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 62%가 이명박 대통령의 '대운하 포기' 발언에 대한 불신을 갖고 있는 상황에서 한반도 대운하가 국정과제에서 누락된 대목은 실질적인 포기 의사로 볼만 하다. 그러나 대운하가 빠진 대신 행정구역 개편이 새롭게 국정과제에 진입한 건 '판 흔들기'의 노림수가 여전히 펄떡거리는 증좌로 읽힌다.
내년엔 불 붙는다
청와대는 행정구역 개편 논의와 관련해 "아직 명확한 방향은 정해지지 않았지만 임기 내에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강한 의지를 보였다. 이 문제는 지난 9월 이명박 대통령이 '국민과의 대화'에서 추진 의사를 공식화 한 사안이자 최근 정세균 민주당 대표와 이 대통령의 회동에서 두 사람이 의기투합한 사안이다. 중앙 정치권에선 교집합이 넓다는 얘기다. 게다가 민주당은 "내년 중 입법을 끝내야 하는 사안"이라며 더 적극적이다.
명분은 여야가 엇비슷하다. 청와대 관계자는 "100년 전에 형성된 골격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교통과 통신의 발달, 생활권 변화 등을 충분히 담고 있지 못해서"라고 설명했다. 민주당 박병석 정책위의장도 "갓 쓰고 짚신 신고 한양 가던 시절의 얘기를 지금까지 계속 이어오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맞장구쳤다. '정치적 고려' 없이 국가 백년대계를 위한 밑바탕을 만들자는 '의도의 순수성'을 여야가 합창하고 있는 꼴이다.
그러나 행정구역 개편의 폭발력을 생각하면 가장 '정치적인' 얘기가 행정구역 개편 논의라는 지적이다. 2010년 지방선거는 물론이고 선거구제 개편까지 맞물리면 국회의원 선거와도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홍준표 한나라당 원내대표가 "정개특위를 구성해 지방행정 개편은 물론 선거법과 국회법 개정을 함께 논의하자"고 한 건 두 문제가 별개로 굴러갈 수 없는 현실의 반영이다.
여의도 정치권과 학계에서 개헌론이 무르익는 정도를 보면 행정구역 개편 논의의 출구는 결국 개헌이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다만 청와대는 자칫 현직 대통령의 레임덕을 초래할 위험이 있는 탓에 개헌까지 나아가는 것에는 부정적인 눈치다.
이처럼 일단 링에 오른 여·야·정이 샅바 싸움을 벌이는 모양새이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아직 내놓지 않고 있다. 민주당이 도를 폐지하고 234개 시·군으로 돼 있는 지방 행정체계를 60~70개 단위로 재편하자는 안을 내놓은 정도다. 이에 대해 이 대통령이 "정부도 곧 안을 내겠다"고 했고, 국회에선 여야 간의 특위 구성 논의가 오가고 있는 만큼 오래지 않아 행정구역 개편 논의는 급물살을 탈 것으로 보인다. 이미 일고 있는 지방의 반발은 그 뒤의 문제다.
결국은 '토목경제'
이처럼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정치적 노림수'가 엇물려 있는 가운데 청와대가 이 시점에서 이를 국정과제에 포함시켜 공식화한 건 주목할 만하다. 복합적인 중장기 전략이 함께 녹아있기 때문이다.
우선, 이론적으로 행정구역 개편 논의는 보수진영의 이데올로그인 서울대 박세일 교수의 오랜 지론이 상당부분 침투됐다. 박 교수는 올해 초 '한반도 선진화 혁명 : 철학과 전략'이라는 리포트를 통해 '분권화'를 선진화 전략의 5대 과제로 제시하면서 "모든 돈과 권한을 현장 중심으로 분권화해야 한다. 우선 정부행정조직부터 철저히 분권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방자치제도를 정치적 독립은 아니지만 경제사회 정책에 관한한 사실상 독자적 운영이 가능한 형태로 재편하는 '경제적 연방제' 개념을 도입, 중앙정부는 네트워크의 중심에서 단지 최소한의 기획과 소통, 조정 역할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세금을 지방세로 전환하는 것까지 검토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일각에선 당초 빠져있던 행정구역 개편이 뒤늦게 국정과제로 채택된 배경에 다른 목적이 버무려져 있는 게 아니냐는 의심을 한다. 행정구역 개편은 정부가 경제 부문에서 추진하고 있는 광역화 전략과 동일 궤도에 놓여있어서다. 광역경제권 구축 역시 이날 발표된 국정과제에 행정구역 개편과 패키지로 포함돼 있다.
정부는 앞서 소위 '5+2' 광역경제권 활성화 전략을 위해 향후 5년간 50조원을 투자키로 결정했다. 수도권, 충청권, 호남권, 대경권(대구·경북), 동남권(부산·울산·경남)을 축으로 강원권, 제주권을 특별광역경제권으로 배치해 개발하는 전략이다. 이를 위해 이번 정기국회에서 국가균형발전 특별법을 통과시킨다는 방침이다.
이렇게 되면 노무현 정부의 '균형발전'은 이명박 정부의 '광역발전'으로 완전히 다른 옷을 갈아입게 된다. 노무현 정부가 지역별로 새로운 거점을 육성하는 구상이라면 이명박 정부의 주안점은 기존 대도시를 중심으로 연계 네트워크를 확장해 권역을 넓히는 쪽이다. 자연히 이명박 정부의 계획에는 지역간 간선 고속도로망이나 고속철도망, 국제항만, 국제공항 등의 사업이 핵심적으로 배치된다.
요컨대 결국 '토건'으로 귀결된다. 광역권별로 토목공사가 경쟁적으로 벌어지는 게 불가피해진다. '지역경제 살리기'란 경제적 구호와 '선진화'라는 명분이 어우러지는 최상의 합작품이 곧 행정구역 개편과 광역경제권 활성화 카드에 녹아 있는 셈이다. '토목공사'를 '국운 융성'이라고 포장했던 한반도 대운하 발상과 정확히 일치한다.
여기에 최근 행정구역 개편을 위해 내년에 국민투표에 붙이는 방안까지 솔솔 거론되고 있으니 2010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정치적으로 판을 크게 흔들 수 있는 기회까지 얻을 수 있다. 계획대로 착착 진행될지는 미지수이지만, 고전에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이명박 정부로선 남는 게 많은 장사다.
정부가 이걸 하겠다고 했고, 야당은 들러리를 서고 있는 형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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