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이 미처 당도하지 않은 지리산은 늦더위가 소슬바람을 몰고 온 가을에게 자리를 내주고 물러나는 중이었다. 올해로 세 번째 화엄제가 지리산 자락의 구례 화엄사에서 열렸다. '첫발자국'과 '길떠남'에 이어 올해의 주제는 '길을 묻다'였다. 화엄경에서는 선재동자가 선지식을 찾아 헤매면서 길묻기를 되풀이한다. 화엄제는 음악을 통해 그 '길'이 무엇인가 찾아가는 여정에 함께 했다. 이곳에서 연주된 음악이 사람들 마음속의 어둠을 걷어내 맑은 눈을 갖게 되고 그 맑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삶속에서 아름다움을 실천하자는 취지라고 할 수 있다.
고요한 깨달음의 절인 화엄사에서 화엄제를 여는 것은 퍽이나 뜻 깊은 인연이다. 단순한 종교 행사가 아닌, 각기 다른 피부색, 종교와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음악으로써 소리로써 이해하고 끌어안는 자리였다. 화엄제 관계자는 '화엄제 영성음악제는 비종교 행사로 다양한 나라, 인종, 종교, 문화가 소통하는 축제의 한마당'이라고 설명했다. 영성음악은 간단히 말하면 인간의 내적 평화와 세계평화의 통합을 이루고자 인간정신을 일깨우는 영혼의 음악이다.
각황전이 바라다 보이는 대웅전 앞마당에 마련된 무대 주변의 쌀쌀한 공기는 공연이 시작되자 소리와 어우러진 교감의 열기로 뜨거워졌다. 객석에서는 천 명가량의 관객이 두 손을 모으고 공연 시작을 알리는 스님들의 묵언행진 모습을 지켜보았다. 무엇이 이들을 여기에 불러 모았을까, 사람들의 얼굴에 번진 깊은 고요의 기도를 보면서 생각했다. 스님들이 맨 앞자리에 앉자 사물(운판, 목어, 법고, 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중생이 번뇌에서 벗어나 깨달음을 이루게 해준다는 사물이 내는 소리는 가슴 저 밑바닥을 흔들어 내가 저지른 죄업을 모두 떠올리게 했다. 마음이 맑을 때 많은 것이 나를 찾아온다. 내 삶을 거쳐 간 선과 악, 죄와 덕이 환히 떠오르다가 차츰 맑게 씻겨나간 듯 마음이 일순 맑고 차분해졌다. 적멸의 상태에 빠진 객석을 뒤흔든 사물의 순서가 끝나면서 본격적인 공연이 시작되었다.
강권순의 정가 구음과 함께 연꽃을 바치는 의식은 진흙속의 연꽃처럼 여기 참석한 사람의 마음을 깨끗이 씻기고자 하는 뜻 같았다. 코란 경전을 바탕으로 한 터키의 영성음악, 김동언의 동해안 별신굿과 강송대의 진도굿 구음이 이어졌다. 화엄제 음악감독이며 작곡가인 원일의 바리시나위와 판소리 전마당과 비나리를 전수한 한승석의 현대 구음 또한 그 소리에 또 다른 울림을 보탰다. 한 무대에 선 인도전통 음악 연주가인 마니쉬 비아스, 스코틀랜드 출신 작곡가 데바 탄마요는 인도의 만트라를 바탕으로 작곡한 노래를 바이올린과 타볼라 연주와 더불어 선보였다. 분위기는 점점 무르익었고 몇몇 사람은 음을 따라 부르기도 했다. 그것은 화음(和音)이었다. 너와 나의 어울림이었다. 속살을 파고들듯 소리들은 서로 다가가고 스며들어 하나가 되었다. 그들이 어느 곳에서 왔든, 어떤 언어를 쓰든, 무슨 피부색이든, 어떤 종교를 믿든 그들이 내는 소리는 서로 엉키고 감기고 뭉쳐서 또 하나의 말을 만들어냈다. 장엄의 순간이었다.
기원의 소리
동해안 별신굿 김동언 전수자는 화엄제에 참석한 스님들과 관객, 음악가들의 삶에 평안과 복이 깃들기를 기원해주었다. 가사의 맨 끝에 '비나이다'를 붙여 소망하는 바를 영매의 목소리에 실었다. 무엇을 기원한다는 것은 자신을 가장 낮은 자리에 내려놓고, 살면서 자신이 고통을 주거나 상처 입혔을지 모르는 대상에게 용서를 구하고, 모자란 존재인 자신의 삶이 안전하기를 비는 마음이다. 기원과 소망을 실어 절대자를 부르는 겸허한 마음, 그것이 바로 기도인 것이다. 내용이 무엇이든 '부처님께 비나이다'로 시작하는 그 말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지 않을 자 몇이나 될까.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거라."
