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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불금 사태, 본질은 지도층의 '파렴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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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불금 사태, 본질은 지도층의 '파렴치'다

[고성국의 정치분석] 문제는 '노블리스 오블리주'

추곡수매 대신 목표가격과 산지 쌀값 간 차이의 85%를 현금으로 메워주는 것이 쌀 직불금 제도다. 그러니까 시장개방으로 벼랑 끝에 몰린 농민들의 생존 보조금이라는 뜻이다. 이 돈을 공무원 4만400명, 금융계 8400명, 공기업 6200명, 회사원 9만9000명 등 우리 사회에서 가장 안정된 직장을 갖고 있는 고학력, 고소득의 기득권층 인사들과 의사, 변호사 같은 전문직의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사기적 방법으로 빼돌린 것이 이번 사건의 성격이다.
  
  사건을 들여다볼수록 가슴이 무거워지는 것은 우리 사회 기득권 주류 세력이 보여준 천박함과 파렴치함, 그로 인한 절망감이 그만큼 크기 때문일 것이다. 차라리 장차관이나 국회의원, 고위공무의 대형 부패사건이었다면 참담함은 덜 했으리라.
  
  문제는 노블리스 오블리주다. 이봉화 차관을 파면한다고 농민의 분노가 가라앉을 것도 아니고 공무원들을 대량 징계한다고 국민의 허탈감이 치유될 것도 아니다. 이제와서 직불금제도의 허점을 보완한다고 땅에 처박힌 공직 윤리와 처참하게 짓밟힌 도덕적 권위가 되살아 날 것도 아니다. 인사조치와 징계조치와 제도보완을 안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이번 사태의 본질이 다른데 있다는 점만은 놓치지 말아야 한다.
  
  문제는 여전히 노블리스 오블리주다. 일제가 남긴 적산과 미국의 원조를 밑천으로 시작한 한국형 자본주의의 압축적 발전이 세계가 놀란 압축성장과 함께 자본주의의 한국적 천박성을 가져왔다는 데 대해서는 다시 얘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문제는 그 천박성이 우리사회를 21세기형 선진국으로 업그레이드 시키는데 결정적인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는 데 있다. 공직자, 기득권층, 지도층 사람들이 우리 사회의 가장 어려운 사람들에게 가야할 생존보조금을 사기적 방법을 통해 집단적으로 가로챈 사회가 어떻게 선진국이 될 수 있겠는가.
  
  문제는 다시 노블리스 오블리주다. 국민의 아픔과 분노를 가라앉히는 길도, 이번 사태를 근원적으로 해결하는 길도, 이번 사태를 넘어 우리사회를 한 단계 도약시키는 길도 모두 노블리스 오블리주 문제로 수렴된다. 로마가 제국의 절정기에 보인 노블리스 오블리주, 과연 21세기 대한민국에서는 불가능한 것인가.
  
  어느 나라나 자랑할 만한 전통이 있고 자부심 가득한 역사를 갖고 있을 터이다. 노블리스 오블리주가 로마만의 전통일리 없고 귀족들만의 가치일리 없다. 동아시아의 절대 강자로 군림했던 고구려, 가장 진취적인 해상교역 국가였던 백제, 1000년 제국의 번영을 구가했던 신라가 노블리스 오블리주 없이 영광의 역사를 만들어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고려의 호국정신과 상무정신, 조선 선비들이 몸을 던져 만들어낸 개혁과 쇄신의 역사. 국난극복의 과정에서 보인 선공후사, 멸사봉공의 의기와 문화창달과 국가 번영의 든든한 디딤돌이었던 민생 민본의 정치철학 또한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역사적 구현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21세기 선진국 도약이라는 시대적 도전에 대한 응답 또한 1차적으로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한국적 발현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여기에 제대로 응답하지 못하는 어떤 정치세력도 어떤 정치 지도자도 진정으로 당당하게 도덕적 권위를 내세울 수 없다.
  
  롤스는 '정의론'에서 공정한 분배를 실현하기 위한 절차의 중요성을 이렇게 강조한다.
  
  "케이크를 자르는 사람이 자기 몫을 제일 마지막으로 취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케이크를 공평하게 자르는 것이 자르는 사람에게도 이익이 된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품위 있는 사회'에서 아바샤이 마갈릿은 분배하는 사람들의 행동 방식도 중요하다고 말한다.
  
  "에디오피아에서 굶주린 난민에게 음식을 나눠주는 사람들이 마치 난민들이 개라도 되는 것처럼 트럭에서 음식을 던져 줄 경우, 그런 분배는 효율적이고 공정할 수는 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모욕적이다. 이런 사회는 품위 있는 사회가 될 수 없다."
  
  트럭에서 던져주는 음식에 앞다퉈 모여들 듯, 주류기득권층에 속하는 28만여 명의 사람들이 직불금에 앞다퉈 모여드는 모습을 욕지기 없이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자기모멸의 극치다. 고백과 반성, 그리고 새출발에 대한 다짐이 어떤 제도적, 사법적 조치보다 더 중요하고 절박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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