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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으로 가는 이명박 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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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으로 가는 이명박 정권

김민웅의 세상읽기 <272> 그들에게 국민을 위한 나라는 없다

"파시즘"의 본질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자본주의의 위기국면에서 기존의 민주적 제도와 장치를 하나씩 해체하고 전 사회를 자본이 독점할 수 있는 방향으로 개조하는 것이다. 결국 소수의 특권계급에 의한 국가 권력의 사유화가 극단화되고, 일반 서민 대중은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일체의 부담이 전가되는 대상이 될 뿐이다.
  
  따라서 "공기업의 민영화"라는 대자본의 잔치는 "선진화"로 포장되고, 비정규직의 확대재생산으로 자본의 이윤을 일방적으로 보장해주면서 사회적 양극화는 끝 간 데를 모르게 한다. 공동체 전체를 위해 쓰여야 할 사회적 자산은 소수 특권 계급에게 사유재산으로 넘어가고, 대다수의 국민들은 점차 빈곤의 위협에 직면하게 된다. 가난한 자들은 날이 갈수록 사각지대로 몰려나간다. 권력은 그로 인해 몸부림치는 이들을 잠재적 위험으로 취급한다.
  
  파시즘에서 국민 대중을 위한 나라는 존재하지 않는다. 권력자와 그의 동맹세력에게만 의미 있는 국가가 있을 뿐이다. 국가는 기만적인 법치, 공권력과 그에 준하는 세력을 내세운 폭력, 그리고 이데올로기적 공세를 다채롭게 구사하면서 국가 전 영역을 장악해나간다.
  
  권력과 자본의 동맹체제가 하는 일
  
  이런 과정에서, 권력과 자본의 동맹체제는 자신들에게 먼저 필요한 일부터 정책과 법으로 만들어 가면서, 정작 절실한 서민대중의 요구는 뒷전으로 미룬다. 종합부동산세 흔들기, 부자와 대기업에 대한 감세정책은 그런 맥락의 소산이며, 국민들은 이들이 자기들 것을 따로 챙겨버리는 바람에 비어가는 나라의 곳간을 채우기 위한 소작인이나 머슴이 된다.
  
  민주적 견제와 제동만 없다면 국가의 기능이 무소불위의 힘을 쓸 수 있다는 것을 알아가게 되는 권력자는 날이 갈수록 영구집권의 야망을 키워간다. 힘 있는 20퍼센트의 세력만 확보하면 나머지는 모두 쉽게 가지고 놀 수 있는 대상이라고 여긴다. 다수의 지지가 필수적인 것이 아니다. 국가의 사유화와 폭력적 지배, 자본의 독점체제에 대한 저항과 문제 제기는 즉각 진압의 대상이 된다. 시민사회는 위축되어가고 반대투쟁은 질식 상태로 압박당해간다.
  
  민주주의는 파시즘 권력에게 최대의 적이며, 일상의 작은 저항도 파시즘에게는 초동단계에서 토벌해야 하는 사안이 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언제 어떤 방식으로 그 저항이 권력을 겨냥하는 집단적 운동으로 번져나갈지 모르기 때문이다.
  
  가령, "유모차 시위"는 광우병 쇠고기를 미래의 주역에게 먹이는 야만을 중지하라는 요구이자, 평화적 축제의 상징이었으나 이 나라의 권력자는 아동보호법을 들먹이며 젊은 엄마들을 모욕하고 위협한다. 아이들을 보호하는 책임을 저버리는 정부에 대한 질타를, 거꾸로 엄마들에게 돌린다. 문제는 자신에게 있지 않고 언제나 문제를 제기하는 쪽에 있다는 논법이 권력이 된다. 이런 현실에서 권력의 말과 논리는 철저하게 기만적이 된다. 뻔한 일을 두고 모두를 속이는 것이다.
  
  경찰은 비밀경찰이 되어가고 검찰은 친위대로 바뀐다
  
  경찰은 비밀경찰이 되어가고 검찰은 친위대로 바뀌어간다. 어느 누구도 이들의 공격을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당하게 될지 모르는, 안심할 수 없는 상황으로 밀려간다. 자신은 예외일 수 있다는 가정은 무너져간다. 사법부는 권력에 대한 굴종을 미덕으로 알게 되고 의회는 무력한 거수기 집단으로 변모해간다. 법은 이 과정에서 민주주의의 중추신경을 마비시키는 칼이 되고, 저항하는 정치인들은 다각도의 압박을 통해 무력화시키거나 제거해나간다. 언론과 방송이 권력의 선전도구가 되도록 하는 것은 필연적인 과제가 되고 자신에게 충성을 확약하지 않는 자기 진영 내부의 세력에게도 권력자는 자신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가를 입증시켜나가는 일들을 벌인다.
  
