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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고 첫날 밤' 그들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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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고 첫날 밤' 그들을 만나다

[현장] "강남'성모'병원이 아니라, 그냥 '강남'병원입니다"

촛불이 일렁이는 얼굴에 서러움이 흘렀다. 난생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 섰지만, 쑥스러운 기색은 없었다. 아니, 눈 앞에 있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듯 했다. 마음의 눈에 비친 지난 2년 세월을 돌아보느라, 다른 감정이 스며들 틈이 없었다.

까만 그을음이 묻어나는 촛불을 들고 선 이들은 얼마 전까지 서울 강남성모병원에서 일하던 파견 노동자들이다. 불과 몇 시간만 지나면, 이들은 해고자 신분이 된다. 이들에게 힘을 보태기 위해 70여 명이 급히 모였지만, "내일이면 이 병원에서 일할 수 없다"는 서러움을 녹이기에는 힘에 부쳤다. 지난달 30일 저녁, 이 병원 앞에서 열린 촛불문화제 풍경이다.

이날 서울 강남성모병원은 간호 보조 업무를 맡고 있던 파견 노동자 65명 중 28명을 일방적으로 해고했다. 남은 사람들도 곧 차례로 계약이 해지되고 재계약은 없을 터였다. 2년이 지나면 정규직으로 고용해야 하는 의무 조항을 피해가기 위한 병원의 결정이었다. (☞관련 기사: "신부님, 우린 1회용 주사기만도 못하나요?")

같은 시각. 병원 로비 의자에서는 같은 처지의 파견 노동자 김성희 씨(43, 가명)가 새우잠을 청하고 있었다. "오늘 밤 12시가 지나면 우리는 병원 소속이 아니라 외부인이 된다"던 그는 "촛불 문화제에 나가 몸을 가누고 있을 자신이 없다"고 했다. 해고 통보를 받고 지난 9월 17일부터 계속 병원 건물 밖 천막에서 농성을 한데다가 그 사이 사이 동료와 환자들을 생각해서 근무 시간을 지켜 일했기 때문이다. 그의 몸은 녹초가 다 돼 있었다.

"해고 날짜를 받아 놓고도 그, 사람의 정이란 게 뭐길래…."

그는 쓸쓸하게 웃었다.

"살면서 용역업체 직원을 만날 일이 있으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해고 날짜를 받아 놓고도 그, 사람의 정이란 게 뭐길래…." 파견 노동자 김성희 씨(43, 가명)가 토로했다. 해고 통보를 받고 지난 9월 17일부터 계속 병원 건물 밖 천막에서 농성을 하면서 그 사이 사이 동료와 환자들을 생각해서 근무 시간을 지켜 일해 온 탓에 녹초가 된 몸이었다. ⓒ프레시안

지친 것은 몸뿐이 아니었다. 마음도 지쳐 있었다. 언제 들어올 지도 모를 용역업체 직원의 존재는 상상만으로 힘겨웠다. 무섭고 걱정도 됐다.
김 씨는 "용역업체 직원들에게 끌려나가면, 그럼 정말 우리 일하는 거 끝나는 건가"라며 혼잣말을 했다.

병원 측이 밤 12시를 기해 용역업체 직원들을 투입할 것이란 얘기가 여기저기서 들려오고 있었다. 건물 밖에서 한창 촛불문화제가 진행되고 있는 사이 병원 정문을 뺀 나머지 출입문은 용역 경비원들에 의해 다 잠겼다. 정문은 용역 경비원들이 지키고 있었다. 사실상 병원 로비는 폐쇄된 상태. 당연히 분위기는 삼엄할 수밖에 없었다.

김성희 씨는 "살면서 용역업체 직원과 만날 일을 겪을 것이라곤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김 씨의 삶은 대체로 평온했기에 더 그랬다. 결혼 전 잠시 직장을 다녔을 뿐, 결혼을 하자마자 일을 그만 두고 아이를 낳고 정신없이 살아온 '평범한' 40대일 뿐이었다.

"기껏 '내 삶'을 찾았는데…갑자기 떠나라니"

그러던 김 씨가 마흔을 넘겨 다시 직장을 구한 것은 '내 삶'에 대한 생각 때문이었다. 그냥 어느날 문득 자신을 돌아보니, 아이들은 커가는데 자신의 삶이 없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가족이란 테두리 안에만 갇혀 있는 삶을 다른 방향으로 이끌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다시 내딛은 사회에서 만난 직장이 바로 강남성모병원이었다.

간호조무사는 특별한 자격증 없이도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오랜 시간 가정 안에서만 지냈던 그에게 이만한 직장은 더 없을 법도 했다. 2005년 8월부터 강남성모병원에서 보낸 시간에 대해 그는 "일은 힘들었지만 직장 생활이 만족스러웠다"고 회고했다. 가족이 아닌 동료들과 부대끼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서 삶은 활력을 되찾는 것 같았다.

