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 가운데 가장 근본적이면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어려운 것이 교육이다. 그리고 그 교육 문제의 정점에는 대학이 있고, 그 대학 안에서 거의 눈에 띄지도 않고, 당연하게 여겨지며, 가장 비교육적인 문제가 소위 시간강사의 문제다.
그 동안 많은 사람이 시간강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고, 싸워 왔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 사이 민주화도 이뤄지고, 경제 성장도 이뤄졌으며, 사회의 인권 지표도 많이 향상됐다. 그렇지만 대학 시간강사의 문제는 단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그러는 과정 속에서 많은 방책이 제시되기도 했고, 여러 가지의 안이 제기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어느 정부도 이 문제를 해결하려 나서지 않았다. 그 사이 몇몇 시간강사들이 그 불의에 항거하거나 비관적 처지를 못 이겨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그런데, 이러한 비극에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하면서도 정작 이 문제의 근본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우선 이 문제의 현황을 파악하고 그 해결 방안을 찾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뜻을 모아 인터넷 신문에 연재를 하기로 한 것이다.
이 연재에는 시간강사 당사자의 목소리도 있고, 같은 공간에서 같은 일을 하나 그 처지가 하늘과 땅만큼이나 다른 위치의 전임 교수 목소리도 있으며 다음 세대에 대학 교육을 맡을 유학생의 목소리도 있다. 그리고 그들에게 교육을 받는 대학생의 외침도 있고, 그들에게 자식을 맡기고 있는 학부모의 외침도 있다. 신문기자의 눈도 있고, 변호사의 눈도 있으며, 평론가의 눈도 있다.
여러 사람들이 각각의 주제를 들고 따로 떨어진 공간에서 각자 쓰다 보니 어떤 경우에는 내용의 중복도 있을 수 있고, 중언부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어떤 경우에는 글의 무게나 느낌도 다를 수 있어 경우에 따라서는 독자 여러분이 그리 썩 유쾌하지 못할 수도 있다. 독자 여러분께 송구스럽기 짝이 없으나 그냥 혜량하시기만을 바랄 뿐이다.
이 글들이 바라는 것은 단 한 가지밖에 없다. 독자 여러분의 지지와 격려가 모여 시민의 힘이 되고 그 힘이 마침내 '일용잡급직 시간강사'라는 저 거대한 빙벽을 허무는 일, 그것 하나밖에 없다. 벼랑 끝 31년, 희망 없는 강의실에 이 글들이 희망의 볕이 되었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 전체 필진을 대신해, 이광수(부산외국어대 교수)
눈물도 마른 대학강사의 절망시대
국회의사당 건너편 국민은행 앞에는 농성천막 하나가 외로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지난 10월 10일로 꼭 400일째를 맞았다. 국회가 대학강사의 교원지위를 회복하는 고등교육법 개정안을 통과시켜 주기를 바라는 한국비정규직교수노동조합의 노숙농성장이다. 계절이 네 차례나 바뀌고 또 번 바뀐다. 1년 전 늦더위가 극성을 부릴 때 시작했는데 다시 겨울의 문턱을 넘어섰으니 또 칼바람을 맞으며 밤을 지셀 판이다. 그 동안 17대 국회가 마감하고 18대 국회가 개원했지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래도 이번 정기국회에 실낱같은 희망을 걸고 오늘도 기다린다.
잊을 만하면 대학의 시간강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이 들린다. 2000년 이후에만도 여섯 번째다. 그들이 왜 죽음을 선택했는지 뉘라 알랴 만은 시간강사라는 직업이 슬픈 사연을 말하고도 남는다. 지난 2월, 멀리 미국 땅에서 비보가 이 농성장에 날아와 같은 처지에 있는 이들을 슬프게 했다. 어느 여강사가 스스로 삶을 마감했다는 소식이었다. 그녀의 유서는 이렇게 시작했다. "제가 삶을 마감하면서 이 글을 쓰는 것은, 더 이상은 이와 같은 비극이 일어나길 원하지 않기 때문 (…)" "그럴듯한 구호나 정책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진정한 반성과 성찰 없이는 결코 극복할 수 없는 (…)"이라고 말이다.
그녀는 이어 "귀국 초에는 (…) 학교에 자리를 잡을 수 있으리란 마음으로 하루를 쪼개어 고시원과 독서실을 전전하며 토요일이든 일요일이든 열심히 논문을 쓰며 보냈다"고 말했다. 순수한 열정으로 치열하게 산 인생의 한 단면이다. "하지만 (…) 다른 무언가가 이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깨닫기 위해서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했다"고 이어졌다. 교수임용을 둘러싼 대학사회의 비리와 모순을 몸으로 보고 느낀 절망과 환멸의 토로이다.
