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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수업의 절반은 '유령'이 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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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대학 수업의 절반은 '유령'이 맡는다?

[벼랑 끝 31년, 희망 없는 강의실 ②]

올해 추석은 정말 명절 같지 않은 추석이었습니다. 그렇게 느낀 데는, 알다시피 추석이 예년보다 한 달 가량이나 앞서 있으면서 날씨도 무더웠고 마침 추석 당일이 일요일과 겹치는 바람에 연휴가 짧았던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지금 쓰고 있는 이 원고의 마감일을 한참이나 넘긴 탓이 더 컸습니다. 9월부터 <프레시안>에 연재를 시작하기로 한 기획의 첫 꼭지를 장식하는 글을 9월을 넘어 추석이 코앞까지 다가왔는데도 윤곽조차 잡지 못했으니 오죽했겠습니까.

사실, 7월 중순경에 '시간강사의 잇단 죽음들'을 중심으로 한 원고를 청탁 받았을 때는 이렇게까지 글을 미루게 될 줄 몰랐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너무 부담 없이 생각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일 년이 채 안 되는 기간에 네 편이나 써서 잡지와 신문,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발표한 주제로 다시 한 번 더 글을 써달라고 하니 부담을 가질 이유가 도대체 없었습니다. 자료도 다 있겠다, 그냥 쓰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한 달이라는 집필 기간은 충분하다 못해 넘쳐나 보였습니다.

하지만 막상 쓰려고 보니 이런 생각은 이만저만한 오산이 아니었습니다. 원고마감일을 일주일쯤 앞두고 <한글> 프로그램을 띄웠는데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건가, 갈피를 잡을 수 없었습니다. 제목을 정하지 못한 것은 차치하고라도 컴퓨터 자판의 글쇠 하나 건드려보지 못한 채 몇 날이 흘렀습니다.

그러던 중 마침내 왜 글쓰기가 어려운지 알아냈습니다. 원인은 두 가지 정도로 좁혀졌습니다. 첫 번째는 똑같은 주제를 가지고 계속해서 우려먹었다는 것입니다. 재탕, 삼탕에 사탕까지 우려먹었는데 또 우려먹으려니, 이건 글쓰기에 신통방통한 재주를 가진 달인이 아닌 이상에는 녹녹치 않은 일이었습니다. 레퍼토리가 다 떨어졌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똑같은 주제로 일 년 사이에 이 글을 포함해 다섯 편의 글을 쓴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이는 '시간강사' 문제가 오래 묵은 문제이고 그 핵심이 명확하며 사회적으로도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 그럼에도 정부나 대학당국은 해결은커녕 해결의 의지조차 보이지 않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줍니다. 시간강사들에게 법적으로 교원의 지위를 부여하고 아울러 싼 값으로 이들의 노동력을 뺏는 도적질을 그만하라고 끊임없이 떠드는데도 정부와 대학당국은 모르쇠로 일관하면서 방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시간강사' 혹은 '시간강사의 죽음'을 인터넷에 검색하면 수십여 편의 글과 기사, 댓글이 뜹니다. 그 논조도 한결같습니다. 이대로 놔둬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약은 약사에게 진료는 의사에게'처럼 학생은 선생에게 배워야 합니다. 그러니까 선생의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 학생들을 맡겨야 하고, 역으로 말해 학생들을 가르치도록 강의를 맡겼으면 선생으로 인정해야 하는 것이지요. 지금처럼 강의를 맡긴 사람들을 신분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불안정한 시급노동자로 계속 놓아두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학생들을 가득 태운 강의라는 버스를 운전하는 운전사로 앉혔으면 운전면허증도 주고 그에 상응하는 임금도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운전은 하라고 해놓고 면허증은 주지 않는 이런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그리고 학생들에게 차비는 비싸게 받으면서 정작 운전사한테 임금은 쥐꼬리만큼만 주다니요. 운전사는 아무나 됩니까? 적어도 박사과정 수료 이상의 학력을 가지려면 대학입학부터 한 10년은 족히 공부해야 합니다. 요즘은 박사과정 수료로는 강의 받기 힘듭니다. 박사학위가 있어야 하지요. 그러면 15년에서 길게는 20년은 공부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30대 중반은 넘겨야 겨우 강의를 몇 시간 받을 수 있거든요.

