다
미국만 바라보는 사회과학 강단에 절망한 이들이 모인 자리 역시 정치경제학이다. 이들이 경상대학교 대학원 과정에 정치경제학과를 개설했다.
오는 2009년 첫 신입생을 받는 경상대 정치경제학과 대학원은 '학과 간 협동과정'으로 운영된다. 구체적인 현실을 분석하는 정치경제학을 위해서는, 개별 학문의 울타리를 넘어 다양한 학문의 협력이 필수적이라는 생각에 다들 공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과정에 참가하는 경상대 교수 15명의 전공은 다양하다. 경제학과, 사회학과, 정치행정학부, 사학과, 경영학부, 사회교육학과, 법학과 교수가 두루 포함됐다.
이들 15명은 지난 1991년 생겨난 토론 모임인 '진주사회과학연구회' 회원들이다. 이들은 지난 17년 동안 400회 이상의 연구 발표회 및 독회를 열었다. 또, '한국사회의 이해', '제국주의와 한국사회', '한국의 사회운동' 등 교양 과정을 함께 운영하기도 했다. 오래 전부터 학제 간 연구 및 교육의 경험을 쌓아왔던 셈이다.
이런 시도는 학문간 벽이 높은 한국 사회과학계에서는 아주 드문 일이다. 하지만, 외국으로 눈을 돌리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한국 대학 교수 대부분을 배출한 미국에서도, '학제 간 연구'를 통해 현실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전통을 지닌 대학이 많다.
로스쿨 발판 아닌, 현실 모순 풀어내는 사회과학!
매사추세츠 주립대학 (UMass, University of Massachusetts at Amherst), 뉴스쿨 대학(New School University) 등이 대표적이다.
매사추세츠 주립대학 대학원 과정은 마르크스 경제학 외에도 페미니즘 경제학, 환경 경제학 등 이론적 영역을 폭넓게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대학에서 운영하는 정치경제학 연구소(PERI, Political Economy Research Institute)는 세계적으로 수준을 인정받는 기관이다.
미국 뉴욕에 있는 뉴스쿨 대학 역시 역사와 사회학, 정치학 등을 두루 포괄하는 정치경제학 연구를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청소년 시절부터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졌던 학생들에게서 인기가 높다. 로스쿨 진학을 위한 발판이 아니라 현실에서 겪는 모순을 풀어내는 '진짜 사회과학'을 공부하려는 이들이 주로 찾는다는 뜻이다.
김수행, 김세균 등이 참여하는 강의…활동과 이론의 결합 꿈꾼다
경상대 정치경제학과 대학원 역시 이들 대학의 사례를 참고해서 설립됐다. 그래서인지, 석사 과정 6명, 박사 과정 4명을 첫 신입생으로 기다리고 있는 이 대학원에 쏠리는 관심은 만만치 않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번역한 김수행 성공회대 석좌교수, 비판 사회과학의 거목으로 꼽히는 김세균 서울대 교수 등이 강의하기로 한 것도 경상대 정치경제학과 대학원에 기대를 품게 만드는 한 요소다.
대학원 설립 과정에 참가한 장시복 경상대 연구교수는 "노동조합 관계자와 사회단체 활동가, 진보적인 연구자들이 벌써부터 대학원 입학에 대해 문의한다"고 전했다.
"미국식 주류 경제학, 이데올로기에 불과했다" 다음은 경상대 정치경제학 협동과정 설립을 주도한 정성진 교수(경제학)와의 전화 인터뷰. <프레시안> : 정치경제학 대학원 설립을 여러 해 동안 준비했다고 들었다. 마침, 대학원 개원을 앞둔 시기에 세계적인 금융 위기가 일어났다. 주류 경제학계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다. 그래서 정치경제학을 포함한 비주류 경제학에 대한 관심이 쏠리고 있다. 정성진 : 최근 사례는 주류 경제학이 과학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에 불과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현실을 객관적으로 설명하고, 예측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주류 경제학자들은 자본주의 체제의 한계와 모순을 읽지 못한다. 체제를 정확히 분석하기보다, 정당화하기에 급급한 것도 그래서다. 이런 상황에서 비주류 경제학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그런데 이 가운데는 다양한 흐름이 있다. 그 중 하나가 마르크스 경제학이다. 경상대 정치경제학 대학원에서 다루는 것을 엄밀하게 말하자면, 정치경제학이라기보다 마르크스 경제학이라고 부르는 게 더 적절하다. 마르크스 경제학은 자본주의 체제의 근본 원리와 한계를 설명하는 학문이다. 미국식 신자유주의 경제 질서가 흔들리고 있는 지금, 마르크스 경제학 연구는 더 가속화돼야 한다. "케인즈주의, 위기 해법 아니다" <프레시안> : 마르크스 경제학자로서, 현 상황을 어떻게 진단하나. 정성진 : 미국발(發) 금융위기를 놓고 1980년대 이후 득세한 신자유주의에 책임을 돌리는 목소리가 높다. 이와 함께 처방으로 제시되는 게 케인즈주의로의 복귀다. <이코노미스트>, <파이낸셜 타임스> 등 주류 매체들에서도 드러나는 흐름이다. 1930년대 대공황을 케인즈주의적 처방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는 믿음 때문에 생겨난 경향이다. 