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비전에 대항하면서 상반된 경제학의 기초를 닦은 이 두 사람의 육성을 직접 듣는 것은 불가능하다. 박종현 진주산업대 교수는 최근 펴낸 <케인스 & 하이에크 : 시장 경제를 위한 진실 게임>(김영사 펴냄)에서 두 사람의 생각을 다시 복원하는 간단치 않은 작업을 수행했다.
이 책은 두 사람의 행적, 사상을 비교하면서 그들이 시장을 놓고 각각 어떤 견해를 펼쳐왔는지 요령 있게 보여준다. 또 지금의 경제 상황을 두 사람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통찰력도 제공한다. 여기서는 이 책의 내용을 토대로 최근의 금융 위기를 놓고 케인스와 하이에크의 가상 대담을 구성했다.
"하이에크의 신자유주의는 경제학이 아니라 일종의 '이념'"
마침 이 책 출간에 맞춰서 케인스 선생과 하이에크 선생의 대담을 준비했습니다. 은퇴한 지 꽤 됐는데 이렇게 대담에 응해줘서 감사합니다. 일단 이 책의 주인공으로서 소감부터 듣고 싶습니다. 박종현 교수의 책은 어떻게 보았나요? 하이에크 선생이 더 하실 말씀이 많을 것 같습니다만….
하이에크 : 네, 나는 사실 걱정을 많이 했어요. 박종현 교수는 잘 알다시피 케인스 선생을 전공한 친구잖아요. 정치 성향도 아무래도 나랑은 다를 것 같고. 그래서 케인스 선생과 나를 균형 있게 다룰 수 있을까, 이런 걱정이 들었던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막상 책을 읽어보니 양측의 입장을 균형 있게 소개하려고 노력했더군요.
물론 케인스 선생에 대한 애정이 책 곳곳에서 드러나는 게 눈에 거슬리긴 했지만…. 그거야 어쩔 수 없지요.
케인스 : 사실 나는 하이에크 선생과 같이 취급된다는 게 썩 기분이 좋지는 않았어요. 아무리 내가 은퇴한 뒤로 하이에크 선생이 노벨상(1974년)도 받고, 최근 수십 년을 풍미한 신자유주의의 토대를 닦은 경제학자로 유명세를 떨치긴 했습니다만, 저는 기본적으로 하이에크 선생의 경제학을 인정하지 않아요. 그건 뭐랄까, 경제학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이념'이니까요.
하이에크 선생에게는 "자본주의를 뛰어 넘는 삶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시장의 발견 과정을 뛰어넘는 어떠한 '선한 삶'에 대한 지식도 의미가 없지요."(119쪽) 그런 경제학이 득세한 지난 수십 년간 세상이 결딴나지 않은 것만으로도 아주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아니, 최근 미국에서 시작된 금융 위기야말로 그 징조라고 생각할 수 있겠군요.
"공황은 자연이 준 선물…가만히 두는 게 상책"
하이에크 : 케인스 선생의 그 잘난 척하는 독설은 은퇴한 후에도 여전하군요. 우선 지금 사태의 원인을 한 번 따져봐야 합니다. 저는 이번 금융 위기의 원인이 1929년의 대공황 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봐요. 지난 수년간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서 저금리 기조가 유지하면서 이렇게 형성된 과잉 자금이 증권, 부동산에 몰려 거품이 생겼습니다.
결국 거품은 터지기 마련이지요. 이번 금융 위기는 그런 거품이 아주 극적인 방식으로 터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금융 부문이 실물 부문을 압도하는 현재의 상황에서 이런 방식으로 터진 게 이상할 것도 없지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그냥 내버려둬야 해요.
AIG 같은 금융 회사가 잘못을 했으면 벌을 받아야 합니다. 위험이 큰 투자를 잘못했다면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져야지요. 다른 기업도 마찬가지에요. 당장은 힘들겠지만 이런 상황을 겪고 나면 세계 자본주의는 훨씬 더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다. 지금 미국을 비롯한 각국 정부가 뭔가를 하려는 것 같은데, 그럴수록 상황은 더 꼬일 거예요.
여러 번 강조했듯이 "시장의 자생적 질서를 계획이나 정책을 통해 바꾸려는 것은 인간의 '치명적 오만'으로, 사태를 오히려 악화시킬 뿐입니다."(79쪽) 그런 점에서 저는 한국 이명박 정부의 강만수 장관이 아주 마음에 들어요. 그야말로 내 사상의 정수를 꿰고 있는 것 같아요. 아무 것도 안 하잖아요.
