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산 쇠고기 파동은 먹을거리에 대한 관심을 더욱 증폭시켰다. 때를 맞춰 대기업의 주도로 유전자 조작(GM) 옥수수가 본격적으로 수입됐다. 촛불 집회 현장에서는 '미국산 쇠고기 전면 수입 반대'와 함께 'GMO 반대'가 적힌 피켓의 숫자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정부의 해결책은 만연한 불안감을 해소하기에는 거리가 멀다. 안전한 쇠고기를 먹고 싶다는 국민 앞에서 미국산 쇠고기를 시식해보인 정부는 다른 식량 정책에도 엇비슷한 수준의 대책을 내놓고 있다. GM 식품의 안전성을 의심하는 국민 앞에서, 높아지는 곡물 가격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핑계를 대고 있다.
식량 위기 시대에 대비한다며 정부가 과감히 내놓은 정책은 해외 농업 기지 개발이다. 이 같은 정책을 한미 자유무역협정이 체결되면 농업이 몰락할 것이라는 지적에 "농업은 포기해야 할 산업"이라던 정부의 주장과 비교하면 심각한 모순이 발견된다.
그런데 이런 진단과 처방은 전세계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목소리가 큰 선진국과 대기업은 식량 위기를 논하는 전세계 농부와 소비자 앞에서 '더 많이, 더 빠르게 생산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주장을 펼쳐왔다.
"내 주위 모든 전문가들이 이제 지구가 우리를 부양하기에는 한계에 부닥쳤다는 얘기를 하면서 바로 손을 쓰지 않으면 곧 기근이 닥칠 것이라고 예견하고 있었다. 더 많은 농약, 더 큰 규모의 농장, 더 많은 신기술. 이것이 그 당시의 진언이었다."
1971년, 식생활의 변화를 역설하며 <작은 행성을 위한 식단>을 저술한 미국의 먹을거리 운동가 프란시스 무어 라페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상했다. 이 같은 논리는 여전히 유효하다. 식량 생산 증가율이 인구 증가율을 따라잡지 못해 인류는 위기를 맞게 될 것이라는 맬서스의 이론은 아직도 교육 현장에서 거론되지만, 식량 생산이 증가하는데도 기아로 죽어가는 숫자도 증가하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2002년, 프란시스 무어 라페와 그의 딸 안나 라페는 세계 각국의 농민 운동과 빈민 운동 현장을 다룬 <희망의 경계>를 써 또 다시 화제를 불렀다. 이들은 미국의 로컬푸드, 브라질의 '땅 없는 농민 운동(MST)', 유럽의 GMO 반대 운동의 현장을 소개하며, 희망의 경계를 확장한 사람들을 이야기했다.
어머니 라페를 이어 미국 내에서 식량 문제에 관해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안나 라페. 그는 지금 식량 주권과 기후 변화가 식량 위기에 끼치는 영향을 주제로 한 또 다른 책을 준비 중이다. 특히 미국산 쇠고기 전면수입 반대 운동이 벌어졌던 한국의 농업 현실과 농민 운동은 그가 주목한 현상 중 하나다. 조사를 위해 그는 지난 달 23일부터 28일까지 한국을 방문했다.
한국 농업 현실에서 그는 어떤 희망을 만났을까. 지난 달 28일, 서울 명동의 한 카페에서 안나 라페를 만났다.
"모두들 말했다. 이것은 쇠고기 문제가 아니라고"
"매우 인상깊었다."
안나 라페는 방한 소감에 대한 질문에 이렇게 운을 뗐다. 5일간 이어졌던 그의 일정은 빠듯했다. 소비자단체 한살림과 한국생협연합회를 방문하고, 농업 문제를 연구하는 지역재단을 들렀으며, 전국농민회연합과 전국여성농민회연합 등 농민단체를 잇따라 찾았다.
때맞춰 열린 세계농민연합 '비아 캄페치나' 심포지엄 참석과 강원도 농가 방문도 주요 일정 중 하나였다. 그는 시간이 여의치 않아 서울 조계사에 피신해 있는 광우병 국민대책회의 관계자들을 만나지 못한 점을 아쉬워했다.