  한편, 역사에 대한 해석은 언제나 과거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누가 주도하는가의 문제와 직결된다. 파시즘은 권력에 대한 찬사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정치적 미학을 역사관으로 삼는다. 좌편향 척결 운운하면서 "북한 교과서를 베겼다"는 식의 무지와 모략을 앞세운 집권세력의 교과서 개정 시도는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식민지 체제가 근대적 발전에 기여했다는 일제미화와, 이 나라 근현대사 독재의 출발 이승만 정권을 옹호하려는 기도는 민족적 자주와 민주주의의 힘을 철저하게 분쇄시키려는 자들의 이데올로기적 음모다. 그들이 주목하는 그 시기는 다름 아닌 일본 제국주의라는 아시아 파시즘과, 그 파시즘의 잔재세력들과 손잡은 독재자 이승만의 정치적 야만이 전개되었던 때가 아니던가? 파시즘의 자식답다.
  
  파시즘은 역사적 환경과 국가발전 단계, 그리고 기존의 민주주의가 작동해온 사회적 역량의 수준에 따라 여러 가지 변형이 존재할 수 있다. 특정한 역사의 실례가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경우는 없다. 목적은 동일하나 방식은 다양한 결과를 보인다. 이명박 정권이 파시즘인가 하는 논란은 이런 각도에서 정리되어야 할 것이다.
  
  이명박, 신자유주의의 파시즘적 관철
  
  이명박 정권은 신자유주의에 기반 한 자본의 독점체제를 파시즘적 방식으로 관철하고 있는 중이다. 따라서 이에 대항하는 전선은 보다 광범위해야 한다. 반 신자유주의 전선만이 아니다.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사멸시키려는 파시즘에 저항하는 반파시즘 전선에 동의하는 세력 모두가 함께 할 때, 권력과 자본의 야만적 동맹체제와 맞서 싸울 수 있다.
  
  저쪽은 동맹으로 권력을 엄호하고 있는데, 이쪽은 갈라져서 각개전투를 벌이고 있다면 승리는 당연히 없다. 국민 대중들은 그러한 세력에게 결코 힘을 실어주지 않는다. 자기들끼리도 힘을 합치지 못하는 자들에게 나라의 미래를 맡길 리 만무다. 이 나라 민주주의를 지켜온 진보세력 전체의 단결만이 파시즘으로 가는 길을 막을 수 있다. 이 위기의 때에 단결하지 않는 것은 역사에 대한 죄악이다.
  
  진보 진영 내부에서, 나는 너희들과 달라, 하면서 각기 자기 잘난 척만 해서 될 일은 어디에도 없다. 작은 논쟁을 마무리 져야 큰 싸움을 할 수 있다는 가정은, 큰 싸움에서 작은 논쟁이 무의미해지는 역사의 역동성을 외면하는 처사다. 작은 싸움에서 혹여 이기고, 큰 싸움에서 패배하는 것은 뭐라 해도 패배다. 진보진영 내부의 논쟁이 분명 적이 아닌데도 자칫 상대를 적으로 판정하고 색출하는 과정이 되는 것은 어리석다. 동지를 발견하는 지혜가 없는 논쟁은 스스로를 무기력하게 만든다. 총론을 정리하지 못하면 역사는 방향을 상실한다.
  
  진보세력 단결하지 못하면 역사에 죄악
  
  희망을 봉쇄하는 권력이 지금 우리 앞에서 정부로 존재한다. 이런 정부에게 저항하는 것은 그래서 희망의 시작이다. 혼자 길에 나서지 말라. 함께 하지 않으면, 우리는 파시즘의 밥이 된다. 다시 서로 손을 잡고 나가는 현장에서 우리는 새로운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KBS나 MBC에 앞서 가장 먼저 붕괴될 것으로 들 보았던 YTN 민주 투쟁이 지금 우리에게 일깨우고 있는 것은 적지 않다. 민주주의와 진보의 내일을 위해 하나로 뭉치는 이들 앞에서 역사는 우리를 이대로 방치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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