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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라이트는 이 땅의 보수를 죽이려는가?"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뉴라이트 역사관 따져보기 ⑰

1987년 군사 독재 종식 후 민주화 과정이 진행되는 한쪽에서 비장한 한 마디 말이 터져나왔다. "이 땅의 보수는 죽었는가?"

이 말에 당시 사람들은 생뚱맞은 느낌을 우선 받았다. 진보는커녕 진정한 보수주의조차 용납되지 않던 수십 년 반공 독재에서 겨우 벗어난 마당에, 보수가 갑자기 설 땅을 잃은 것처럼 호들갑을 떨다니? 그래서 그 말은 '보수'가 아니라 '수구' 세력의 안타까움을 담은 말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여운이 남았다. '진보'의 물결에 휩쓸린 세상 속에 '보수'를 표방하는 세력으로 민정당 하나만이 고립되어 있는 상황에는 '균형'의 문제가 분명히 있었다. 그래서 김영삼 민주당의 신한국당 합류를 놓고도 "호랑이굴에 들어가야 호랑이를 잡는다"는 말이 통할 여지가 있었던 것이다. 보수가 분명한 (진보가 아니라는 뜻에서) 민주당이 민정당과 합쳐 수구정당 아닌 보수정당을 이끌어내는 것도 의미 있는 일로 볼 수 있었다.

그 이후 신한국당-한나라당에서는 '합리적 보수'가 하나의 중요한 화두가 되었다. 선거 제도가 살아난 상황에서 수구정당 간판으로 대중의 지지를 모을 수 있겠는가. 당내 권력은 수구집단이 쥐고 있어도, 겉에 내건 간판에는 '보수'라고 적혀 있었다. 이 간판을 뒷받침하기 위해 정말 합리적 보수주의자라 할 만한 사람들도 얼마간 끌어들였다. 민주화 세력이 모두 '진보'를 표방하고 있는 동안, 신한국당-한나라당은 '보수'의 이름을 선점하는 것을 생존 전략으로 삼았다. 진정한 보수에 대한 사회의 잠재 수요를 이용한 것이다.

뉴라이트가 단기간에 큰 세력을 모은 배경에는 이 합리적 보수의 여망이 있었다. 그 성공에는 기수로 나선 안병직의 이미지가 큰 몫을 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1980년대까지 그는 서울대에서 특출한 권위를 가진 교수였다. 운동권의 명망은 차치하고, 나 같은 보통 학생도 그의 열정적 연구 자세를 존경했다. 이번 작업에 착수하기 전까지만 해도 어느 자리에서 그의 이야기가 나오든 나는 "안 선생님"이라고 그를 지칭했다. 이상한 얘기가 간간이 들려도, 학자로서의 그의 본질과는 관계 없는 것이려니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그에게 교수님, 총재님은 몰라도 "선생님" 소리는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학자로서 할 수 없는 말을 너무 많이 했다. 왜 이렇게 되었나? 현실 정치에 관여한다고 해서 학자의 자세를 꼭 무너뜨려야 하는 것이 아닐 텐데. 학문이란 것도 이렇게 덧없는 것이었나 서글픈 생각의 한쪽으로, 그의 학문의 한계에서 뉴라이트 이념의 한계를 읽을 수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정치 이념은 역사관에 근거를 두는 것이다"

뉴라이트에 '뉴'를 붙인 까닭 역시 그냥 보수 아닌 합리적 보수로 봐달라는 뜻일 것이다. 게다가 경제사학계의 태두 안병직이 앞장섰으니, 학문적 근거도 제대로 갖추리라는 기대감을 가지게 할 수 있었다. 서울대 교수 출신이 보수 정권에 영입된 이가 한둘이 아니지만, 학자로서 권위가 안병직만한 사람이 내가 보기에는 없었다. 더구나 그가 나선 것은 보수 진영이 정권도 쥐지 못하고 있을 때 '백의종군'의 모양새였다.

