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말대로 '9월 위기설'은 과장된 측면이 있다. 하지만 '위기설'의 본질은 9월이라는 특정 시점에 한국경제가 위기를 맞아 추락하느냐에 있지 않다. '위기설'이 시중에 유통될만큼 한국경제가 어려운 상황이라는데 있다. 따라서 정책 주체인 정부의 태도도 '11일만 지나고 보자'는 식이어서는 곤란하다.
지난 수년 간 부진의 늪에 빠진 경제가 좀처럼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 빚에 의존하는 가계는 소비주체로서 활력을 잃은 지 오래고 금융시장에는 위기설마저 유행처럼 떠돌고 있다. 한켠에서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한 기업이 유동자산을 내부유보하기 급급한 모습을 보이는 반면, 주가 상승기에 과감한 인수·합병(M&A)에 나섰던 기업 일부는 유동성 위기설에 시달리며 활력을 잃고 있다.
상황이 이런데도 정부는 '위기는 없다'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정부의 태도는 경제주체들의 비판만 사고 있다. 좌우 이념을 넘어 현실 경제참가자들마저 정부를 비난하는 게 이를 입증한다. '관치금융' 논란을 다시 불러일으킬 정도로 정부는 금융시장에 강력하게 개입하고 있지만 일각에서는 정부의 개입이 문제를 더 키우고 있다고 말한다. 정부가 과거 독재정권에서나 볼 수 있었던 풍경인 '경제인 사면과 기업투자 맞바꾸기'마저 아무렇지 않게 생각할 정도로 '시장주의'와는 거리가 먼 행보를 보여주면서 경제주체들이 정부에 갖는 신뢰는 이미 바닥으로 떨어진지 오래다.
이런 문제의식에 기반해 <프레시안>은 정부가 '위기설 진화'의 시점으로 잡은 11일을 전후해 곳곳에서 잡음을 내고 있는 한국 경제가 부진의 늪에서 탈출할 방법에 대해 논하는 기획 기사를 준비했다. 전문가들은 현 한국경제의 '치료방법'에 대해 대체로 원론적인 대답을 내놓았지만 "정부가 시스템을 갖추고 순환하는 경제에 함부로 손을 대서는 안 된다"는 데서는 전문가들의 의견이 대체로 일치했다. 국제경제 부진까지 겹쳐진 마당에 어찌 보면 뚜렷한 해법이 보이지 않는 것은 당연한데 정부가 '경기진작'을 핑계로 함부로 부양책을 쓰거나 특정 계층에 이익이 몰리는 정책을 펼쳐서는 안 된다는 지적이다. <프레시안>은 총 5회에 걸쳐 위기설마저 몰고 올 정도로 부진의 늪에 빠진 한국 경제의 현주소를 짚어보고 적절한 대응방안은 무엇인지를 찾아본다. 편집자
5분기 째 이어지는 상승행진으로 2/4분기 가계부채가 660조 원마저 넘었다. 지난해 3/4분기 사상 처음으로 600조 원을 넘어선 이후 부채 증가세가 계속 이어지면서 어느새 가계 빚은 가구당 3960만 원에 이를 정도로 늘어났다.
이미 한계 상황에 내몰린 저소득층 일부는 이제 '빚을 내서 빚을 막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서민층의 빚 증가가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늘어난다면 중산층은 주택구입자금을 마련하려다 빚의 늪에 빠져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다. 2/4분기 주택용도대출이 가계대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47.1%에 이를 정도로 늘어났다.
이 상황은 앞으로도 지속될 것으로 관측된다. 중도금과 잔금 납부 부담이 계속 이어질 게 뻔하기 때문이다. 늘어나는 빚을 감당하지 못해 집을 경매에 내놓는 가구마저 늘어나고 있다. 법원경매 전문업체 지지옥션에 따르면 지난달 수도권 지역에서 법원경매에 부쳐진 주택 물건은 지난 7월 1493건에 비해 40% 가량 증가한 2085건에 달했다.
가계 부채, 이미 미국과 비교 가능한 수준
원리금 상환 부담이 커질수록 가계의 소비는 더욱 부진해질 게 확실시된다. 이는 소비 위축으로 이어져 내수 침체를 심화시키면서 경기 침체의 장기화를 이끌 가능성이 높다. 지난 5일 한국은행 발표에 따르면 가계의 실질구매력을 나타내는 국민총소득(GNI)은 1분기에 이어 2분기에도 1%대 성장에 머물렀다.