나의 할머니로부터 숱하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억울한 일 당해서 혼자 훌쩍일 때면 꼭 그 말을 해주었다. 시간이 지나면 당한 너는 괜찮아지지만 그 사람은 계속 괴로울 것이니 미워하는 마음은 버리고 항상 남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으로 살라 하였다. 부처님도 예수님도 믿지 않던 할머니였지만 기도의 참뜻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남을 위해 하는 기도일지라도 결국은 자신을 살리는 것임을 신산스런 삶이 할머니한테 가르쳐주었을 거라고 이제야 깨닫는다.
이번 공연의 특별함은 구음이라는 형식에 소리를 담아낸 우리나라 전통음악이 많이 소개되었다는 점이다. 가사를 멜로디에 실어 전달하는 일반적인 방식의 음악이 아니었다. 목이나 배로 내는 소리가 아니라 발바닥에서부터 머리끝까지 거쳐서 온몸이 울림통이 되어 소리를 끌어냈다. 몸을 통째로 악기 삼아 감정과 정신을 뽑아내 한 덩어리로 만들어 밖으로 내보냈다. 눈을 감고 손을 모으고 내 속에서 어떤 것이 나올지 고대하며 목을 위로 뽑는다. 굵은 소리는 굵은 대로 가는 소리는 가는 대로 혼의 부름을 따르는 듯 보였다.
구음을 영어로 '오럴 사운드'라고 번역하지만 실제의 그것은 '바디 사운드'에 가까웠다. 정해진 가사나 멜로디 없이 오직 노래 부르는 사람의 감정과 신명과 혼을 실어 소리를 밖으로 불러내 객석과 다른 연주자들과 함께 공명하는 소리였다. 평소에 들어보기 어려운 정가나 구음이 흘러나오자 객석은 낯선 것에 대한 호기심과 집중으로 숨죽인 듯 조용했다. 객석에 앉아 있던 보살 한 분이 조용히 속삭였다.
"사람 몸에서 어떻게 저런 소리가 나올까?"
압도적인 느낌의 길고 높게 이어지는 구음을 듣고 있노라면 인간이 낼 수 있은 가장 깊은 곳의 신음과 환희의 빛을 조금이나마 눈치 챌 수 있다.
소리…. 왜 인간의 육체는 소리를 내는가. 말로는 부족한 무엇을 전하기 위해 육체는 소리를 만들어낸다. 사람을 만나고 세상 속에 살면서 갖게 되는 온갖 의문들을 풀기 위해서 상대의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마음의 자리를 제대로 보여주기 위해서는 얼마나 깊은 곳에서 깊은 소리를 길어 올리느냐가 가장 중요하다.
연주자들을 문화와 언어가 다르지만 원초적인 소통 형식인 소리를 통해 서로 어울려 감정을 전달했다. 화음이라는 말을 실감하는 자리였다. 소리가 화합한다. 그 말은 곧 소리로 표현되는 존재끼리 화합한다는 뜻이다.
이끌림과 바침의 소리
스코틀랜드에서 온 데바 탄마요는 켈트족의 전통영성음악부터 인도의 영성음악까지 넘나들며 자신이 작곡한 노래를 불러왔다. 인도의 만트라에 스스로 곡을 붙이고 영어가사를 쓴 'Through the Darkness(어둠을 뚫고서)'라는 곡은 그녀가 6년 전 인도에 건너가 지혜의 스승인 구루를 만나 영적인 감화를 받은 경험을 바탕으로 썼다고 했다.
"어둠을 뚫고서 당신이 가는 길에 촛불을 밝혀요
비록 저녁이 되어 어둠이 내릴지라도
곧 여명이 찾아와 새 날을 알릴 거예요
당신이 앞을 볼 수 없을 때
눈을 감고 내면을 들여다보며 기도를 해봐요
그 분이 당신을 찾으실 겁니다
그 분은 당신 인생에 드리운 어둠을 녹여 없애줄 것입니다"
탄마요는 스승인 구루가 아름다움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도록 도와준 것에 감사하며 자신이 좋은 음악을 만들어 그 분 앞에 기꺼이 바칠 수 있게 되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스승을 만난 이후 아름다움은 이 세상 어디에나 존재하며, 아름다움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그 이상의 것임을 잊지 않게 되었다고 말했다. 자신을 짓누르는 어둠에도, 심지어 추하고 고통스러운 것에도 아름다움이 있음을 깨닫고 그것을 '어둠을 뚫고서'라는 곡에 담았다고 그때의 감흥이 되살아나는 듯 곡진한 표정으로 고백했다. 여기서 말하는 아름다움은 각자의 근기에 따라 무엇이라 이름 붙여도 좋을 것이다. 사랑이든, 인생의 참의미이든, 진실이든.
가냘프고 단아한 외양과 달리 그녀의 열정적인 연주는 공연장의 추위를 잊게 해주었다. 바이올린 연주와 어우러진 그녀의 노래를 들으면서 감동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미 그녀 자신을 충만하게 채운 음악과 자신을 인도한 스승에 대한 간곡한 마음이 듣는 사람의 가슴에까지 전달된 것이다. 소리, 음악이 인간을 서로 묶어주었다. 영성음악은 문명의 폐해와 전쟁으로 다친 자연과 인간을 치유하는 음악이라고 한다. 갈등과 고통을 극복하고 평화로 이끌고자 자신의 가장 깊은 곳에 깃든 소리를 끌어내는 것이라는 말을 몸으로 체험하는 순간이었다.