뉴라이트 운동의 출발점으로 새로운 역사관을 내세운 것도 그럴싸한 일이다. 정치 이념은 역사관에 근거를 두는 것이다. 진보 진영에 비해 보수 진영이 역사관을 소홀히 해 온 것은 그 동안 이념 없이 권력만을 주물러 온 상황을 말해주는 것이다. 건전한 보수건 합리적 보수건 의미 있는 보수가 되려면 역사관 정도는 당당히 내세울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안병직의 뉴라이트'라면 뭔가 볼 만한 역사관을 들고 나올 것을 기대했다. 정치계만이 아니라 학계에도 한 차례 경종이 되기를 바랬다. 나는 국사학계 주류의 풍조에 불만이 많은 사람이다. 그래서 '국사 해체' 같은 소수의 주장도 열심히 살펴보며 그 좋은 뜻을 잘 받아들이려 애쓴다. 중국에 체류할 때 교과서포럼 관계 보도를 이따금 접하며 그쪽에서도 뭔가 괜찮은 이야기가 많이 나오기를 바라고 있었다.

"역사학자 아무개"가 "뉴라이트 역사관 따져보기" 작업을 한다고 나서는 것을 보고 독자들 중엔 "음, 누가 역사학계를 대표해서 방어에 나섰나 보군." 생각한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연재를 본 분들은 알겠지만, 나는 역사학계를 대표하는 입장이 아니다. 학교를 떠난 지 오래되면서, '역사학자' 타이틀도 반납해야 옳지 않을까 가끔씩 고민도 하는 사람이다. 내 딴엔 역사 공부라 생각하며 공부를 계속하지만, 학술 논문을 낸 지 10년이 다 돼가는 사람이 '역사학자'를 자칭하기가 멋쩍어지는 것이다.

나서는 입장을 굳이 가리자면 '역사평론가'라 할까? 작업에 임하며 첫 번째 원칙으로 마음먹은 것이 사실 관계를 다투지 말자는 것이었다. 사실 관계는 그 분야 연구자들의 몫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뉴라이트 역사관이 한국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를 비평하는 것이다. 작업을 통해 내가 얻은 결론은 뉴라이트 역사관이 엄밀한 의미에서 역사관이라 할 수 없는, 하나의 정치적 구호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라는 안경을 통해서만 세상을 바라보는 편협한 관점"

부정적 결론을 단정적으로 내리는 이유를 간단히 정리하겠다. 역사관이라면 역사의 일부분을 보는 눈이 아니라 역사 전체를 보는 눈이다. 그런데 뉴라이트 역사관은 자본주의 발생 이전을 보지 못한다. 개인주의를 전제로 하는 자본주의를 문명의 유일한 형태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이런 눈으로는 '자본주의 이후'를 내다본다는 것도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자본주의 자체도 극히 경직된 의미로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왜 이렇게 좁고 비뚤어진 시각인가? 인간을 보는 시각이 좁고 비뚤어졌기 때문이다. 역사관의 기초가 되는 것이 인간관이다. 인간이란 것이 어떤 것인가 탐구하는 마음으로 역사를 바라볼 때 역사가 의미를 갖고 파악되는 것이다. 인간을 이기적 존재로만 규정하고 인간에게 그 이상 관심 없는 사람의 시선 앞에서 역사는 아무 의미도 보여주지 않는다. 그 사람은 자기 관점 안에만 갇혀 있으며, 역사로부터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다.

역사관 이전에 인간관이 문제인 것이다. 인간을 어떻게 '이기적 존재'로 단정 지을 수 있을까. 그런 눈으로 역사를 보면 역사가 증발하고 사회를 보면 사회가 무너진다. 뉴라이트 논설에서 제일 눈에 띄는 점이 민족을 부정하는 것인데, 부정의 대상은 민족만이 아니다. 자유방임 경제에 방해되는 모든 가치가 부정된다. 민주화를 찬양하는 것처럼 쓰기도 하지만 사실은 민주화를 경제 발전의 부산물로 볼 뿐이다. 민주주의와 경제 성장 가운데 한 쪽을 골라야 한다면 그들의 선택은 뻔한 것이다.

