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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까지 '전국 대학생 노래자랑'만 할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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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까지 '전국 대학생 노래자랑'만 할 건가"

[나도원의 '대중음악을 보다'] 여전히 씁쓸한 대학가요제

대학가요제가 방송 중인 저녁, 거리는 한산해진다. 이튿날 학교와 직장에선 대상곡이 좋았네, 은상곡이 더 좋았네 하며 옥신각신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렇게 전국적인 관심을 받는 이벤트이자 커다란 오디션 무대인 대학가요제를 통하여 새로운 스타와 히트곡이 탄생한다.

아, 물론 지난 주말이 아니라 옛날 얘기다. 지레 나이가 들었는지 요새는 재미가 없다고 죄 없는 세월을 탓하며 상심할 것까진 없다. 음악 좀 듣는다는 이들과 적지 않은 음악관계자들 역시 같은 생각이니까. 심지어 어릴 적 학교에서 벌거벗고 창피를 당하는 꿈을 꿀 때 마냥 저 혼자 민망해한 사람도 여기 있다.

'전국대학생노래자랑'?

요즘 대학가요제의 주인공은 참가한 학생들이 아니라 손님으로 모셔진 인기가수들이다. 실제로 그들의 축하공연이 더욱 돋보인다. 기존의 키워드, 즉 '대학생과 그들의 창작곡'이 더 이상 관객동원과 시청률을 보장하지 못하자 기성가수들의 차별화된 공연으로 이 구멍을 메우고 있다. 다행히 동심을 간직한 청년들은 환호를 보내준다. 아무리 연예인이 '일반인'과 다른 특정 신분으로 받아들여지고 유명인의 친구들까지 TV로 불러들이는 세태라지만, 놀라운 것은 이러한 장면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질 정도로 주객전도가 공공연하다는 사실이다.
▲ 2008대학가요제 대상 수상팀 '파티캣츠' ⓒMBC

이제야 얘기지만 대학가요제가 '전국대학생노래자랑'으로 불리며 놀림거리가 된지는 꽤 오래되었다. 송해 선생님에게 사회를 청하고, 요즘 'TV말'로 "K본부 악단을 데려오자"는 아이디어는 꽤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이 농담이 결코 특정 프로그램에 대한 비하가 아님을 분명히 해두고 싶다. 초대가수가 들어가고 어느 마을 부녀회장이나 이발소 아저씨가 나오려는 순간에 미리 채널을 돌리는 실용적 행위는 최소한 전국노래자랑을 보는 동안에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대학가요제는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잠시 되감기가 필요하다. 1970년대 전반기에 한국 대중음악은 한창 새로운 페이지를 채워가고 있었다. 하지만 통기타 문화와 그룹사운드 붐이 떠받치던 달뜬 무드는 신기루처럼 한순간에 흩어져버린다. 정권의 하수인들은 가요정화운동이라는 그럴듯한 현수막을 내걸고 대중음악의 허리를 끊고 질적으로도 퇴보시키는 공로를 세웠다. 그들이 시커먼 전화통과 볼펜을 손에 들고 사명감을 실천한 사전검열에 의하여 음악인의 무의식에는 자기검열이란 병균이 심어졌고 소재와 표현은 제한됐다. 여기에 이른바 대마초 파동까지 겹치자 거대한 감옥 같은 사회의 숨구멍과 창문은 닫혀버리고 만다.

