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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1딸, "아빠, 이길 때까지 '길표'만 입을 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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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中1딸, "아빠, 이길 때까지 '길표'만 입을 께요"

[인터뷰] 해고노동자 김석진씨의 '8년투쟁', 대법원 3년째 '직무유기'

현대미포조선 해고노동자 김석진씨(45). 8년간의 해고 복직투쟁, 1백80일간 노숙철야농성과 43일간의 단식농성 등으로 노동계에서는 이미 유명인사다. 김씨가 지난 5일 '이번에는 정말 끝장을 보겠다'는 심정으로 상경, 혹한속에서 매일 12시~오후1시까지 서초동 대법원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김씨가 상경해 대법원 앞에서 1인시위를 하는 이유는 김씨의 해고무효확인소송이 대법원에서 무려 35개월째 계류돼 있기 때문이다. 지난 2000년, 2002년 울산지방법원과 부산고등법원은 복직판결을 내려 김씨의 손을 들어줬지만, 사측 현대미포조선은 5명의 변호사외에 대법관 출신 변호사까지 선임해 지난 2002년 다시 대법원에 상고했다. 그로부터 무려 35개월이 하염없이 흘렀다.

김씨 같이 월급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노동자에게 35개월이란 기간은 견뎌내기 쉽지 않은 시간이다. 일반 정치 관련 사건의 경우에는 판결까지 수 년이 걸려도 당장 먹고 사는 일에 지장이 없지만, 해고무효확인소송 같은 경우에는 하루하루가 피말리는 시간이라고 김씨는 말했다. 김씨는 "부당해고 관련 생계형 사건의 경우 5개월 이내에 판결을 내릴 것을 권고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대법원이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고 탄식했다.

지방법원, 고등법원까지 잇따라 내린 복직핀결을 대법원이 35개월이나 질질 끌고 있다는 사실은 한국에서 '노동자'가 얼마나 외로운 존재인가라는 사실을 새삼 절감케 하는 동시에, 대법원의 '외면'에 대한 분노를 일으키는 대목이다.

특히 나날이 빚이 싸여가는 까닭에 번듯한 브랜드 붙은 옷가지 하나 못사주고 있음에도, 한창 '브랜드' 제품을 좋아할 나이의 중학교 1년생 딸내미가 "아빠, 대법원에서 이길 때까지 '나이키'나 '리복' 대신에 '길표'만 입겠어요"라며 김씨에게 힘을 북돋아주고 있다는 증언은 대법원 관계자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케 할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프레시안>은 지난 2000년 오랜 단식으로 무릎에 병이 깊이 들어 오래 서 있지도 못한다는 김석진씨를 10일 만났다. 인터뷰는 1인 시위와 점심식사 와중에, 이후 2호선 서초역 역무실에서 본격적으로 1시간여동안 진행됐다. 대법원의 신속한 판결을 기다리며, 김씨와의 인터뷰 전문을 싣는다. 편집자주

다음은 김씨와의 인터뷰 전문이다.

***김석진 해고, 노조활동이 원인...노조는 방기?**

프레시안 : 1997년 당시, 해고 사유는 무엇이었나?
김석진 : 상사명령불복종과 하극상, 유인물 배포를 통한 회사 명예훼손이다. 회사가 근거로 드는 명령불복종과 하극상은 조장이 지사한 근무시간 조정을 받아들이지 않고 항의한 일을 말한다. 조장은 부당하게 나만 휴일근무, 야간근무를 배정하지 않았다.

알겠지만 '현대'라는 간판이 그럴 듯한 대공장 노동자이지만, 기본급은 높지 않다. 때문에 잔업이나 휴일 특근을 하지 않으면 생계유지하기가 빠듯하다. 현장 노동자들은 앞다투어 조금이라도 일을 더해 수당을 더 얻기위해 노력하는데, 별다른 이유 없이 나만 잔업을 시키지 않았다. 항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프레시안 : 유독 사측이 당신만 잔업을 시키지 않은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 것 같다.
김석진 : 당시 나는 소위 민주파라고 할 수 있는 현장 조직 '민주노동자회' 의장 신분이었다. 현대미포조선 노조는 1987년 이후 민주노조가 건설된 이래 훌륭한 투쟁을 전개하기도 했지만 90년대 중반부터 민주노조 정신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97년은 노조의 '어용화'가 최고조로 진행되던 때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민주노조'의 깃발과 비타협적 태도를 지니고 있던 '민주노동자회'와 의장인 나는 사측과 노조에게는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였다. 근무조 편성에 대한 불이익도 이런 관계 속에서 나온 것이다.