그런데 전국대학교무처장협의회 부회장이신 박 모 성균관대학교 교무처장 같은 분도 있습니다. 이 분은 지난 4월16일에 방송된 KBS2 방송의 <추적60분>에서 비정규교수, 즉 시간강사에게 교원지위를 부여하는 것에 대해 대학 측 입장에선 '절대불가'라고 밝혔습니다. 왜냐하면 '시간강사는 검증되지 않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교원의 지위를 법적으로 부여하면 평생직장, 나쁘게 말하면 철밥통 몇 만 개를 만드는 꼴이 되고, 이는 재정적으로도 불가능하지만 대학의 교육과 연구의 질적 제고에서도 아주 위해적인 요소로 적절치 못하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이 말을 듣고 쓴웃음이 나왔습니다. 박 모 교무처장의 말이 무슨 말인지는 알겠습니다. 또 이것이 현재 우리나라 대학의 가장 큰 딜레마를 아주 잘 표현했다고도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판단을 시간강사에게만 적용한다면 상당히 불공평한 것이라고 여겨서 박 모 교무처장의 주장을 한번 톺아봤습니다. 과연 이런 경험이, 이런 부정적인 판단이 어디서 나왔겠느냐는 것이지요. '평생직장', '철밥통', '교육과 연구의 질적 제고에 아주 위해적인 요소'. 모르긴 몰라도 시간강사에 대한 체험은 분명 아니라는 것만은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시간강사는 철밥통을 가져본 적이 없으니까요. 그리고 대부분 대학의 본부 측이나 각 학과에서 시간강사의 강의평가 결과에 대해 계속 모니터링하고 있고, 또 대개는 강의를 맡기 전 어느 정도의 연구 성과를 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것은 시간강사에 대한 것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그러면 누구에 대한 경험일까요? 교원이라는 철밥통을 갖게 되자 교육과 연구의 질적인 면이 위험스러울 정도로 저하된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이 말보다 더 어이없는 말은 '시간강사는 검증되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교원의 자격을 줄 수 없다는 것이지요. 검증되지 않은 사람들에게 교원의 자격을 줄 수 없다는 데는 저도 백퍼센트 찬성합니다. 아니, 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주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박 모 교무처장의 말을 좀 고깝게 받아들이면, 다른 대학은 몰라도 적어도 성균관대학교에서는 검증되지 않은 사람들을 시간강사로 쓴다는 것인데, 맞습니까? 성균관대학교 시간강사 여러분, 여러분들은 검증되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데 동의하십니까? 성균관대학교 학생 여러분, 여러분들이 듣는 강의 중 절반 가까이는 검증되지 않은 사람들이 하는 강의라는 데 동의하십니까? 만약 동의하신다면 검증된 사람들에게만 강의를 맡기라고 본부 측에 요구해야 하겠지요. 등록금은 낼만큼 냈는데 검증도 되지 않고 선생의 자격도 없는 사람들에게 강의를 듣고 학점을 받는 건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이건 제가 무슨 말꼬리를 물고 생트집을 잡자는 게 아닙니다. 각 대학에서 강의평가를 해보면 정규직교수들이나 비정규직교수들이나 점수가 거의 같습니다. 연구력에서도 그렇습니다. 그런데도 교육과학기술부 관계자나 대학 본부 측, 그리고 많은 정규직교수들은 박 모 교무처장처럼 이런 뿌리 깊은 편견과 계급의식에 젖어 있습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교육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이런 편견을 갖고 있으니까 일반 사회에서도 똑같은 편견을 갖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한국전력공사에 입사한 어떤 분이 2005년에 국가인권위에 진정을 제기했습니다. 내용은 "한국전력공사가 초임 호봉을 산정함에 있어 대학 전임강사의 경력은 80% 인정하고 업무 연관성이 없는 일반 기업체 경력에 대해서도 50% 인정하면서, 대학 시간강사의 경력은 인정하지 않는 것은 부당한 차별이다."는 것이었습니다. 국가인권위는 이 진정이 이유 있다고 판결을 내렸습니다. 왜냐하면 "진정인의 경우 약 2년 6개월에 걸쳐 주당 평균 약 25시간을 강의하여 사실상 전업으로 종사했음에도 불구하고 시간강사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주 2시간 내지 3시간 종사자와 주 20시간 이상 생계유지형 종사자의 경력을 똑같이 취급하여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는데, 이를 두고 사용자에게 주어진 인사재량권을 정당하게 사용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입니다.
▲ 시간강사는 유령인가? ⓒ이광수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시간강사는 유령입니까? 동일한 강좌를 전임교수와 시간강사가 똑같이 한다고 했을 때 전임교수의 강의는 경력으로 인정할 수 있지만 시간강사의 강의는 경력으로 인정할 수 없다면, 그러면 시간강사의 강의는 뭐란 말입니까? 또 그 강의를 듣는 학생들은 뭐며, 그들이 받는 학점은 무엇이란 말입니까?

