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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 잃은 정부가 어떻게 '위기설' 달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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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신뢰 잃은 정부가 어떻게 '위기설' 달래나

전문가들 "시장에 투명한 정보 공개만이 방법" 한 목소리

금융시장은 실물경제를 비추는 거울이다. 반등하긴 했지만 여전히 1400선마저 위협받는 코스피지수와 1140원선을 돌파할 정도로 급격하게 치솟는 환율은 아픈 한국 경제의 현실을 고스란히 대변하고 있다. 단순히만 놓고 본다면 실물경제가 좋지 않으니 한국 돈이 환시장에서 싸게 팔리고 상장기업 주가가 하락하는 것이 지금 상황이다. 시장에 떠도는 '9월 위기설'의 현실성 여부를 떠나 현 경제상황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그에 걸맞은 대응방안이 마련돼야 하는 이유다.

하지만 정부 당국의 책임 있는 모습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쇠고기 파동과 같은 잘못된 정보의 확산(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 "정부의 대응 능력에 대해 의구심을 갖지 말라(김동수 기획재정부 1차관)"는 정부 당국자의 주장을 많은 시민들은 '불편한 진실'에 애써 눈을 감는 행위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지금 문제는 정부 신뢰의 문제"라며 정부가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며 시장과 소통하기를 주문하고 있다.

신음하는 실물경제

위기설이 확산되는 근본 원인은 정부 말대로 '현실성 낮은' 67억 달러 이상의 외채 동시 만기상환 우려 때문이 아니다. 한국 경제의 체력 자체가 약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픈 경제를 구성하는 경제주체의 위축된 심리가 '위기설'에 동요하는 것은 당연하다.

당장 경제주체들의 주머니가 가벼워졌다. 전년대비 소비자물가는 벌써 석 달 연속 5% 이상 올랐다. 물가가 1년 전에 비해 6% 가까이 오른 반면 상반기 임금인상률은 5.1%에 불과하다. 소득이 늘지 않으니 씀씀이가 줄어들고 이는 내수경기 악화로 이어진다. 그리스를 제외하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가 중 가장 높은 수준의 자영업자 비율을 보이는 한국 경제의 특성상 내수경기 둔화가 가계에 미치는 영향은 다른 나라에 비해 매우 크다.

악순환의 고리는 계속된다. 위축된 내수경기는 다시 소득 둔화를 불러온다. 여기에 고용 부진까지 침체의 깊이를 더한다. 지난해 7월 30만 명이던 신규취업자수는 딱 1년 만에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올 들어 다섯 달 연속 당초 정부가 공언한 20만 명에 미치지 못했다.

경기진작의 군불을 떼기는커녕 한기를 느끼고 있는 가계의 현실을 숫자가 입증한다. 한국은행이 집계한 1분기 가계부채는 640조 원을 넘어 사상 최고 수준에 이르고 있다. 외환위기 발생 당시의 3배가 넘는 수치다. 이에 따라 국내총생산(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도 외환위기 직후 40%대에서 60%후반대까지 뛰어오를 것이 확실시되고 있다.

여기에 물가 안정을 위한 금리 인상은 가계의 목줄을 더 죄어 온다. 그래서 외채상환 부담보다 오히려 경제에 더 큰 타격을 줄 수도 있다는 일각의 경고가 나온다. 그렇다고 금리를 그대로 둔다면 안 그래도 오르는 원자재값에 환율인상까지 겹쳐 물가인상에 따른 부작용을 제어하기가 더 어려워진다.

대규모 카드채 문제로 3%대의 저조한 경제성장률을 기록했지만 대외여건은 상대적으로 양호했던 2003년과 달리 지금은 해외시장 상황도 우호적이지 않다. 당장 저조한 내수에도 불구하고 경제성장률을 이끌어온 수출 부문에 비상이 걸렸다. 외국 경기의 동반 침체와 공급과잉 등에 따라 수출 주도 품목인 IT제품 수출 증가율이 급격히 위축됐기 때문이다.

3일 지식경제부가 발표한 8월 IT산업 수출입동향에 따르면, IT 수출은 115억3000만 달러였다.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겨우 0.02% 증가한 것으로 이 기간 각국 경제성장 등을 감안하면 사실상 제로 성장에 가깝다. 특히 중국 수출 증가율은 2.3%에 그쳤고 EU지역의 경우 지난해보다 11.5% 감소했다.