어쩌면 그래서 더 갑작스런 해고 통보는 그에게 '견디기 힘든' 일이었는지 모른다.

"얼마 전에 해고 통보를 받고 같은 처지의 동료들과 그런 얘기를 했어요. 누군가 '너는 정규직이 되면 뭐 할래?'라고 물었더니 사람들이 그 얘긴 전혀 안 하고 되려 '동료 누가 이래서 좋았는데' 얘기만 하는 거예요. 함께 일했던 같은 부서의 간호사, 직원들에 대해 얘기하다 보니 '정들었던 만큼 헤어지는 것이 더 힘들구나'라는 걸 깨달았죠."

그 '정' 때문일까. 그는 "부서 사람들이랑 좋았던 기억이 많아서 함부로 욕할 수가 없다"고 했다.

"이 병원이 내가 비정규직이라고 차별했던 것을 생각하면 내가 일했던 부서도 밝히고 속 시원히 욕도 하고 싶어요. 하지만 3년간 일해서인지, 마음이 조금 남아 있나 봐요. 그런데 요즘은 시간이 갈수록 병원은 자꾸 미워지네요. 병원이 존재하는 한 이 직업이 없어지진 않을 거예요. 우리들이 필요하긴 하지만, 돈 좀 더 준다는 이유로 이렇게 자르다니…"

"아이들에게 참되게 살면 훌륭한 사람 된다고 가르쳤는데, 잘못 가르쳤어요"

김 씨는 해고 통보를 받고 보름 간 집에 거의 신경을 못 썼다. 남편이 생활비 벌어오라고 등 떠민 것도 아닌데, 그냥 그만 두면 안 되나. 아니면, 정든 직장을 절대 떠날 수 없다는 의지 때문일까.

그는 둘 다 아니라고 했다.

"나야 생계때문에 하는 게 아니니 당장 그만 둬도 상관 없지만, 세상이 너무 부조리하단 걸 깨달았어요. 오늘 오전 10시 반부터 병동을 돌며 동료들과 환자, 그 가족들에게 우리 처지를 알렸죠. 근무 시간 아닐 땐 로비에 앉아서 사람들에게 피켓을 보여줬어요. 사람들이 다 쳐다보고,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생각이 드니까 제 눈에선 하염없이 눈물이 흐르고. 그때마다 마음은 오직 하나였어요. 우리처럼 억울한 사람들이 많다는 걸 꼭 알려야겠다."

이런 그를 보며 가족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남편과 아이들이 싫어하지는 않았을까.

그는 최근 이틀이나 천막에서 날을 새느라 집에 들어가지도 못했다고 했다. 그때 남편이 아이들을 데리고 응원을 왔다. 그는 가족들에게 고맙기도 했지만, "아이들 보기 민망했던 마음이 더 컸다"고 말했다. 자신이 '투쟁'이라는 단어가 쓰인 조끼를 입고 제대로 씻지 못한 초라한 모습이어서가 아니었다. 그동안 아이들을 잘못 가르쳐 왔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애들한테 참되게 살면 인정받고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가르쳤는데, 이런 문제를 보여주고 나니 나 스스로 모순을 가르쳤다는 걸 깨달았죠. 참되게 살아도 인정받지 못하는 사회에 살고 있으니까요. 우리 아이들이 커서 이런 사회의 모습이 여전하다면 어떻게 하죠?"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김성희 씨와 얘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시간은 자정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촛불문화제도 끝나고, 해고된 파견 노동자들은 그들의 투쟁을 지지하러 찾아온 사람들과 병원 로비 한쪽 구석에 모였다. 회의를 해야 한단다. 주요 논의 사항은 "용역업체 직원이 들어와 이들을 끌어낸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였다.

그 회의가 한창인 시간, 홀로 복도에 앉아 있는 박종묵 씨(33)를 만날 수 있었다. 고민이 많은 얼굴이었다. 그는 "이렇게 투쟁을 시작했지만, 언제까지 버틸지 자신이 없다"며 이 싸움이 길어지면 생계도 막막해질 테고, 처절해질까 봐 두려운 게 솔직한 마음"이라고 고백했다.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다가 당장 먹고 살 길이 막막해 파견업체를 통해 이곳 병원으로 오게 됐다"는 그는 그동안 업무가 너무 힘들어 여러 번 그만둘까를 고민했었다고 한다. 일부러 주말 근무도 자청하고, 밤 근무도 했었지만, 한 달 월급은 170여만 원.

