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시간강사들이 묵묵히 참고 있는 것은 한국에서 교수 채용 제도가 갖는 불합리성 때문이다. 전임 교수 채용에 대한 최종 권한은 총장이나 이사장에게 있지만, 많은 경우에 해당 학과의 전임 교수가 그 권한을 상당 부분 실제로 행사하는 것이 보통이다. 원래 채용 시의 판단 기준은 연구 실적, 강의 경력, 공개 강의 능력 등이지만, 보통은 그보다는 '원만한 성품' 혹은 '무난한 대인 관계"가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된다. 그런데 그 원만함이나 무난함을 평가하는 사람은 바로 그 학과의 전임 교수다. 이는 학과의 전임 교수가 실력이 부족하거나 하는 등의 문제가 있는 반면 응모자가 그 분야에 매우 뛰어난 연구 업적을 가지고 있는 경우 그 전임 교수가 얼마든지 그 응모자를 배척할 수 있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는 의미다.
그 경우 연구 실적이 탁월한 응모자는 졸지에 대인 관계가 안 좋거나 성품이 무난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낙인이 찍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결국 응모자는 채용되지도 못하고 인간성만 나빠지는 두 번 죽임을 당하는 꼴이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면 보통 '다음 차례'라는 말로 협박도 아니고 미끼도 아닌 더러운 협잡이 되돌아오기 일쑤다. 이때 참지 못하면 그 사람은 학계를 떠나는 것이고, 참고 견디면 일생일대의 꿈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런 판에 누가 불의를 보고 참지 말라고 말 수 있겠는가? 시간강사와 전임 교수 사이에 놓인 그 엄청난 신분의 차이를 아는 사람은 섣불리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다.
따라서 대학을 졸업하고 10년 정도의 기간 동안 오로지 연구만 하며 전임 교수 되기에 일생일대의 모험을 건 시간 강사의 입장에서는 전임 교수들끼리의 파벌 싸움, 시간강사에 대한 불평등한 급여와 대우, 학교 당국의 비인권적 처우 같은 것에 불만을 표시할 수 없다. 후배를 아끼는 선배라면 누구든 참고 연구나 열심히 해라라는 말밖에 할 수 없다. 이 글을 쓰는 나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렇지 않을 자신이 없다.
결국 응모자는 자신과 가까운 선배 교수부터와의 인간 관계를 챙기지 않은 채 연구에만 몰두할 수 없게 된다. 그렇지만 많은 시간강사들은 그 와중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연구에만 몰두하고 있는데, 그 틈에 연구라고는 전혀 관심도 없고 오로지 아부와 대인 관계에만 열중인 사람이 전임 교수들의 눈도장을 받고 결국 전임 교수가 되는 게 비일비재하다. 특히 갈수록 대학 동문을 배타적으로 채용하는 풍토 아래에서는 이런 경향이 보편화되고 있다. 교수 채용 때 학연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면 후배 시간강사는 절대적으로 제 목소리를 낼 수 없게 된다. 그것은 아직도 사람에 대한 평가가 공적 시스템보다는 사적 관계에 의해 평가되는 것이 더 옳고 정확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한국 사회에서 그 선배나 은사라는 사람이 그 응모자에 대해 어떻게 평가를 하느냐가 연구 실적보다 훨씬 중요한 그야말로 절대적인 요소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결국 교수 채용 때 심사를 하는 서류는 결국 무의미하거나 정당화시키는 과정에 필요한 최소한의 요건이고 정작 중요한 것은 힘 있는 동문 선배의 의지다. 이런 사실은 이 '업계'에서는 모두가 다 아는 비밀이다. 인사권을 쥐고 있는 전임 교수 그것도 학교 선배가 부탁을 하는데 설사 그것이 부당하더라도 그것을 들어주지 않을 수 있는 시간강사는 좀체 있기 어렵다. 그러한 상황에서 응모자들이 힘 있는 선배에게 달라붙어 어떻게 해서라도 그를 구워삶으려고 애쓰는 모습은 정말로 처연하기까지 하다. 그 과정에서 또 다른 연줄을 동원하기도 하고, 논문에 공동 저자로 등록시키기도 하며, 외국에 나가 자료를 찾아 번역하고 요약해주는 일까지도 한다.