수출 전선에 먹구름이 낀 조짐은 박희태 한나라당 대표도 시인했듯 10년 만에 처음으로 현재와 미래의 경기지표가 모두 마이너스를 보일 정도로 악화된 국제수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지난 7월 국제수지는 82억 달러 적자를 기록했다. 경상수지의 적자 행진이 계속된 데다 주식시장의 외국인 엑소더스로 자본수지에서만 58억 달러 적자였다.
▲3일 원-달러 환율은 오전 한 때 1152원까지 오르기도 했다. 원화값이 그만큼 싸졌다는 얘기다. ⓒ뉴시스

답은 '시장의 신뢰 회복'이라는데…

전문가들은 이처럼 근 5년 만에 가장 큰 소리를 내며 삐걱대는 실물경제의 둔화세가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전망한다.

권순우 삼성경제연구소 거시경제실장은 "하반기 경제성장률은 3%대로 떨어질 것이며 내년에도 어려울 것으로 본다. 내수시장을 중심으로 경기가 빠른 속도로 위축되고 있다"며 "이 자체만으로 경제주체들의 투자심리가 위축되는 등 당분간 어려움이 이어질 것"으로 내다봤다.

경기침체는 경제주체의 자신감을 떨어뜨리고 그 위에 퍼지는 위기설은 약화된 경제주체의 심리를 잠식한다. "대규모 외채 만기 도래가 경제 위기로 이어질 것"이라는 이른바 '9월 위기설'이 외환위기 체제의 트라우마를 간직한 한국경제의 특수성 때문에 어떤 루머보다 빨리 시장에 퍼지는 이유다.

권순우 실장은 "외환위기의 기억을 갖고 있는 상황에서 시장이 자꾸 외환 부분을 크게 인식하다보니 '금융시장 동요-외국인 자금 이탈'로 이어지는 현 상황에서 당시 기억을 떠올리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다만 "펀더멘털이 과거와는 현격한 차이가 있는 만큼 현실성은 떨어지는 얘기"라고 언급했다.

이런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정부 당국이 시장의 신뢰를 얻는 것이며 이를 위해 정부는 시장의 의혹에 최대한 성실히 자세한 정보를 제공할 필요가 있다는데 경제전문가들은 의견을 일치했다.

박대근 한양대 경제금융학부 교수는 "당장 필요한 것은 정부가 '괜찮다'는 말만 하는 게 아니라 시장에 정확한 정보를 알려줘 우려를 없애는 것"이라며 "'외환보유고는 어느 나라나 기밀'이라는 식의 논리로 말을 아끼지 말고 시장의 의심을 잠재울 수 있도록 성실한 태도를 보여야 한다"고 조언했다.

유종일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도 "금융시장이 '패닉'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심각하게 동요하고 있는데 시장 안정이 절체절명의 과제다. 금융시장 안정은 실물경제 회생을 위해 매우 중요하다"며 "이미 '위기'에 시장의 컨센서스가 형성된 상황에서 방법은 하나 밖에 없다. 정부가 최대한 디테일하고 투명하게 정보를 공개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부의 대응 방법은 전문가들의 바람과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인다. 기준이 애매모호한 시장의 경제인식을 '루머'로 치부해 '당장 시끄러운 소리나 막고 보자'는 듯한 인상마저 풍긴다. 당장 이날 금융감독원이 "위기설을 단속하기 위해 사법 처리도 불사하겠다"며 특별 단속반까지 만든 게 대표적 사례다. 여기에 정부 당국자들 역시 "위기설은 근거 없는 소문"이라는 말 이상의 구체적 대응방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지금이 인기영합적 감세 정책이나 내놓을 때냐"

이처럼 현실성을 잃은 정부의 대응은 오히려 위기설에 불을 붙여 경제주체의 심리를 얼어붙게 만드는 데 한 몫 하고 있다. 한 시장관계자는 "안 그래도 환율 급등으로 정신이 없는데 정부가 제대로 된 해답을 내놓지 못하니 위기설이 자꾸 떠도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여기에 실물경제 대책이라고 내놓은 감세 정책, 부동산 경기 활성화 방안마저 시장에서 외면당하는 처지여서 정부의 신뢰는 더욱 땅에 떨어지고 있다. 당장 일부 보수 언론에서마저 "부자만을 위한 정책 아니냐"는 우려를 표할 정도다.

유종일 교수는 "금융시장 패닉은 결국 시장이 미래에 대해 암울한 판단을 내렸음을 의미한다. 그 근간에는 정부에 대한 불신도 상당 부분 담겨 있다"며 "지금이라도 실효성이 떨어지는 감세 정책 등의 인기영합책에 집착하지 말고 시장의 신뢰를 얻기 위해 정부가 노력해야 한다. 어차피 일정 부분의 고통은 감내할 수밖에 없는데 그 고통을 최대한 줄이는 게 정부가 할 일"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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