이 진공상태에 새 숨결을 불어넣으며 탄생한 것이 대학가요제를 비롯한 여타 경연대회들이다. 기교는 기성가수들보다 못했지만 학생들의 순수한 음악은 매력적이었다. 대학가요제가 출발부터 신분 차별적이었음은 지적할만하나, 당시엔 대학사회가 문화선도의 역할을 했다는 것을 어느 정도 인정해도 큰 무리는 없어 보인다. 대학가요제가 처음 열린 1977년부터 커다란 안경과 부스스한 머리를 뒤집어쓰고 등장한 신선한 음악인들, 그리고 시대의 공기와 함께 남겨진 노래들을 굳이 나열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1988년의 무한궤도(신해철)와 1993년의 전람회(김동률) 이후에는 이렇다할 수혈을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참신하지도 대중적이지도 않은, 스타도 반짝이는 노래도 없는

대중음악은 물론 사회 전반이 이 무렵부터 급격한 변동을 맞은 탓이 크다. 가수지망생들은 어릴 때부터 스스로 알아서 기획사 앞에 줄을 섰고, 자기 음악세계를 지닌 예비 뮤지션들은 "나가봤자…"란 인식을 갖게 되었다. 특히 인디음악 씬이 형성된 이후로 이러한 형태의 경연대회는 사실상 그 효용을 상실하고 만다. 그러면 남는 것은? 성형수술 덕분인지 낯익은 얼굴들이 넘쳐나듯, 안타깝게도 대개는 어디에서 본 듯하지만 원판보다는 못한 얼굴들이다. 순수하다기보다는 수수하다고 해야 얼추 맞다. 새로움에 대한 기대를 품고 먼 길을 돌고 누비며 찾아간 골목에서 고작 옆집대문과 마주쳐야 한다면 허탈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사정이 이러하니 '실용음악과' 학생들의 수상은 예정된 일이었다.

참신하지도 대중적이지도 않고, 스타의 탄생도 반짝이는 노래도 없는 대학가요제는 외형은 커지고 화려해졌으나 속으로는 B급 이벤트로 전락했다. 매번 대학문화가 기성 상업대중문화에 완벽하게 종속되었음을 설득력 있게 확인시켜줄 뿐이다. '대학생다운 무엇', 이를테면 낭만과 진지함 대신 자유로움과 발랄함을 적어 넣으며 만들어낸 이미지가 오히려 박제를 요구하고 있다. 듣고 싶은 것을 들려주는 것만이 대중성은 아니다. 하긴 성공이 지상과제요, 전화기를 팔겠다며 혁명가 운운하는 CF가 고맙게도 운동신경으로 하여금 리모콘을 던져버리고 싶도록 자극해주는 시절에 대학문화 운운 자체가 시대착오로 들릴지도 모른다.

횟수의 늘어나는 것만으로 전통이라 불릴 수 있다면 그것만큼은 훌륭히 해냈다. 하지만 열심히 지켜왔다는 것 외에 그다지 훌륭한 것이 없으니 문제이다. 물론 서로 경쟁하던 가요제들이 사라지고 참가지원팀들의 수과 수준에도 변화가 있었으니 적잖은 고민이 있었으리라는 정도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또한 폐지론 제기 이후 나름의 개선노력이 시도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럼에도 결과가 있어야 평가와 판단이 가능한데, 검색어 순위에 잠깐 오르는 성과 말고는 결과 자체가 없다는 사실까지 양보하기는 힘들다. (결과와 성과를 구분하지 않고 사용하는 이 사회의 아량과 포용력은 참으로 마음에 든단 말이다.)

과감한 방향선회가 가능하다면…

"어제 대학가요제 봤어?" "아니." 대화는 여기에서 심드렁하게 끝나고 만다. 한때 사랑받던 비둘기가 어느 밴드의 앨범 제목처럼 '하늘의 쥐'가 되어버렸다. 짧지 않은 역사가 아깝다면, 그래서 과감한 방향선회가 가능하다면 존재가치는 남겨놓을 수도 있다. 그러다보면 찾고자 하는 것은 물론 예상치 못한 다른 것까지 찾게 되는 법이다.

어쩌면 젊음의 한 페이지에 꾹꾹 눌러쓴 노래와의 만남까지 가능할지도 모른다. 괜한 기대일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번에는 혹시…' 했다가 '역시나…' 하며 씁쓸해하고 말자니 조금은 안타깝다. 간혹 사라진 어떤 얼굴을 다시 만나고 싶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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