게다가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 물가 상승 압력 때문에 한은이 추가로 금리를 인상할 가능성까지 염두에 두면 가계발 신용경색 문제는 자칫 한국 경제를 안에서부터 붕괴시킬 뇌관이 될 수도 있다. 이미 7월 가계대출 금리는 7%마저 넘어섰다. 가구당 부채가 4000만 원에 이르는 만큼 한은이 금리를 1%포인트 추가 인상할 때마다 각 가구는 연간 40만 원의 이자를 더 부담해야 한다. 당장 서브프라임론 문제가 장기화하면서 금융시장 전체 위기로 확대된 미국의 경우가 이와 같은 형태다.
일각에서는 "부채가 늘어나는 속도가 빠르기는 하지만 아직 절대적 수준에서는 위기라고 부르기 어렵다"는 주장도 있다. 실제로 지난 6월 말 현재 국내 은행의 가계대출 연체율은 0.52%로 '위기'라고 부를 정도는 아니다. 한국 주택시장의 경우 미국보다 규제가 강력해 부동산 문제가 금융문제로 번질 가능성도 비교적 낮다.
하지만 그 못지않게 가계의 절대 부채규모 자체가 빚에 의존해 실물경제가 돌아가는 대표적 국가 미국과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늘어났다. 지난 2005년 146.3%를 기록한 이후 이미 한국 가계의 '가처분소득 대비 부채비율'은 미국을 추월했다. 당장 가계 경제에 문제가 닥쳤을 경우 신속하게 처분 가능한 소득의 약 1.46배 가량이 빚이라는 말이다. 지난해의 경우 한국은 148.1%, 미국은 139.4%였다. 만약 부동산 가격이 급락해 처분 가능한 자산의 시장가격이 떨어진다면 이 폭은 더욱 커진다.
정부 해법은 어디 있나…노무현 정권 때보다 취약한 위기 대응 능력
실물경제를 떠받치는 가계 경제가 이처럼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정부는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다. 정부가 지난달부터 지금까지 경기 부진에 대응해 자신감을 보인 것은 '9월 위기설'의 진앙지로 꼽힌 외환시장만을 표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큰소리친 게 전부다. 정작 실물경제 부문에서 정부의 대응책은 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대규모 감세 정책과 부동산 경기 부양책이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민'과 연관된 정부의 대응이라 해봤자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 4일 서울 중곡동 제일시장을 찾아 직접 장을 본 게 유일하다.
특히 정부 경제정책 수장인 강만수 장관은 한 걸음 나아가 가계 주체들의 시각과는 동떨어진 듯한 상황 인식 수준을 여실히 보여주기도 했다. 그는 감세 정책을 두고 터진 논란에서 "통계청에서 이야기할 때 자기가 고소득층이라고 생각하는 기준이 2%인데, 이를 대충 기준으로 하면 소득 8800만 원 이하가 중산층"이라고 말해 빈축을 샀다. 그는 또 KBS <단박인터뷰>에 출연해서는 "세금 못내는 사람은 줄여 주려고 해도 없지 않느냐"고 평소 생각을 밝히기도 했다.
이와 같은 경제정책 당국의 현실 인식이 비판의 도마에 오르자 정부는 뒤늦게 서민을 위한 대책을 발표했다. 5일 이명박 대통령 주재로 열린 관계부처 회의에서 추려진 '생활공감 정책' 67개 과제가 그것이다. 하지만 이마저 기존에 발표됐던 정책을 재탕하는데 그쳐 급조됐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대표적인 게 생계형 음식점의 경우 개업할 때 국민주택채권 매입의무를 폐지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지난 6월에 이미 국무회의에서 개선과제로 선정된 내용이다. 노동부가 발표한 청년고용 촉진대책은 지난달 내놓은 그것과 완전히 똑같고 보건복지부 발표안 10개 중 7개도 기존 내용을 그대로 옮겨다놓은 데 불과하다.
이처럼 정부 정책이 시기와 상황에 맞지 않게 나오면서 시장의 불신은 깊어지고 있다. 한 증권사 이코노미스트는 "어쩔 수 없이 비교하게 되는데, 정부의 경기대응 능력이 지난 노무현 정권보다 더 취약하다고 본다. 시장이 문제를 제기할 때마다 '오해다'는 해명 밖에 안 하니 농담 삼아 '오해 정권'이라 불리는 것 아니냐"고 지적했다.
시민단체의 반발도 갈수록 커지고 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은 정부의 세제개편안이 나온 즉시 성명을 통해 "서민과 중소기업보다는 자산보유자 등 부자나 대기업 중심으로 혜택이 집중돼 조세정책의 효율성을 담보하지 못하고 있다"며 정부 정책에 아쉬움을 표시했다.