프레시안 : 노조가 다소 '어용화'됐다고 하더라도 조합원이 부당하게 해고가 됐으면, 형식적이라도 어떤 대응이 있었을 것 같다.
김석진 : 밖에서 보는 것과 실질적인 노조의 모습은 다르다. 해고 당시에 가장 화가 났고, 억울하다고 느낀 것은 노조의 무관심과 그것을 넘어선 배신행위였다. 당시 노조 부위원장은 집으로 찾아와 '각서'를 쓰면, 해고 대신 정직으로 처리해준다는 말을 들었다며 머리를 숙일 것을 요구했고, 위원장은 부당해고 진정을 넣은 노동위원회에 '조합활동과 무관한 개인적 문제에 따른 해고'라는 입장이 담긴 의견서를 제출할 때는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위원장은 위원장 임기를 마치고 과장으로 진급했다. 현대 미포조선은 8년동안 무분규사업장이었다. 해고되던 97년이 무분규 첫 해다. 미포조선은 그 해 허울 좋은 노사화합결의대회를 열고 있다.

***1백80실 철야노숙, 43일간의 단식**

프레시안 : 울산에서 단식, 노숙철야 농성 등 해고복직투쟁을 벌였다.
김석진 : 2000년 2월부터 1백80일 회사 정문에서 철야노숙투쟁을 전개했다. 그 이후에는 43일간의 단식투쟁을 했다. 힘들고 고된 투쟁이었지만, 울산 지역 노동·사회단체들이 함께한 따뜻한 투쟁이었다. 민주노총 울산본부, 현대중공업·현대자동차 노조에서 매일 2백여명이 참여하는 집회를 열고, 복직투쟁을 함께 했다.

당시 현중·현대차 노조는 노조 수련회에 갈 때면, 노조원 1인당 1만원씩 모금해 지원금을 보내줬다. 뿐만 아니라 각 종 사회단체에서 지지방문해 손을 잡아주었다. 1백80일, 43일 노상단식투쟁이 길고 힘들었지만, 외롭지는 않았던 기억이다.

프레시안 : 97년 해직되고 나서 무려 2년 뒤에 본격적인 해고복직투쟁에 돌입한 셈인데, 그 전에는 무엇을 했나?
김석진 : 해고가 되고 나서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져들었다. 너무나도 부당한 이유로 하루아침에 해고된 것도 받아들일 수 없었고, 노조가 앞장서서 사측 입장을 옹호하는 것은 더욱 참기 힘들었다. 노동위원회 부당해고 진정 이외에는 해고 이 후 근 6개월 동안은 아무일도 하지 않고 시간을 흘려보냈다. 세상에 대한 분노와 억울함만 가슴에 품은 채로 술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던 중 활동을 하면서 알게된 한 선배가 일자리를 마련해줬다. 울산에는 현대중공업과 현대자동차 하청공장이 많은데, 그곳에는 신분조회에 걸리기 때문에 감히 입사할 엄두도 못 냈다. '현대'와 관련 없는 업체에 들어갔다. 해고 이후 6개월 뒤 처음 들어간 곳이 '중기회사'였다. 거기서 3개월, 샤시 공장, 용접 공장 등을 전전하며 10개월 정도 일했다.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했던 시기였다.

***"주위 도움이 8년을 버티게 했다"**

프레시안 : 해고 이후 8년이 지났다. 노조에서 생계비도 지원을 받지 못하는 상황인데, 집안 경제를 어떻게 유지해 왔나?
김석진 : 살던 아파트를 저당 잡히고 대출받았다. 또 지인들에게 부탁을 해 얼마간 빌리기도 했다. 현재 빚을 6천만원 정도 안고 있다. 이밖에 앞서 말한 민주노총 울산본부나 현중·현대차 노조에서 보내 주는 지원금도 큰 보탬이 됐다. 2000년 43일간 단식이 끝날 무렵 현대차 노조에서 양말 판매운동을 벌여 무려 4천 박스를 팔아 지원금을 보내줬다. 2천만원 정도였던 기억이다.

또 지인들의 소개로 아이들을 학원에 3년정도 무료로 보낼 수 있었다. 피아노와 미술을 가르쳤는데 원장 선생님이 배려해줬다. 이런 주위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버틸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김씨에게는 중학교 1년생과 초등학교 3학년생인 두 딸이 있다)

프레시안 : 2000년(울산지방법원), 2002년(부산고등법원) 법원에서 복직 판결을 받기도 했는데, 그 때 심경은.
김석진 : 한 마디로 세상이 모두 내 것 같았다. 그리고 좀더 당당하게 조합원들을 바라 볼 수 있어 뿌듯했다. 그러나 해고 직후에도 사측은 나에 대해 근거없는 비방을 지속했다. 나를 파렴치한 사람으로 매도하고, 사실과 다른 내용을 날조해 날 비도덕한 인간으로 몰아세웠다. 내용을 잘 모르는 일반 조합원들 중에는 사측의 날조를 그대로 믿고 나에게 돌팔매를 던지기도 했다.