하지만 이런 믿음이 과연 정답일까? 그렇지 않다고 본다. 1930년대 공황을 극복할 수 있게끔 한 공로는 케인즈가 아니라 2차 세계대전에 돌리는 게 옳다. 케인즈의 처방은 사실 별 효과가 없었다. 1970년대 미국은 적작 재정을 중심으로 한 케인즈주의적 처방을 적극 활용했다. 하지만, 결과는 스태그플레이션이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1960년대까지 국가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이어져온 경제적 황금기는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막을 내렸다. 본격적인 경기 침체 국면에 접어든 것이다. 이런 상황에 국가자본주의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서, 대안으로 떠오른 게 신자유주의였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역시 해답은 될 수 없었다. 전체 자본의 지속적인 이윤율 저하 경향을 뒤집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는 단지 거품을 부추기는 것을 통해 공황을 지연시킬 수 있었을 따름이다. 그리고 지금, 신자유주의적 처방마저도 한계를 드러냈다. 이 시점에서 다시 케인즈주의를 꺼낸다? 정답이 아니라고 본다. "본격화된 공황, 탈출 못하면 폭력적 수단 나타날 수도…" <프레시안> : 마르크스주의자에게 가장 익숙한 주제를 꼽으라면, 노동이 가치를 창조한다는 '노동가치론'과 자본주의는 공황을 피할 수 없다는 '공황론'을 들 수 있을 듯하다. 전공 실력을 발휘할 때가 된 셈인데, 지금이 정말 공황 국면이라고 보나. 정성진 : 그렇다. 본격적인 공황이 시작됐다. 주류 매체가 정부에 주문하고 있는 케인즈주의적 처방은 결코 효과를 발휘할 수 없다. 오히려 자본주의 체제를 뛰어넘는 모색과 실천이 필요한 때다. 하지만, 이런 움직임을 주도할 세력은 미미하다. 노동운동 진영의 실력 역시 부실하다. 그래서 자본주의의 위기가 심화되고 있음에도, 대안을 당장 구체화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이런 상황이 계속될 경우, 자본가들은 다시 폭력적인 방법을 꺼낼 가능성이 있다. 세계대전 당시처럼 말이다. <프레시안> : 비판적인 경제학자들의 어깨가 무거워졌다. 그런데 이른바 정치경제학 연구의 중심지를 지향했던 대학의 사례는 예전에도 있었다. 한신대 경제학과가 대표적이다. 김수행, 정운영, 윤소영 등 기라성 같은 학자들이 한신대에서 정치경제학을 연구했었다. 정성진 : 1980년대 중반의 일이다. 김수행, 정운영 등이 학교에서 내몰리면서, 한신대는 정치경제학 연구가 많이 약해졌다. 과거 한신대에서는, 학내 갈등이 정치경제학 연구의 발목을 잡았었다. 경상대 정치경제학과 교수진은 오랫동안 공동연구를 하며 호흡을 맞춰왔다. 그래서 팀워크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하지 않는다. 외국에도 정치경제학 연구가 활발한 대학이 많다. 매사추세츠 주립대학 (UMass, University of Massachusetts at Amherst), 뉴스쿨 대학(New School University) 등이 유명하다. 그런데 이들 대학에서는 정치경제학과가 별도로 운영되지 않는다. 주류 경제학과 정치경제학을 섞어서 가르친다. 경상대 정치경제학과와 비슷한 모델을 찾는다면, 호주 시드니 대학을 꼽을 수 있다. 이 대학에서는 정치경제학과가 별도로 운영된다. "신입생 중 상당수는 사회단체, 노동조합 활동가로 채워질 것" <프레시안> : 최근 서울대에서 정년퇴직한 김수행 교수의 후임을 놓고 말이 많았다. 서울대 측이 김 전 교수의 후임을 뽑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중에는 마르크스 경제학자가 한 명도 없게 됐다. 이런 상황은 마르크스 경제학 전공자가 학계에서 지내는 처지를 잘 보여준다. 경상대 정치경제학과 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은 졸업생들의 진로에 대해서는 어떤 계획을 갖고 있나. 정성진 : 서울대 경제학부처럼 모조리 주류 경제학자로만 채워진 대학들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하지만 신자유주의가 파국을 맞으면서 다시 상황이 바뀔 것이라고 본다. 주류 경제학의 한계가 명백히 드러난 상황 아닌가. 대학과 연구소가 비판적 사회과학을 계속 외면하기는 어려울 게다. 그리고 경상대 정치경제학과 대학원 졸업생 가운데 학계로 진출하는 경우는 일부에 불과할 것이다. 나머지는 사회단체, 노동조합 등에서 활동할 전망이다. 애당초 신입생 선발과정에서부터 사회단체, 노동조합 활동가를 상당수 뽑을 계획이다. 이들은 공부를 마친 뒤, 다시 현장에 복귀하게 되므로, 취업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이들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근본적 이해와 구체적인 실천을 조화시킬 수 있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