전임 교수가 휴강, 결강을 밥 먹듯이 하고, 비리 혹은 제자 성추행 같은 죄를 짓는 경우마저도 그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시간 강사는 좀체 있기 힘들다. 전임 교수들끼리 이미 관행이라 부르곤 하는 침묵의 카르텔 속에서 그에 대해서는 그 어떠한 비판도 제재도 있지 않은 상황에서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는 그들에게 바른 말을 하면서 버틸 수 있는 시간강사가 어찌 있을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대부분의 전임교수들은 묵묵히 지기 연구와 강의에 수행하느라 정신이 없다. 다만 꼭 어느 대학이든지 간에 몇몇 그런 비행을 일삼는 무리들이 꼭 있다. 나는 그들을 조폭이라 부른다. 그것은 그들이 집단으로 행동하며, 형님-아우님의 의리를 천하제일의 명분으로 삼고, 교육자로서 지켜야 할 금도마저도 무시하고 사는 점이 조폭과 닮아서 그렇다. 그 조폭 집단 가운데에는 연봉 9000만 원씩 받는 정교수가 1년에 단 한 편도 논문을 쓰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정년 보장을 받은 후 10년도 넘게 단 한 편의 논문도 쓰지 않는 교수도 만만치 않게 많다. 그렇지만 그들은 대개 학교 보직 인사에 적극적이고, 곳곳에 자기편을 심어 놓는 일을 잘 한다. 그래서 그들에 바짝 달라붙는 학문 후속 세대가 눈에 많이 띈다. 연구보다는 인간 관계를 중시하는 그들 눈에 띈 시간강사는 결국 교수로서 신분 상승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새로 조폭 집단의 일원이 된다. 이것이 현재 한국의 교수 사회의 모습이다. 그것은 자정 능력을 상실한 채 타락의 도가니에 들어 있다는 것 그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몇몇 대학에서 일부 예외는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절대 과언은 아니다.
그러다 보니 한 학과 교수 사회가 동문 관계로만 이뤄지는 경우도 상당히 많다. 오죽했으면 같은 대학 출신을 몇 퍼센트 이상 채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규정까지 만들었을까? 그런데 그러한 틈을 뚫고 연구 실적이 뛰어난 학문 후속 세대가 채용이 된 경우도 있다. 그 경우 그 사람이 기존의 전임 교수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리는 만무하다. 그래서 그렇게들 같은 학과 내에서 싸움질을 하는 경우가 전국적으로 많은 것이다. 그런데 보통 학과의 규모가 큰 경우에는 그 싸움이 둘로 나뉘어져 벌어지는데, 그 이전투구 등쌀에 시간강사들만 동네북이다. 그리고 그 동네북은 꼭 그 이전투구 판 속에서 특정 집단에 속하도록 강요받는다. 그리고 이유를 막론하고 우리 집단에 속하지 않은 자는 일단 적이 된다. 이런 와중에 학문 후속 세대가 연구에만 몰두하고 있기란 참으로 어렵다.
시간강사에 대한 인사권을 전적으로 전임 교수가 가지고 있다는 사실 또한 교수 사회의 신분제를 더 악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시간강사는 한 학기 마다 임용을 한다. 그리고 그 임용권은 전적으로 학과 교수에게 주어져 있다. 노예만도 못하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다 보니 대학에서 엄연한 피고용자의 신분인 전임 교수들이 학과에 있어서는 강사에 대해 고용주의 역할을 하게 된다. 참으로 희한한 시스템이다. 결국 강사들은 국립의 경우 정부에 대해, 사립의 경우 재단에 대해 그리고 두 경우 모두 교수에 대해 이중으로 피고용자의 지위에 놓인 셈이다.
일반 기업에서도 피고용 경영진이 인사권에 참여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경영진이 아닌 엄연한 피고용자 교수가 또 다른 피고용자 강사들에 대해 인사권을 행사하는 것 같은 관계는 아무 데도 없다. 같은 교육계인 초중등 학교는 물론이고 사회의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만큼 시간강사는 전임 교수에게 생사여탈권을 맡기고 있는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시간강사가 전임 교수 내지는 대학 사회에 대해 교수 채용 시스템에 대한 개혁을 요구하거나 교원으로서의 정당한 대우를 부르짖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를 두고 이 업계에서는 보통 자살 행위라 한다.