한번 생각해봅시다. 대학에게 학생은 자식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자식 교육의 절반을 맡겨놓은 시간강사들을 선생으로 존중해주지 않는 것, 그저 무자격 돌팔이 소모품 정도로 본다는 것, 다시 말해 자식을 가르치는 선생으로 무자격 돌팔이를 고용한다는 것은 자식에 대한 애정이 없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지요. 또 교육의 질 자체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학생들이 어떤 사람에게 어떤 양질의 강의를 듣느냐는 것은 관심 밖입니다. 그저 어떡하든 입학정원 채워서 등록금 받고 졸업시키는 행정적인 절차만을 진행시킬 뿐인 겁니다.

제가 글을 쓰기가 힘들었던 두 번째 이유는 더는 죽음을 거론하기가 싫어서였습니다. 올해 초, <녹색평론>1,2월호에 <대학의 아웃사이더, 시간강사>라는 제목으로 글을 실었습니다. 그 글의 처음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한 시간강사가 강의실을 나와 캠퍼스의 야산을 오른다. 그의 이름은 백 아무개다. 그는 심신이 너무 지쳐 있었다. 교수가 된다는 희망으로 수 없는 밤과 낮을 책과 씨름했다. 그래서 30대 초반이라는, 인문학 분야에서는 남들에 비해 이른 나이에 박사학위를 따는 성과도 이루었다. 강의를 맡으면서 교수님으로 따르는 학생들을 열정적으로 가르쳤다. 그에겐 밝은 미래가 약속되는 듯했다. 그러나 하루가 지나고 또 하루가 지나고 해가 바뀌면서 희망은 좌절로 이어졌다. 우선, 시간강사와 연구원 생활로 겪는 경제적인 어려움이 컸다. 여기에 교원이 아닌 시간강사라는 신분에 쏟아지는 주위의 싸늘한 시선과 비아냥거림도 그를 비참하게 만들었다. 가족 앞에선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한때는 그들에게 이 세상 가장 자랑스러운 존재였을 테지만 이젠 천하에 무능한 자식이요 가장이었다. 그는 대학 안에 있으면서도 사실은 대학의 문밖에 있었고, 집에 있으면서도 집밖에 있었다. 이는 이 나라 대학시간강사 누구에게나 마찬가지다. 대학은 시간강사를 말 그대로 시급을 받고 강의를 하는 임시직 노동자로만 취급한다. 결코 그들을 대학의 한 구성원, 교육주체로 인정하지 않는다. 굶주린 배를 쥐고 언 발로 서 있는 그들을 면전에 두고 매몰차게 문을 걸어 잠근다. 학생을 가르치는 자들에게 해당하는 '상식적인 일상'을 주길 거부한다. 그러므로 시간강사들이 머물 수 있는 곳은 대학이 아니다. 짧은 강의시간 외에 그들이 있을 곳은 강의실 밖, 대학의 밖이다. 백 아무개는 자신이 쓰던 컴퓨터에 그 누구도 자기를 기억해주길 원치 않는다고, '아무도 아닌 자'가 되고 싶다고 적었다. 야산에 오르는 그의 가방에는 자기 몸을 지탱해 줄 수 있는 나뭇가지에 걸 끈이 들어 있었다. 봄을 지나 여름의 초입에 들어서는 2003년 5월 마지막 날의 일이었다.'