"정부가 나서서 적극적 역할 해야 디플레이션 탈출 가능해"
케인스 : 아, 그 '리·만 브러더스' 말하는 건가요? 내가 보기엔 꼭 대공황 때 "공황은 자연이 준 선물"이라며 "불이 저절로 진화될 때까지" 기다리다가 스스로가 진화된 허버트 후버 전 미국 대통령 꼴을 보는 것 같던데…. 그나저나 하이에크 선생의 그 탁상공론은 여전하군요. 나는 전혀 동의할 수 없네요.
지금은 경제학자들이 상식처럼 알고 있지만, 공황이라는 건 유효 수요, 그러니까 가계는 소비를 안 하고 기업은 투자를 안 해서 생기는 거예요. 그런 점에서 보면 지금의 상황은 아주 우려스럽지요. 일단 기업이 투자를 기피하고, 가계가 소비를 줄이고 있어요. 현금을 보유하려는 경향도 커지고 있지요(유동성 선호).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결국 공황이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누군가 개입을 하지 않으면 상황은 더 심각해질 뿐이에요. 하이에크 선생이 증오하는 각국 정부가 역할을 해야 합니다. 아, 최근에 금리를 일제히 내린 건 그다지 좋은 방법이 아니었어요. "단기 금리를 인하해봤자 기업가의 사업 전망이 개선되지 않는 한 투자는 안 늘어나니까요."(67쪽)
정부가 적극적인 재정 정책을 펴야 합니다. 재정 적자를 감수하더라도 경제에 활력이 생길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특히 실업을 줄이도록 노력을 해야 합니다. 한국도 '88만 원 세대'라고 하나요? 청년 실업이 큰 문제잖아요? 정부가 나서서 이들이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프레시안 : 한국의 이명박 정부는 한반도 대운하와 같은 건설 경기 부양을 계속 염두에 두는 듯한데….
케인스 : 그러니까 '2MB'라는 소리를 듣는 거예요. 1930년대에 미국에서 의미가 있었던 방식이 있다면 21세기 한국에서 의미가 있는 방식이 있어요. 지금 한국에 필요한 건 미래지향적인 산업 구조입니다. 석유 다소비 산업이 아니라 태양·풍력 에너지와 같은 재생 가능 에너지 산업, 수출 위주의 대기업이 아닌 내수 중심의 중소기업 등으로의 전환을 고민해야지요.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중에서 사회복지 수준이 가장 뒤떨어진 걸로 알고 있어요. 사회복지 재정을 대폭 늘리는 식으로 고용 문제 해결하고 사회 안전망도 확보하고 더 나아가 내수 증대 효과도 볼 수 있는 방법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명박 대통령에게는 도대체 그런 상상력을 찾아볼 수가 없어요.
참, 한미 FTA, 금융 강국, 이런 얘기만 해도 그래요. 길게 얘기하기 전에 1933년에 내가 쓴 에세이의 한 대목을 들려줄게요. 이게 나의 대답입니다.
"사상과 지식, 예술과 친절 그리고 여행은 그 본성상 국제적이 되어야 하지만, 물건은 가능한 한 국산품이 바람직하며, 특히 금융은 국내에 기반을 둔 것이어야 한다."
"인플레이션의 시대는 가고 디플레이션의 시대가 왔다"
하이에크 : 내가 얘기를 할 차례군요. 정치인들이 케이즈 선생의 입만 바라보면서 1970년대 "생산은 침체되고 고용은 줄어드는 상황에서 물가만 상승하는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을 해결하지 못할 때 바로 나와 밀턴 프리드만 선생의 이른바 '시카고학파'가 이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했지요(152쪽).
지난 10년간 마치 인플레이션 문제는 해결된 것처럼 보이지만, 한국에서도 잘 알려져 있듯이 부동산 등의 자산 거품은 여전히 문제입니다. 그리고 케인스 선생의 주장처럼 또 재정 정책에 '올인(all-in)'하다가는 다시 '인플레이션의 시대'가 도래하지 말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지금은 디플레이션을 그냥 온몸으로 감수하는 것이 대안입니다.
케인스 : 답답합니다. 일본을 보세요. 일본은 장기 불황을 겪고 있지요. 일본은 공급이 아닌 수요 결핍으로 고통을 받고 있어요. 일본 경제의 위험은 인플레이션이 아니라 디플레이션입니다. 지금 전 세계가 바로 이런 일본의 전철을 밟을지 몰라요. 내가 여러 번 강조했지만 디플레이션은 인플레이션보다 훨씬 더 해롭습니다.