광복보다 건국이 더 중요하다며 요란 떠는 것을 보면 민족보다 국가가 더 소중하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국가를 정말 소중하게 여기는 것도 아니다. 뉴라이트에 경도된 이명박 정부가 일본과 미국 대하는 자세를 보라. 대한민국은 뉴라이트에게 애정의 대상이 아니라 이용의 대상이다. 뉴라이트의 모든 가치는 재물에 걸려 있다. 자본주의라는 안경을 통해서만 세상을 바라보는 편협한 관점 때문이다.

뉴라이트는 강한 자의 자유를 외치며 그 단결을 부르짖는다. 강한 자들이여, 어째서 약하고 못난 자들에게 민족이란 이름, 윤리란 이름으로 발목을 붙잡히는가! 우리가 힘들여 번 돈을 왜 그들에게 세금이란 이름으로 빼앗겨야 하는가! 우리의 권리, 우리의 재산, 우리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뭐든지 다 하자!

"'질서 속의 발전'을 바라는 보수주의자의 뜻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길"

편협한 관점은 받아들여지는 범위도 좁을 수밖에 없다. 정치 이념이라면 넓은 범위의 지지를 받고자 애써야 할 것인데, 이처럼 인간도, 세상도, 역사도 좁게 보는 관점을 기껏 만들어낸 까닭이 뭘까? 그리고 이렇게 좁아터진 관점이 지금의 한국에서는 어째서 이토록 큰소리를 칠 수 있는 것일까?

편협한 관점에도 장점이 있다. 초점이 뚜렷하다는 것이다. 합리적이고 유연한 관점은 많은 사람들을 수긍시킬 수 있지만, 편협하고 과격한 관점이 좁은 범위의 사람들을 단결시키는 집중력을 따라갈 수 없다. 이 집중력이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민주적 질서의 미숙성으로 인해 단기적 전술이 장기적 전략보다 잘 통하는 사정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는 민주주의의 안정적 시행에 힘든 여건이 아직도 남아있다. 그 하나는 오랫동안 쌓여 온 전제 통치의 경험으로 인해 민주적 질서 감각이 체질화되어 있지 못한 문제다. 지식층, 중산층의 시민들도 아직까지 흔히 대통령에 대해 '제왕'적 관념을 가지고 있는 실정이다. 또 하나의 문제는 빈부 격차로 나타나는 중산층의 불안정성이다. 경제적 가치에 대한 과민성이 민주적 가치에 대한 인식을 가로막는 상황이 쉽게 벌어진다. (자본주의-민주주의 선진국에서 체제의 중추 노릇을 한 '중산층'이 한국에 자리 잡을 수 있을지 나는 회의적으로 본다. 그러나 한국의 경제적 중간 계층에게는 '중산층' 지향 의식이 강하므로 그 지향과 현실 사이의 괴리감을 통해 나타나는 불안정성을 "중산층의 불안정성"이라 해 둔다.)

현 정부는 이 두 가지 문제를 고착시키거나 오히려 더 악화시키려 노력한다. 정책 추진에서 합리적 방법보다 가급적 무리한 방법을 택하는 (방송 장악이 대표적이다) 태도에서부터 대통령 중심의 전제적 통치를 복원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국회에서도 다수당인 한나라당이 대통령 측의 '벼랑 끝 전술' 앞에 제 구실을 못하고 있지 않은가.

양극화를 심화하려는 의도는 더 노골적이다. 죽어 있지도 않고 죽어가고 있지도 않던 경제를 "살리겠다"고 나선 것은 분배를 외면하고 성장만을 바라보겠다는 뜻이다. 출범 1년이 안 되었어도 그 동안의 실적과 태도에서 이 뜻이 충분히 확인된다. 파이가 커지면 약자의 몫도 생긴다 하지만, 그 약자의 몫이 강자의 뜻에 좌우되도록 만든다는 것 아닌가.