이것은 서울대학교 교정의 야산에서 일어났던 한 시간강사의 죽음을 약간의 상상력을 곁들여 엮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대학의 아웃사이더, 시간강사>라는 글이 나가고 나서 한 달 쯤 후의 일입니다. 두 분의 시간강사 선생님이 또 목숨을 끊었습니다. 한 분은 역시 서울대학교 교정의 한 화장실에서 그랬고, 다른 한 분인 한경선 선생님은 매스컴을 통해 널리 알려졌듯이 미국 텍사스주 오스틴에서 그랬습니다. 소름이 끼쳤습니다. 내가 시간강사의 죽음을 소재로 글 나부랭이를 쓰고 있었을 때 이 두 분은 이미 막다른 골목에서 죽음을 계획하고 있었구나, 소름이 돋았습니다. 안타깝고 죄송스럽고, 죽음으로 외치는 그들의 절규가 듣기에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럼에도 이들을 우울증 환자로 취급하면서 애써 이 죽음들을 사사화(私事化)하고 외면하는 대학사회에 분노가 일었습니다. 하지만 다시 돌아보니 불의를 보고도 고개를 돌려버리는 그들의 얼굴 역시 죽은 자의 핏기 잃은 창백한 얼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3월24일자 <영대신문>에 또 이렇게 글 나부랭이를 썼습니다.

한경선 선생님을 만나는 것은 참으로 힘들었습니다. 선생님의 유골을 실은 KAL기는 도착시각을 세 번이나 미룬 끝에 예정보다 2시간 늦게 인천공항에 내렸습니다. 얼마나 이 한국땅에 다시 오기 싫었으면 그랬을까요. 선생님에게 한국은 자신의 죽음조차 허락하기 싫은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유서 첫머리에 "이 글을 받으실 때, 저는 이곳 오스틴에서 그토록 바라던 평온한 휴식을 비로소 얻게 되었으리라 생각됩니다"라고 적으셨습니다.

미국 오스틴. 새로운 삶을 준비하기 위해 갔던 그곳에서 한선생님은 삶을 마감했습니다. 선생님은 텍사스주립대에서 2004년에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희망에 차 귀국해서 시간강사와 강의전담교수로 4년간을 지내셨습니다. 하지만 그 희망은 얼마가지 못했습니다. 선생님은 "귀국 후 정신없이 일하며 보냈던 처음 1년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제정신을 갖고는 결코 살아갈 수 없었던 시간이었다"고 했습니다. 특히 강의전담교수로 보낸 마지막 2년은 마치 20년 같았다고 했습니다. 대학은 비정규직이라는 신분상 약점을 악용하여 선생님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한 조건을 담은 계약을 맺도록 했습니다. 대학이 저지르는 부조리를 조금만 지적해도 그것은 보복조치를 불러왔습니다. 해당 학과의 전임교수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져야 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선생님으로 하여금 "열심히 연구와 강의를 하리란 초기의 순수한 열정"에서 이 사회에 대한 환멸과 더불어 애초의 희망과 비전을 접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한선생님은 한국대학사회의 숱한 부조리와 모순은 "그럴듯한 구호나 정책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진정한 반성과 성찰 없이는 결코 극복할 수 없는 사항"이라 생각했고, 그것을 환기시키기 위해 죽음을 택했습니다.