나도 모르게 위축되기도 했고, 정신적으로 자괴감에 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법원의 복직판결은 사측의 주장이 날조였음을 분명히 해줬고, 나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정문앞에서 농성을 할 때나 출퇴근하는 조합원들을 만날 때 보다 당당하게 이야기 할 수 있었다.

***노모는 뇌졸증으로 돌아가시고...**

프레시안 : 해고 복직 투쟁을 하는 와중에 노모가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김석진 : 8년 시간 중 가장 괴롭고 힘든 순간이었다. 아들이 해고됐다는 소식을 듣고 당신은 크게 충격을 받으신 모습이셨는데, 급기야 뇌졸중으로 쓰러지셨다. 그 때가 1999년 5월이었다. 당신은 2002년 12월 운명하실 때까지 뇌사상태로 계셨다. 2000년 노숙철야농성과 단식농성을 한 기간 말고는 당신 곁에서 한 치도 떠나지 않았다.

아내와 주야 교대로 당신 옆을 지켰다. 식물인간 상태였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가래를 뽑아주는 석션을 해야했다. 돈이 없었기 때문에 병원에서 모시지 못하고 집에서 모셨다. 정말 힘든 시기였다. 괜한 노동운동을 한답시고 해고까지 돼서 당신이 쓰러지셨다는 자괴감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중1 큰딸 "아빠, 대법원에서 이길 때까지 '길표'만 입겠어요"**

프레시안 : 해고복직투쟁이나 파업이 장기화되면 가정 불화가 일어나기도 한다. 8년이란 긴 시간 동안 가족들이 많이 힘들었을텐데...
김석진 : 아내는 노동운동과는 전혀 무관한 사람이다. 하지만 언제나 나의 입장을 지지해줬다. 아내가 "당신이 하는 일이 옳다고 생각한다. 끝까지 해봐라"라고 말할 때 큰 힘이 됐다.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이 어려서 아버지가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인지 잘 모를 수도 있지만, 수차례 대화를 하며 이해시키려고 노력했다.

아이들 방 한 벽면에 '님을 위한 행진곡'을 써 붙여놨다. 아이들도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하는 모양이다. 큰 아이는 <전태일 평전>을 가장 감명 깊에 읽었다고 말한다. 사춘기에 막 접어들어서 그런지 '아빠를 이해한다'고 어른스럽게 말하더라. 또 학교 친구들이 '나이키', '리복' 등 메이커 제품을 입지만, 자기는 내가 대법원 승소할 때까지 '길표'만 입을 거라고도 말한다.

그런 아이들을 보면 한편으로는 마음이 아프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힘이 솟고, 자신감이 생긴다.

***대법원, 35개월동안 묵묵부답..."이번만큼은 끝장을 볼 것"**

프레시안 : 1심, 2심이 각각 1년여만에 판결이 내려졌다. 반면 3심은 35개월이나 계류중인데...
김석진 : 보통 정치 재판의 경우 판결이 2~3년 넘게 나오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다. 하지만 부당해고 관련 생계형 사건의 경우 5개월 이내에 판결을 내릴 것을 권고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월급으로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노동자에게 35개월이란 계류 기간은 너무 가혹하다.

사측은 1,2심 패소 이후 5명의 변호사에서 대법관 출신 변호사를 한 명 더 선임했다고 한다. 35개월 동안 계류된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전관예우가 아닐까 추측하고 있다. 아마도 판결을 장기간 계류하면 알아서 나가떨어지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오는 2월28일 담당 대법관이 퇴임한다고 들었다. 퇴임 전에 판결을 내리기를 기대할 뿐이다. 주위에서는 오히려 사건이 후임 대법관으로 넘겨져 또다시 수년을 기다려야 할지 모른다고도 한다. 우려도 되고 기대도 된다.

프레시안 : 서울에서 계획은 무엇인가?
김석진 : 상경한지 불과 닷새 됐다. 현재까지는 매일 12시~1시까지 대법원 앞 1인 시위를 진행하고, 주위의 도움을 얻기 위해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 관계자들을 만나고 있다. 상황 추이에 따라서 투쟁의 수위를 높혀갈 생각이다.

서울에 올라올 때, 이번 만큼은 '끝장을 보리라'고 작정했다. 서울 체류기간이 열흘이 될 지, 한달이 될지, 몇 년이 될 지 모른다. 기다릴 만큼 기다렸고, 인내할 만큼 참았다. 대법원이 조속히 판결을 내려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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