이것은 사회의 질서와 발전이 아니라 갈등과 퇴행을 바라보는 길이다. '질서 속의 발전'을 바라는 보수주의자의 뜻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길이다. 나는 '합리적 보수'가 우리 사회의 발전을 이끌어나가는 주체로 일어서기 바라며, 그럴 만한 여건이 갖춰져 왔다고 생각한다. 무슨 까닭으로 편협한 뉴라이트 담론이 이 시점에서 보수 진영을 지배하고 있는 것일까?
▲ 6월항쟁을 계기로 통치의 대상이던 국민이 정치의 주체로 나아갈 길이 열렸다. 그 직후의 대선에서 노태우 후보가 히트시킨 '보통사람'이란 말이 당시의 분위기를 대변해 준다. 그 보통사람들이 내다보던 변화에 반대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지금, 그들은 어디서 뭘 하고 있나? 그들은 영영 정치의 주체가 될 수 없는 것일까? ⓒ고명진·6월민주항쟁계승사업회


"이 땅의 합리적 보수는 죽었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보수주의자다. 이런저런 불평을 하기는 해도 우리 사회가 근본적으로 괜찮은 사회라는 생각이 20년래 바뀌지 않는다. 다들 지금까지 살아온 식으로 꾸준히 애쓰며 살아가면 충분히 좋은 사회를 이뤄나갈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나는 혁명적 변화도 기적적 변화도 바라지 않는다.

나 같은 보수주의자가 1987년 이후 양산되었다. 세상이 바뀌어도 크게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을 6월항쟁 당시에는 보수주의자의 소질을 가진 사람들이라도 가지고 있었다. 이 사람들이 20년 동안에 보수 성향을 드러내게 되었다. 민주화의 성과가 완전하지 못한 상태에서도 민주화가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에 만족하고, 경제가 빡빡해도 옛날과 비교해 흐뭇해하며 도로 나빠지지 않기만을 바란다. 남북관계의 점진적 발전으로 전쟁의 위협이 사라지는 것도 반가운 일이다. 지켜야 할 권력이나 큰 재산도 없으니, '수구'가 될 리도 없고, 세상이 그저 조용했으면 해서 '합리적 보수'를 바라는 사람들이다.

이 합리적 보수주의가 아직까지 효과적인 정치적 표현의 길을 열지 못하고 있는 까닭은 여러 가지겠지만, 나는 국회의원 소선거구제가 대표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 거대 정당에 유리한 소선거구제가 합리적 보수주의자의 선택에 제약을 준다. 보수를 표방하는 한 쪽 정당은 수구파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진보를 표방하는 한 쪽 정당은 아직도 정책 노선을 안정시키지 못하고 있다. 양대 정당이 구태를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가 이들에게 '적대적 공존'을 보장해 주는 소선거구제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보다 근원적인 문제는 기형적 안보 의식에 있다고 본다. 미국을 '혈맹'이라 부르며 무리하게 매달리는 경향이 냉전 해소 후 20년이 다 되도록 한국 사회 일각에서 걷히지 않는 까닭이 무엇인가? 군사적 안보를 위한 의존 관계의 필요성이 사라졌지만, 정치적 안보, 경제적 안보를 스스로 책임지려는 자세가 아직도 세워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제도 문제도 정치적 안보 의식이 제대로 자라난다면 60년 전 눈 감고 베껴 온 미국식 제도를 재검토하게 될 것이고, 경제정책 노선도 경제적 안보의식이 갖춰지면 철늦은 신자유주의 바람에 휘말리지 않게 될 것이다.

뉴라이트의 목적은 진보 진영에 대한 도전이 아니라 합리적 보수의 봉쇄다. 그람시가 말한 '문화 헤게모니(cultural hegemony)'를 보수 진영 내에서 장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문화 헤게모니의 구축을 위해서는 '상식' 체계의 확립이 필요하다. 진보와 경쟁해 국민을 설득하려는 것이라면 진보와 공유할 수 있는 상식을 확보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뉴라이트가 실제로 문화 헤게모니를 획득한 것은 보수 진영의 기존 조직인 한나라당 내에서일 뿐이다.

총선 이후 뉴라이트가 표면에 대거 나선 것도 한나라당의 '합리적 보수' 요소가 목소리를 내지 못하도록 가로막기 위한 목적이 첫 번째 아닐까 생각된다. 한나라당에 아직까지 제 정신 가진 사람들이 있다면, 이렇게 신자유주의 일방통행으로 밀어붙인 뒤의 선거를 어떻게 감당할 지 생각 좀 해 보기 바란다. 나도 한 마디 해줘야겠다. "이 땅의 합리적 보수는 죽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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