시간강사도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고 지도하고 점수도 준다. 전임교원과 똑같은 일을 한다. 실제 7만여명이 이 나라 대학강의의 절반가량을 맡고 있다. 강사비율이 대학에 따라 적게는 40%, 많게는 70%에 이른다. 예술계통은 80~90%나 된다. 학생들은 시간강사를 교수님이라고 부르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대학이 이들을 교수로 보지 않는 것이다. 교육법이 이들을 대학교원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박사학위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비정규직 보호법에서도 제외된다. 강사료로 연간 받는 돈은 전임강사 임금의 고작 10% 수준이다.
1977년까지는 이들도 교육법에 따라 교원지위를 갖고 있었다. 그런데 박정희 유신정권이 1977년 10월 24일 교육법 개정을 통해 강사를 교원에서 제외시켰다. 당시 젊은 지식인들이 유신체제에 비판적이자 이들을 제도권에서 쫓아내기 위한 술책이었다. 교수사회를 체제에 순응시키려고 교수재임용제도를 도입하면서 이와 함께 전임강사와 강사를 분리시켜 법적지위를 박탈했던 것이다. 이어 전두환 5공정권이 강사 3명을 전임교수 1명으로 인정해 주는 바람에 이른바 시간강사가 양산되었다. 30년전 군사독재정권이 저지른 악행을 바로 잡아달라지만 정치권과 대학이 한 통속이 되어 눈을 감고 있는 것이다.
석-박사를 받았다고 해서 교수라는 영광의 문이 열리는 것이 아니다. 빽이 좋거나 돈이 많지 않다면 말이다. 그 동안 많은 엉터리 교수들이 숱한 물의를 일으켰다는 사실을 이 사회는 너무나 잘 안다. 교수지망생이 전임교수로 가는 길에는 대개 시간강사라는 관문을 거친다. 그런데 한 대학에서 5년 넘게 강의할 수 없으니 무작정 세월을 세며 기다린다고 해서 교수가 되는 일도 아니다. 교수가 되기까지는 고난과 고통의 긴 역정이 따른다.
시간강사는 정말 고달픈 신세다. 강의료를 시간당 쳐준다고 해서 강사 앞에 시간이란 딱지를 붙여 시간강사라고 부른다. 그런데 강의료는 보통 시간당 4만 원 전후이다. 최고 5만 원을 주는 곳이 있지만 그 절반도 안 주는 곳이 적지 않다. 일용잡급직이나 다름없는 품삯이다. 1학기에 3학점 짜리 강의를 맡으면 보통 1주에 3시간 강의한다. 대학에 따라서는 3시간 연속강의를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1주일에 두 번 나눠서 강의해야 한다. 대학에 두 번 오가다 보면 교통비도 시간도 그만큼 더 나간다. 그래서 한 달에 받는 돈은 시간당 4만 원을 쳐도 48만 원에 불과하다다. 그나마 방학기간에는 강의가 없으니 강사료를 받지 못한다. 1년에 넉 달은 일감이 없어 공치는 셈이다. 한 학기 가르쳐봤자 적게는 100만 원, 많게는 200만 원쯤 받는 셈이다. 2008년 국민기초생활보장 최저생계비(4인가족 기준)가 월126만5848원이다. 이들의 생활이 얼마나 처참한지 따로 말할 나위가 없다.
비정규직은 해고통지라도 받지만 대학강사는 다음 학기에도 강의를 맡으라는 구두통지가 없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산업재해보험, 고용보험, 건강보험, 국민연금 등 4대보험 혜택을 주는 대학은 거의 없다. 대법원이 대학강사를 근로자로 판결했지만 대학도 정부도 들은 척도 않는다. 전임강사와 달리 성과급, 교재비, 복사비, 연구지원비, 초과강의료도 없다. 연구공간이나 도서관, 연구기자재를 이용하는 데서도 차별을 받는다.