현재 한국에서는 이러한 교수 사회를 뜯어 고치려는 노력이 아무데서도 시도되지 않은 채 거의 방치된 채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개인별로 신문이나 방송 혹은 논문이나 책을 통해 울분을 토로하고 나름대로의 대안을 제시하는 경우는 없지 않았으나,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운동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유감스럽지만, 지난 20여 년 동안 한국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 적지 않은 기여를 한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나 교수노조와 같은 진보적인 단체에서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섣불리 혹은 보다 적극적이고 치열하게 덤벼들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여전히 KTX 여승무원 문제나 기륭전자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 같은 데에 대해서는 여전히 치열하게 싸우고 있지만, 정작 그 어떤 문제보다도 먼저 해결해야 할 동종동업자의 관계에 있는 비정규직 교수 문제에 대해서는 한 발 비켜서 있다. 그것은 그 문제가 너무나 얽혀 있어서이기도 하겠지만, 아는 듯 모르는 듯 하는 사이에 전임 교수와 시간강사 사이에 놓여 있는 신분적 봉건 의식으로부터 자유스럽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분명히 말하건대, 교수라고 하는 것은 분명히 하나의 직업일 뿐이다. 대학 강단에서 강의하고, 학문을 연마하는 직업인이 바로 교수다. 그런데 이 한국 사회에서 교수는 이미 신분으로 굳어버렸다. 그리고 그 신분이라는 의미 안에 시간강사에 대한 차별 의식과 그들에 대한 전임 교수의 우월 의식이 존재해 있다. 학생들은 자기 학과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누가 시간강사고 누가 전임 교수인지 잘 모른다. 혹 알게 되는 경우 학생들은 대부분이 시간강사는 '강사'로 전임교수는 '교수'로 분리하여 대접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들에게는 모두가 다 스승이고, 교수이지만, 대학 사회에서는 전임 교수만이 교수로 대접을 받는 것이다. 이것이 그들을 좌절하게 하는 것이다.
전임교수는 전임으로서 의무 시수 (큰 대학의 경우 6시간, 보통 대학의 경우 9시간)만 이행하면 그 외의 어떤 행동도 간섭받지 않는다. 방학 때는 물론이고 학기 중에도 수업이 있는 날만 제외하고는 출근을 하지 않아도 된다.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강의 준비를 하고 연구에 몰두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 해주기 위해서 나름대로의 충분한 물질적 대우가 뒤따른다. 그런데 대학 강의의 50%를 담당하고, 전임 교수와 똑같은 연구 활동을 하는 시간강사에 대해서는 강의와 연구에 대한 물질적 뒷받침도 없고, 사회적 대우 또한 없다. 교수는 한 학기에 4개월 근무하고 6개월 급여를 받는데 - 그렇다고 방학 때 특별히 업무를 보는 것도 아니다 - 시간강사는 4개월 급여만 줄 뿐 방학이 되면 다시 실직자가 된다. 그리고 그 다음 학기 또 다시 부름을 받아야 한다, 물론 그 전임교수로부터. 부름을 못 받으면 자연 도태다. 그 흔한 해고 통보 하나도 없다.
전임 교수는 온갖 곳으로부터 원고, 자문, 강연 등의 청탁을 받는다.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그 수입이 상당하다는 것은 두말 할 필요도 없다. 물론 전문성을 고려해 볼 때 지금의 원고료나 강연료가 정당한 대우 혹은 아직도 일부 부족한 수준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두말 할 필요도 없다. 다만, 그런 기회가 시간강사에게는 거의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일부 신진 인력을 제외하고는 시간강사라고 해서 전임 교수보다 학문의 깊이나 전문성이 부족하거나 못하지는 않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자문이나 강연 등의 기회는 거의 오지 않는다. 또 설사 온다 해도 시간 강사들이 그 청에 응할 수가 없다. 벌써 연구는 안 하고 돈에 눈이 먼 사람으로 낙인찍히는 것이 두려워서다.