최악상황 피하기 위해 재정정책 강화해야
사실 허덕이는 가계 문제를 해결할 돌파구를 쉽게 찾기는 어렵다. 단순히 현 정부에만 비판의 초점을 두기 어려울 정도로 오랜 기간 지속된 문제기 때문이다. 주택 구입을 위해 모기지를 활용하는 데 따른 문제는 한국뿐만 아니라 대부분 국가에서 떠안은 고민이기도 하다. 정부가 뚜렷한 정책을 제시하기 어려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함부로 시장에 손을 댔다간 자칫 시장 왜곡 현상이 더 심화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를 떠나 정부가 상황에 맞지 않는 정책을 고집하는 것은 문제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했다. 부유층에 대한 증세를 통해 세수를 늘려 재정정책을 확대해야할 판국에 복지에서 당장 문제가 생길 것이 뻔한 감세정책을 밀어붙이는 데서 보이듯 정부의 현실 인식이 지나치게 안일하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지금이라도 적극적인 재정정책을 펼칠 필요가 있다고 제안한다. 물론 앞뒤 가리지 않는 재정정책 운용은 특정 계층의 반발을 부를 수 있는만큼 재정정책 운용의 전제조건인 '필요한 곳에만 직접적인 정책 개입을 해 부작용을 줄이는' 방식의 대책이 최선이다. 그 '필요한 곳'은 결국 가계문제의 핵심으로 떠오르고 있는 가계대출 부문이다.
고성수 건국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서민들에 한정해서 정부가 그들의 신용을 보완해 대출금리 인하를 유도하는 방식을 고려할 수 있다. 건전한 주택담보대출이 이뤄지도록 특정 계층에만 세제혜택을 주는 방식도 생각할 수 있는 카드"라고 말했다. 그는 특히 "지금 가계대출의 큰 문제는 변동금리형 모기지가 너무 많다는 것"이라며 "한계 차입자의 금융부담 증가가 결국 가계부도로 이어지고 그 근원에 변동금리 대출이 자리하는 만큼 정부가 은행의 고정금리 대출을 유인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전성인 홍익대 경제학과 교수는 나아가 이미 대출 부담을 이기지 못해 시장경제에서 탈락해버린 파산자들을 구제할만한 대책을 서둘러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들이 다시 시장으로 돌아올 수 있는 길을 열어야 큰 틀에서 사회문제로까지 이어지는 가계 부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말이다.
전 교수는 "정책의 가장 중요한 철학은 '비오는 날에 우산을 뺏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를 은행에 강요해 시장 논리와 맞지 않게 가계 대출을 늘리게 하는 것은 해법이 아니다. 통합도산법상 개인 회생절차를 고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 교수의 말은 결국 빚을 쓰는 사람은 조금씩이라도 갚게 유도하면서도 만기연장 등을 통해 그들의 부담을 완화하는 방법을 찾자는 것이다.
물론 현재도 신용회복지원위원회 등 관련 기관에서 개인회생 절차를 운용하고 있다. 하지만 역대 정부의 정책은 이제까지 '연체가 있으나 아직 경제활동은 하는 사람', 즉 신용에 문제가 있지만 경제활동은 영위하는 사람의 신용회복에만 초점이 맞춰졌다. 연체를 못 이겨 경제활동 자체가 멈춘 사람에 대한 지원은 부족한 게 사실이다. 이 부분을 어떻게든 손봐야 가계경제 회복의 주춧돌을 놓을 수 있다는 게 전 교수의 설명이다. 경기 부진의 늪에 지속적으로 경제활동 이탈자가 생긴다면 이는 경제문제에서 나아가 사회문제로 이어질 수 있더 파장이 더 커질 수 있다.
그는 "금리를 쉽게 건드리기는 어려운만큼 이자는 좀 높게 물더라도 롤오버를 통해 만기를 연장해주고 더 이상 대출이 확장되지 않도록 하는 조치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 개인에게 초점을 맞춘 자산관리공사의 성격의 관계부서나 공사를 만드는 것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며 "사회문제로까지 확산되지 않도록 경제파산자가 다시 경제주체로 일어설 수 있도록 하는 리사이클링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상조 한성대 무역학과 교수는 결국 정부의 적극적인 재정지출 정책이 필요한 시기라는 데 힘을 줬다. 그래야 빚에 허덕이는 취약계층을 보호할 수 있다는 얘기다. 재정정책 운용을 통한 복지가 위기의 불을 끌 수 있는 해법이라는 말이다.
김 교수는 "감세정책은 기본적으로 재정 측면에서 경기를 떠받드는 효과가 없다. 오히려 감세정책과 맞물리는 환율방어용 외환보유고 소진이 금리인하 유혹으로까지 이어져 최악의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며 "지금 당장은 고통스럽더라도 부채부담 문제를 더 이상 악화시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재정 지출을 늘려 경기 침체를 방어하고 직접 물가 인상과 경기 침체의 타격을 받는 서민층을 대상으로 복지지원을 더 늘릴 수 있는 재정확대가 더 바람직하다. 감세는 답이 아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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