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에서 품위를 기대하기는 어렵지만 최근 여야의 모습에는 눈살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다. 오고가는 언사들이 가히 시정의 드잡이 수준이니 말 그대로 '막가는' 상황으로 보인다. 그런 중에도 여야는 몇 가지 점에서 의미있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여와 야의 갈등,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
한나라당 이명박, 박근혜 갈등이 '경선룰'을 둘러싼 '적나라한 권력투쟁'의 성격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데 비해 노무현과 정동영, 김근태, 천정배 간 갈등은 열린우리당 창당의 의미, 분양원가 공개, 한미FTA, 대연정, 통합신당론 등 핵심적인 정치ㆍ정책사안을 중심으로 하는 논쟁의 형식을 띠고 있다. 비록 독설과 막말로 인해 토론의 내용적 심화가 이뤄지지는 못하고 있으나, 적어도 두 사람의 입장 차이에 따른 표차까지 계산돼 나오는 이명박, 박근혜 간 '경선룰 투쟁'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정치토론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언뜻 보면 이명박, 박근혜 간 갈등은 사소한 실무적 차이 때문인 것처럼 보인다, 경선에 반영할 여론조사 비중을 비율로 하느냐 숫자로 하느냐를 놓고 싸우는 것이니 국민들 입장에서는 도무지 관심이 가지 않는 일이고 한나라당 지지자들의 입장에서도 마냥 답답하기만한 일일 것이다. 그래서 "이념이 다른 것도 아니니 아무 안이든 빨리 정리하고 가자"는 게 한나라당 지지자들과 범우파의 간절한 심정들일 것이다. 강재섭의 중재 노력도 범우파의 이런 여망을 등에 입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이념이 다르지 않으면 합의도 쉬운 것일까. 이명박, 박근혜 캠프 주변에서 서로 다른 '4자필승론'이 유포되는 상황이 말해주고 있듯이 이념이 다르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합의가 쉽지 않은 것은 아닐까. 작은 차이를 넘어설 대의명분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말이다. 반면 바로 이 지점에서, 그러니까 철학도 다르고 상황인식도 다르고 정치적 선택지도 완전히 다른 것처럼 보이는 대통령과 여권 대선주자들 간의 갈등은 오히려 여러가지 가능성을 키워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각자의 주장을 제대로 모아낼 수만 있다면 말이다.
'갈등'을 '생산적 논쟁'으로 끌어올릴 수 있을까?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승리 이후 우리사회는 소수의 깃발부대에 의한 단기접전식 기동전 승부가 아니라 지루한 일진일퇴 속에서 헤게모니를 다투는 진지전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진지전 국면에서는 복합적 전선운용이 필연적이다.
민생개혁 전선과 평화통일 전선과 지역주의 극복 전선과 반노, 비노, 반한나라 전선 등이 서로 교차하고 착종하며, 연합하고 결합된다. 여러 전선들 중에서 어느 하나를 배타적으로 선택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전선들을 어떻게 배치하고 결합시켜내는가가 중요한 국면인 것이다. 진지전 국면에서 운용되는 복합전선의 특수성에 비추어 볼 때 대통령과 대선주자들 간의 갈등은 정치적 결별로 이어질 수도 있지만 '다름'을 인정한 정치연합으로 재구조화 될 수도 있다. 물론 여기에는 '다름'을 연합의 출발점으로 전환할 수 있는 민주적 지도역량과 엄중한 역사현실에 기반한 최소한의 정치적 신뢰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대통령과 대선주자들은 지금이라도 '반노, 비노' 식의 정치공학적 타산과 그로 인해 촉발된 한편으로는 의도적이고 한편으로는 감정적인 정치공방을 즉각 중단해야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무엇이 우리사회의 문제인지, 개혁의 전진을 위해, 지역주의 극복을 위해, 평화체제 구축을 위해, 민생안정과 경제활성화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찾는 일인 것이다.
'반노 중도주의' vs '비노 개혁주의'
복합적 전선운용의 요체는 여타의 전선을 결합시켜 낼 주요 전선의 확고한 구축이다. 따라서 무엇을 주요 전선으로 설정할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 우선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 문제와 관련한 논쟁틀은 이렇게 정리될 수 있겠다.
첫 번째 구도는 지지도 추락이 열린우리당의 과격한 개혁드라이브와 노무현의 좌충우돌식 정치행태에 기인했다고 보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경제활성화를 앞세우는 중도주의를 표방하고 노무현과는 철저히 차별화 하는 '반노 중도주의' 노선을 주요 전선으로 설정하는 것이다.
두 번째 구도는 지지도 추락의 원인이 열린우리당의 개혁 지체와 노무현의 우편향 정치에 따른 지지층의 이반에 있었다고 보고 개혁주의를 좀 더 적극적으로 표방하되 노무현과는 거리를 두고 시시비비를 가리는 '비노 개혁주의' 노선을 주요 전선으로 설정하는 것이다.
두 구도 모두 지역연합 전선의 전술적 운용을 배제하지 않으며, 단계적 후보단일화를 포함한 유연한 후보전술을 배제하지 않는다. 두 구도가 서로를 배타적으로 배제하는 것은 더욱 아니다. 문제는 전선운용의 헤게모니와 주도성이다.
이 점과 관련해 위의 첫 번째 구도가 그동안 한나라당이 만들어 온 '반노 반좌파' 프레임의 결과적 승인으로 낙착될 수 있고, 두 번째 구도가 범여권 개혁세력이 만들려 했던 '반우파 개혁' 프레임의 최종적 완성으로 될 수도 있다는 점은 분명한 듯하다. 서로 배제하지는 않으나 어떤 프레임을 주요전선으로 선택하는가에 따라 정치구도는 물론 역사흐름까지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결별하는 한이 있어도 더 치열하게 논쟁해야
노무현 대통령은 정치적 성공을 위해서는 대의명분과 세와 전략을 갖추어야 한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노무현 대통령이나 범여권 대선주자들은 지금의 어려움을 세의 부족에서 찾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범여권의 어려움은 대의명분을 제대로 세우지 못한 데에서 시작된 것 같다. 세의 부족은 그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다.
범여권의 갈등과 논쟁이 대의명분과 전략을 둘러싸고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한나라당과 달리 여권이 아직은 상대적 건강성을 갖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는 유력한 근거다. 그러므로 범여권은 논쟁을 봉합할 것이 아니라 좀 더 확대 심화시켜야 한다. 정치적 결별을 앞둔 명분세우기나 친노, 반노, 비노를 정치적으로 정해놓고 거기에 내용을 채워나가는 정치공학적 논쟁이어서는 안된다. '다름'과 '차이'에 대한 이해와 존중을 전제로 치열하게 전개하는 민주적 정치토론이어야 한다. 생각의 차이에 따라 당당하게 결별하는 것도 불사하는 정치행위로서의 토론이어야 한다.
상대가 강하고 상황이 엄중할수록 내부 민주주의의 활성화를 통해 잠재력을 극대화하고 전선의 참여도와 긴장도를 높여야 한다. 바로 그것이 내부의 '차이'를 발전적으로 해소하고 상대와 '다름'을 극대화함으로써 전선을 구체화하는 길이다. 내부를 다시 세우고 외부의 지지자를 끌어들여 자신의 세를 키우고 이기는 판을 만들어가는 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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