한경선 선생님이 돌아가신 날과 거의 같은 날에 서울대에서도 한명의 비정규교수님이 학교 화장실에서 목숨을 끊으셨습니다. 그래서 이 두 분까지 합하면 알려진 비정규교수의 죽음만 벌써 6건입니다. 그럼에도 대학사회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아! 이 침묵이 무섭습니다. 옆에서 누군가가 죽었고 죽어가고 있는데도 철저히 외면하는 이 침묵! 이 침묵이 독이 되어 대학의 생명을 서서히 끊어버릴 것 같아 무섭습니다.
▲ 청와대 앞 1인 시위에 참가한 한 한국비정규교수노조 조합원 교수

이처럼 스스로 목숨을 끊으신 여섯 분과는 좀 다른 경우도 있습니다. 숨길 필요 없으니 말하겠습니다. 2003년 성탄 전야에 처가살이 하던 한 시간강사가 장인, 장모, 아내를 칼로 찔러 죽이는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미래를 보장받지 못하는 시간강사의 불안정한 신분과 경제적 궁핍, 그리고 유학을 끝내면 교수가 될 것이라는 그의 거짓말이 중요한 원인들이었습니다. 사실 그 거짓말이 아니었다면 사랑하는 여자를 아내로 맞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한 여인을 평생의 반려자로 삼기 위해 했던 거짓말이 아내뿐 아니라 장인 장모까지 죽이게 만든 것입니다. 그는 경찰에 체포된 뒤 현재의 심정을 묻는 말에 "아내가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이 시간강사는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습니다. 그리고 올해 초에는 여러 대기업 식품회사들에 전화를 걸어 회사제품에 벌레가 나왔다고 속여 돈을 요구한 강사도 있었습니다. 그는 경찰에서 대학에서 받는 40여만 원의 월급으로는 생계유지가 힘들어 이 같은 범행을 저질렀다고 말했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끊은 것, 살인을 저지른 것, 그리고 파렴치한 범행을 저지른 것, 이는 분명 겉으로는 서로 다른 모습이지만 그 원인은 같습니다. 불안하고 존중받지 못하는 신분과 경제적 궁핍이 그것이지요. 심각한 것은 지금도 누군가가 이런 죽음을 계획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저는 인터넷 포털사이트 <뷰스앤뉴스>에 '더 이상 죽이지 마라!'는 제목으로 글을 실었습니다. 이젠 그만하면 되었다고요. 대학사회에서 '정글의 법칙'을 폐기하라고, '승자독식'의 구조를 깨부수라고요. 산이 높으면 높을수록 골은 더욱 더 깊습니다. 대학은 지금 이긴 자에게 모든 것이 돌아가는 구조, 이긴 자의 부귀영화를 위해, 그들의 밥통을 철밥통으로 만들어주기 위해 다른 한 쪽이 절대적으로 희생해야 하는 구조입니다. 이 구조를 깨부수지 않는 한 박 모 교무처장의 주장대로 대학사회에서 교육과 연구력의 심각한 저하를 막을 수 없고, 임용비리, 상명하복의 계급구조는 결코 깨뜨릴 수 없을 것입니다.

정규직교수와 비정규직교수의 관계는 '승자독식', '제로섬 게임'의 관계여서는 안 됩니다. 입술이 없으면 이빨이 시린 법입니다. 그들은 이 입술과 이빨의 관계, 즉 '순망치한(脣亡齒寒)'의 관계, 서로가 서로를 보완해주는 상생의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그 첫걸음이 바로 시간강사에게 교원의 지위를 법적으로 보장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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