그래서 전임 교수와는 달리 시간강사에게 추가로 주어지는 소득은 거의 없다. 물론 스스로 글을 써 원고료를 받거나 하는 경우가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매우 제한되어 있다. 그렇지만 그들에게 강의료는 시간 당 4만5000원에서부터 시간 당 2만 원 정도까지 천차만별이니 평균 3만 원의 시간 수당을 받으면서 평균 1주일에 6시간을 강의하는 강사라면 한 달에 급여가 72만 원이니 여섯 달 몫으로 네 달 동안 받는 급여가 300만 원이 못 된다. 결국 한 달에 한국 정부가 책정하는 최저생계비조차에도 못 미치는 액수다. 그들에게는 4대 보험도 가입이 되어 있지 않아 최저 수준의 복지 혜택조차도 받을 수가 없다. 정말 직업 분류상 '일용잡급직'으로 되어 있는 것보다도 훨씬 못한 실정이다.
적어도 1992년 김영삼 대통령 정부 이후 지금의 이명박 정부에 이르기까지 모든 정부는 하나같이 대학 경쟁력 강화를 외치고, 이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두뇌한국이네, 인문한국이네 하는 갖가지 프로그램을 만들어내고 갖은 아이디어를 동원해 대학 경쟁력 강화에 매진하고 있다. 그 사이 말도 많고 탈도 많지만, 전임 교수에게 연구 실적 제고를 강요하다 보니 나름대로의 성과가 있는 것 등의 성과 또한 전적으로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대학 수준의 질적 제고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연구와 교육의 인력 확보는 아무런 성과가 없다. 교육부 국정감사에 따르면 2007년 국내 대학의 교원 일인당 학생 수는 31.2명이다. 이는 2004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 15.5명에 비해 2배 이상으로 회원국 중 가장 높은 즉 가장 열악한 수준이다. 그런데도 대학에서 교육이 멀쩡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은 그 공백을 6만 명 정도로 추산되는 시간강사들이 메우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시간강사들의 생활고는 개인에 따라 다르다. 그 가운데는 배우자가 돈을 많이 벌거나 부모로부터 재산을 많이 물려받아 꽤 부유하게 사는 경우도 있을 수 있고, 새벽에 우유 배달을 해가며 겨우 생계를 잇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이 가운데 후자는 물론이고 전자도 마찬가지로 전임 교수와의 차별 대우를 받으면서, 교육자로서 정당한 대우를 전혀 받지 못하는 상황에 대해 심한 자괴감을 느끼고 있다. 최근 앙케이트 조사에 따르면 그들 가운데 절반 이상이 부당한 대우로 인해 우울증을 느낀 바 있다고 한다. 자살을 생각해 본적이 있다는 경우가 상당한 정도라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한국 사회에서 시간강사를 이렇게나 억울한 지경으로 내몬 것은 인건비를 줄이고자 강의의 많은 부분을 강사로 메우는 대학 당국과 경쟁과 효율이라는 시장 논리에만 함몰한 채 교육자로서의 정당한 처우에 대해서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역대 정부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자신의 신분을 즐기면서 기득권에 안주한 채 비정규직 교수 문제를 방관하고 나아가 그 죄악의 카르텔에 침묵으로 동조하는 정규직 교수가 가장 우선적이고 큰 책임을 져야 함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시간강사'라 불리는 비정규직 대학 교수, 그들의 희생은 곧 전임교수의 혜택이다. 교수 급여의 대부분을 학생 등록금에만 의존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이기 때문에 그렇다.
2007년 가을, 한국에서의 비정규직 교수 문제를 사회 전체에 알리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편의 일환으로 <한겨레>에 릴레이 광고를 시작할 때의 일이다. 처음에는 불과 몇 사람이 움직였으나 시간이 갈수록 효과가 나기 시작했다. 그 때 광고 게재에 대한 일을 맡아 한 내게 어느 정규직 교수가 광고 게재를 부탁하면서, 전화로 이런 말을 했다. "저는 시간강사 문제만 생각하면 지금 제가 앉아 있는 자리가 그 분들의 핏방석인 것 같습니다".
* 이 연재는 한국비정규교수노조 교원법적지위쟁취특별위원회의 기획으로 진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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