디플레이션은 10년 전 한국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금리 생활자와 채권 보유자 쪽으로 부를 재분배해요. 상인, 농부 등 모든 차입자로부터 대부자에게로, 기업가와 같이 활동적 계급으로부터 금리 생활자 등 비활동적 계급으로 부를 이전시켜요. 이처럼 사업과 사회의 안정성을 훼손시키는 쪽으로 부를 재분배한다는 점에서 디플레이션은 항상 유해합니다.(231쪽)
프레시안 : 한국의 시민들은 유가, 생필품 가격이 올라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플레이션도 걱정인데요.
케인스 : 한국은 석유를 비롯한 많은 것을 수입하다보니 최근에 서민은 재화, 서비스 가격 인플레이션을 걱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한국에서 심각한 인플레이션이 일어날 가능성은 거의 없어요. 여러 번 강조하지만 지금 필요한 것은 디플레이션에 대비하는 것입니다. 한국은 디플레이션의 고통을 이미 10년 전 뼈저리게 체험했잖아요?
"양극화는 '선한 삶'을 추구하는 걸 막는다"
프레시안 : 두 선생님이 최근 금융 위기와 공황의 도래 가능성을 놓고 어떤 생각을 가지는지는 대강 얘기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한국 사회의 방향을 놓고 한 마디씩 해주시지요. 특히 한국은 이른바 '양극화'의 문제가 계속 심화하고 있어서 경제 위기를 바라보는 시민의 불안감이 더 큽니다.
하이에크 : "한국에서 대기업과 중소기업, 수출 기업과 내수 기업, 부유층과 빈곤층의 격차가 확대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가슴 아픈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를 인위적으로 해결하려면 부작용만 커집니다. 지금은 낡은 시스템에서 새롭고 효율적인 경제 시스템으로 이행하는 과도기입니다.
다소 고통스럽더라도 시장의 자생적 질서를 꽃피울 수만 있다면 장기적으로 경제 전반의 체질이 개선돼 저축이 늘고 투자도 늘어 성장 잠재력이 커질 수 있을 겁니다. 이 과정에서 소득 분배에 너무 집착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아요. 부자가 부유해지는 거 배 아플 필요도 없어요. 부자가 잘 살면 나중엔 그 혜택이 사회 전반에 골고루 퍼집니다."(209쪽)
그런 점에서 저는 이명박 대통령과 강만수 장관, 아, 리·만 브러더스라고 하나요? 그들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어요. 대처 이후로 딱 마음에 드는 정치인입니다.
케인스 : "소수의 승자와 다수의 패자로 양극화된 사회에 진정한 '자유인'이 설 자리는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분열 사회'는 결코 건강하고 창조적인 경쟁 사회가 아닙니다. 성장만 하다고 해서 그 과실이 결국 골고루 돌아간다는 주장도 현실과 다릅니다. 세계화와 기술 진보로 국민 경제 내의 연관 관계가 크게 약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진행되는 성장 일변도의 실험은 다수의 국민을 빈곤의 늪으로 내몰 가능성이 큽니다. 경제는 어느 정도 성장을 하면 '풍요 속의 권태'에 빠지고, 결국 저성장의 성숙 경제로 이행할 수밖에 없어요. 이젠 달라질 필요가 있습니다. 시민을 비용 절감의 대상이 아니라 유효 수요의 원천이자 생산성을 이끄는 창조적 기업가로 바라보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해요."(209~210쪽)
프레시안 : 케인스 선생의 얘기를 들으니 아까 잠깐 언급했던 '선한 삶'이라는 이상을 한 번 더 강조하는 것 같습니다.
케인스 : 맞습니다. 그러고 보니 아까 대답을 다 못했네요. 나는 박종현 교수의 책에서 특히 저의 '선한 삶'이라는 문제의식을 강조한 게 마음에 들었습니다.
"우리는 수단보다 목적이 높이 평가되고, 유용성보다는 선이 선호되는, 어떻게 하면 시간을 고결하게 사용할 수 있을지 가르쳐주는 사람과, 들판에 핀 백합처럼 자연 그대로의 사물로부터 직접 기쁨을 이끌어낼 수 있는 유쾌한 사람을 존중하는" 그런 사회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121쪽)
프레시안 : 긴 시간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은퇴한 두 분의 아이디어가 경제학자를 비롯한 많은 사람이 '선한 삶'을 만들어가는 데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