한 대학에만 매달려서는 굶어 죽을 판이다. 그 까닭에 많은 강사들이 책 보따리를 끼고 이 대학, 저 대학으로 뛴다. '보따리 장사'라는 자조적인 말도 그래서 나왔다. 적어도 세 대학은 맡아야 입에 풀칠이라도 하는데 그것이 여간 어렵잖다. 평균 강의시간이 주 4.2시간이라는 교육과학기술부 자료가 그것을 말한다. 수도권 대학이라면 몰라도 더 남쪽에 있는 대학에 강의를 다니려면 하루해가 모자란다. 새벽부터 설쳐야 밤늦게 집에 돌아온다. 강의료를 받아봤자 교통비에 식사비를 빼면 남는 게 별로 없다. 정말 빈손이지만 채용기회를 기대하며 오늘도 고속버스나 열차에 몸을 맡기고 달린다.
강의를 맡고 싶다고 쉽게 얻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연줄이 잘 닿아 끌어주고 밀어주는 선-후배들이, 아니면 스승이 있어야 강의를 얻는다. 그렇지 않다면 한 강의도 맡기 어렵다. 시간강사는 고용계약 따위가 없다. 그저 어느 과목을 맡겠느냐는 제의가 있어 좋다고 대답하면 그것으로 한 학기를 맡는다. 한 학기라고 하지만 넉 달만 가르치고 방학 두 달 동안은 돈이 안 나온다. 학생도 교수도 교직원도 방학을 기다리지만 그들과 달리 시간강사는 방학이 반갑지 않다.
일은 강의로만 끝나지 않는다. 골치 아픈 과목은 흔히 강사의 몫으로 돌아온다. 강의를 준비하려면 돈 한 푼 못 버는 방학 내내 책과 시름을 해야 한다. 수강생이 많으면 채점도 쉬운 일이 아니다. 절대평가가 아니고 상대평가라면 채점도 여간 골치 아픈 작업이 아니다. 강의준비와 성적평가에 많은 시간이 들어가지만 이런 노력에는 아무런 대가가 없다. 그나마 다음 학기에도 강의를 못 맡으면 없는 돈에 연구서적을 사서 열심히 준비한 강의교재를 언제 다시 쓸게 될지 모른다. 아무런 소용이 없을 수도 있다.
푼돈에 매달려 처자식을 돌보며 살자니 앞날이 캄캄하다. 좌절과 실의와 싸우며 하늘의 별을 따는 심정으로 교수의 꿈을 키워가며 기다려 보지만 희망이 절망으로 돌아오는 듯하다. 교수채용을 빌미로 거래된다는 억대의 뒷돈 이야기는 이제 공개된 비밀이다. 어제 오늘의 소리도 아니다. 수십 년간 자라온 뿌리 깊은 고질병이 숨통을 죄는 좌절감으로 돌아온다. 석-박사를 받느라 젊음을 불살랐으니 진로를 바꾸려고 해도 이미 늦었다. 내일도 또 책가방을 매야 하는 처진 어깨가 마냥 무겁기만 하다.
시간강사 처우개선은 오랫동안 논의되어 왔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대학이나 교육당국이나 정치권도 다 잘 안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진지하게 해결하려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다. 대학은 한결같이 재정기반이 취약하다고 말한다. 등록금을 해마다 올리더니 1000만 원 시대라고 말하는데도 말이다. 전국 어딜 가나 대학은 건축 중이다. 돈이 없다면서 이상하게 여기 저기 건물은 잘도 올라간다. 2006년 사립대학 누적적립금이 6조8503억원이나 된다. 많은 대학이 또 땅부자이다. 그 엄청난 정부예산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겠다. 각종 연구프로젝트와 관련해 예산이 방만하게 쓰인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조교들에게 이 자료, 저 자료를 취합하라고 시켜 보고서라는 것을 만들고서는 뭉치 돈을 꿀꺽한다는 따위들 말이다.
사실상 시간강사가 대학교육의 절반을 맡고 있다. 대학교육의 주역이지만 잡급직이나 다름없이 대우한다. 남보다 더 열심히 더 오래 공부한 대가가 좌절과 실의뿐인 현실에서 자학적이지만 상아탑의 노예라는 말이 실감나게 들린다. 이제 정부가 실업문제 해결 차원에서라도 나서야 한다. 역대 정권이 이런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려고 들지 않았으니 개혁에 실패했다. 야만적 착취구조를 방치한 채 어떻게 대학교육이 발전하고 세계의 유수대학과 경쟁할 수 있겠는가? 나라 안에서는 큰소리치지만 어느 대학도 세계 100대, 200대 대학에 끼지 못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죽은 대학강사의 사회, 이것은 이 나라의 수치다. 18대 국회는 그들의 절규에 귀를 기울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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