그는 "싸움이 길어지면, 다른 일 찾아 갈 것"이라고 했다. 박 씨는 "그래도 이 업종을 떠나지는 않을 것"이라며 잘라 말했다. "이젠 나이도 있고, 모아둔 돈으로는 다른 일을 준비해서 새로 시작할 엄두가 안 난다"고 덧붙였다. 다른 병원으로 가도 똑같은 파견 노동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되면 결국 그는 2년 마다 병원을 옮겨다녀야할 지 모른다.

회의가 점점 길어질수록, 그는 생각이 더욱 많아지는 것 같았다.
▲지난 30일 해고된 강남성모병원 파견 노동자들을 응원하러 온 사람들. ⓒ프레시안

"이제 글 좀 써볼까 했는데"

드디어 자정이 지났다. 누군가 "진짜 해고됐네"라는 탄식을 내뱉었다. 순간, 결코 좁지 않은 병원 로비엔 정적만이 흘렀다. 자정이 지나도 용역업체 직원들은 들이닥치지 않았다. 파견 노동자들은 흩어져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용역업체 직원들이 새벽에 언제 들이닥칠지 모를 일이었다.

그 긴장감 속에 또 다른 파견 노동자인 김세영 씨(28)를 만났다. 그는 "해보고 싶은 일이 많다"고 했다.

"2006년에 이 병원에 들어와 1년 6개월쯤 지나니까 업무도 익숙해지고, 이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조금씩 할 수 있겠다 싶었어요. 데이, 이브닝, 나이트 3교대를 하느라 정신 없었고, 일하는 내내 병원 구석구석을 누비며 일을 처리해야 해서 8시간 일하고 나면 자느라 바빴는데, 이제야 일이 익숙해지고 내 시간을 갖게 됐어요.그런데 이제 와 나가라니…."

영어 공부도 하고 싶고, 해외 여행도 가보고 싶고. 제일 하고 싶은 건 "죽을 때까지 연애만 하다가 죽는 것"이란다. 그런 세영 씨는 최근 글 쓰는 재미에 고된 일도 즐거웠다고 했다. 그러나 이제 일이 익숙해지고, 자신만의 시간을 갖게 돼 열심히 살아보려는 의지를, 병원이 꺾어 버렸다.

2년 계약이라지만, 그동안 "3개월 씩 계약하거나, 심지어 1개월 단위로도 계약을 했었다"는 그는 "불안정한 삶이 가장 두렵다"고 했다. 대학 졸업 후 직장다운 직장을 잡을 수 없었던 세영 씨는 노래방 카운터도 보고, 식당에서 음식도 날라 봤다. 하지만 늘 '아르바이트'였다. 그리고 2년을 일한 강남성모병원에서도 결국 끝은 내 의지와 상관 없는 '해고'였다.

김 씨는 "새로 짓는 병동을 보면서 '2년 계약이지만 일이 숙련된 우리를 다시 써 주겠지'라는 희망을 품었었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그 희망은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늘 "우리는 한 식구"라고 강조하던 간호부 수녀들은 이들에게 미안하단 말 한마디 없이 해고를 통보했다.

"그럴 수는 없어요. 나에겐 노동자로서의 권리가 있거든요. 다른 일을 구할 수도 있겠지만, 이곳에서 최선을 다해 싸워볼 거에요."

1일 새벽. 졸린 눈을 부비며 자다 깨다를 반복하는 파견 노동자들의 아침은 그렇게 고되게 다가오고 있었다.

언제까지 긴장해야 할까

새벽 5시. 병원 업무가 하나 둘 시작되기 시작했다. 로비를 지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용역업체 직원들은 여전히 나타나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으려나…." 누군가 혼잣말을 했다. 그러나 아직 모를 일이었다. 병원의 근무 교대 시간은 5시 30분. 교대 시간을 틈타 용역업체 직원들이 들이닥친 사례가 있다며 이들은 여전히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파견 노동자들이 용역업체 직원들에게 끌려가는 것을 함께 막아보겠다며 로비에서 밤을 지낸 지지자들도 이 시간이 되자 슬슬 긴장하는 눈치였다.

그 가운데도 시간은 흘렀다. 드디어 날이 밝았다. 자신이 일하던 병원 로비 바닥에 앉아 보낸 '해고의 첫날 밤'은 그렇게 지나갔다. 병동 밖 세상에 동이 터올수록 파견 노동자들의 머리 속은 더욱 복작해지는 모양이었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밤을 이렇게 보내야 할까?

밤새 제대로 못 자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삼삼오오 모여 있는 이들을 뒤로 한 채 병원을 나서면서 전날 밤 촛불문화제 때 한 시민이 했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왜 가톨릭 정신을 구현하겠다는 병원에서 십자가 고통의 길을 파견노동자에게 강요합니까. 이런 곳이 무슨 강남'성모'병원입니까, 그냥 '강남'병원이지."
▲강남성모병원 광고. 손님에게만 친절한 '강남'병원? ⓒ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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