화해와 치유의 소리
화엄제 총감독이면서 노래운동 1세대 가수 박치음이 작곡한 노래인 '옴 마니 반메 훔'에 이르러 공연은 절정을 이루었다. 영성음악제라는 조금은 무겁고 낯선 분위기에 서서히 익숙해지면서 '옴 마니 반메 훔'이라는 말을 염불처럼 반복하는 노래를 따라하는 사람이 꽤 많았다. 그 말은 본래 연꽃 속 보석이라는 뜻이다. 달리 표현하면 내 마음속의 보석을 찾아서, 라고도 할 수 있다. 공연 끝에 남긴 종산 주지스님의 게송과도 일맥상통한다.
"시방세계에 평등하지 않은 곳이 없으니 필경에는 오는 길도 가는 길도 없습니다."
올해 화엄제의 주제인 '길을 묻다(Along wisdom's way)'에 대한 스님의 답이다. 마음속의 님, 마음속의 보석인 그것을 찾는 것이 우리의 길이니 따로 물을 필요가 없다는 말씀이다. 맨 마지막 노래가 '님에게로'인 것은 그런 뜻에서 더욱 의미심장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가사라고는 오직 그 단어 하나뿐이라 화엄제에 계속 참석한 팬들은 음을 다 외워서 따라 불렀다. 계속 님에게로, 라는 말을 반복하다보면 마음속의 님이 무언지 돌아보게 되고 마음이 가지런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그것을 박치음은 마음의 병에 치료효과가 상당하다고 표현하고, 사람들은 은근히 중독성이 있는 노래라고 얘기한다. 그 대상이 무엇이든 우리가 님으로 정한 그것을 항상 마음에 담고 믿으며 살자는 바람을 담고 있다.
"기도하면서 사는 세상이 꽃 세상이요, 노래 세상이야."
공연이 끝나고 나오는데 처음부터 염주를 손에서 놓지 않고 노래에 맞춰 염주알을 돌리며 음악에 흥을 싣던 나이 든 보살 하나가 공연장을 나서며 친구와 나눈 말이다. 그런 마음을 이미 가졌다면 길을 물을 필요도 답을 찾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자신과 타인을 위해 온전히 기도할 수 있는 겸손한 마음이 있다면 무엇이 어렵겠는가. 아집과 욕심에 눈이 먼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가르침이었다. 나와 너와 우리. 여기와 저기와 온 세상. 악기와 음악이 필요 없는 궁극의 소리는 마음의 소리임을 생명 가진 존재들은 생득적으로 안다.
우리가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자신의 약점을 감추는 기술을 터득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정신이 고양되면 그 약점은 방심한 채 밖으로 나와 자신과 남을 슬프게 한다. 인간은 결국 슬픔을 느끼는 존재인 것이다. 생명체가 가진 고유의 슬픔은 생명을 지키고자 하는, 어쨌든 살아내야 하는 숙명에서 나온다. 그 슬픔과 고통이 서로 공명하며 어깨를 기댄다. 애이불비(哀而不悲). 이때의 슬픔은 비탄이나 비관에 빠지는 어두운 것이 아니라 서로를 끌어안는 측은지심을 일으키는 포용의 마음이다. 측은지심이 관계의 시작이고 중심이고 끝이라고 했던 어느 어르신의 말씀을 공감한다.
모든 존재는 소리를 낸다. 살아있음을 소리로 증명한다. 웃음, 울음, 신음, 환호성, 고함. 존재의 희로애락을 표현하는 원초적이고 직접적인 방식이다. 소리는 말보다 먼저 우리의 마음을 전달하고, 말보다 더 정직하고 군더더기가 없다. 연출을 할 수도 없다. 그저 몸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듣고 자신이 혹은 남이 어떤 상태에 빠졌는지 단박에 알 수 있는 것이다. 고통에 빠졌을 때 입으로 관세음보살을 외치는 것도 인간이 소리로 만들어진 존재, 소리로 숨 쉬는 존재임을 일깨워준다. 그래서 관세음보살이 세상의 소리를 듣고 살피는 것으로 중생을 끌어안는 거라고 짐작해본다. 소리는 마음의 거울이요, 거짓 없는 말이다. 소리를 나타내는 한자 '音'과 말을 가리키는 한자 '言'이 서로 닮은 게 우연의 일치만은 아닐 것이다.
늦가을의 소슬바람과 일찍 내린 어둠이 음악회를 마친 연주자들과 관객을 마중했다. 돌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은 얼마나 위로받았을까. 오늘 들은 소리의 한 자락이라도 가슴에 남아 그들의 마음이 부대낄 때 쓰다듬어준다면 여기에 이르렀던 발걸음이 헛되지 않으리라. 선재동자가 긴 여정 끝에 지혜의 눈을 얻었듯이, 맑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가르침을 되새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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