"소비자 생협과 농민단체 모두의 활동이 인상깊었다. 사람들이 말했다. 이것은 단순히 쇠고기 문제가 아니라고. 이것은 근본적으로 우리가 이 나라에서 어떤 음식을 먹고, 또 음식을 고를 수 있는 권리가 있는지, 그런 권리를 쟁취할 힘이 있는지에 대한 문제라고 했다. 그렇게 여기에서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은 촛불 집회와 이번 정국이 단순히 쇠고기 문제 때문은 아니라는 것을 강조했다.
그리고 한국의 식문화가 아직 강하게 있는 것에도 감명을 받았다. 알지 않는가. 미국식 음식문화가 얼마나 세계를 오염시키고 있는지."
그가 주목한 것은 미국산 쇠고기의 안전성 여부에 관한 논의보다, 그로부터 촉발된 농민과 소비자들의 저항이었다. 그는 '단순히 쇠고기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라고 했던 사람들의 말을 곱씹었다. 그는 쇠고기 협상에서 불거진 문제점을 주목할 때, 국제 식량 구조가 안고 있는 문제점과 국제 무역법의 모순, 국제기구의 정치적 성격 등 세계 경제의 실상을 발견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같은 논리는 전 세계를 들끓게 하는 식량 위기설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식량 위기는 한가지 원인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는 왜 특정 국가들이 식량가 상승과 하락에 매우 취약하냐는 점이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이렇다. 여러 해 동안 진행된 국제적 농업 무역 정책, 식량 정책 등이 약소국의 농업 시장을 열었고, 강대국의 국가보조금을 받은 싼 곡식들은 그들의 농민 공동체를 위협했다. 대부분의 약소 국가에서 농촌이 파괴되고, 생산량이 감소했으며 이는 자연스럽게 식량에 대한 자생력을 잃고 수입 식량에 대한 의존도를 높였다.
또 올해 식량 위기는 지역별 식량 코뮨 구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주는 계기라고 본다. 또 단순한 영양학적 위주의 몇몇 식품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 다양한 식량 공동체를 구성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준다. 기후 변화의 폭이 점점 높아지고, 식량 교역량이 더욱 많아질수록, 같은 비율로 대규모 투기에 시장이 노출될 가능성은 높아진다.
특히 지난 해 미국에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발생된 뒤, 투기 자본들은 농업 시장을 찾아 왔다. 이후 수많은 투기 자본이 식량 시장에 유입된 것을 볼 수 있다."
"GM 작물과 식량 위기 사이에 무슨 상관관계가 있나"
이 때문에 안나 라페는 전세계 언론과 주류 경제학을 중심으로 식량 위기의 원인을 바이오 연료 생산으로 지목했던 것에 대해 '근시안적 분석'이라고 지적했다.
"바이오 연료가 한 가지 원인이라고 할 수는 있을 것이다. 바이오 연료는 분명 생산된 작물을 소비한다. 현재 미국에서 생산되는 옥수수 중 약 3분의 1이 바이오 연료에 쓰인다. 그러나 식량 위기가 단지 그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이는 다른 말로, 특히 미국에서 매우 좁은 관점의 에너지 정책을 펴고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본다.
즉 바이오 연료에 관한 더 큰 교훈은 기후 변화 정책을 잘못 수립할 경우 환경적으로 더 큰 해를 입힌다는 점이다. 우리는 물론 데이터를 근거로 바이오 연료가 많은 양의 곡식을 가져가고 있다고 비판할 수 있다. 사실 바이오 연료가 만들어진 이후 언제나 있어온 비판이었다. 소비자들은 기후 변화로 이익을 보는 회사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한편, 그는 식량 위기에 대한 해결책으로 GM 작물과 해외 식량 기지를 언급하는 한국 정부의 정책에 대해 "너무 어이가 없다"고 평했다.
"문제를 해결하려는 좋은 리더가 되려면 맨 처음 그 문제가 왜 발생했는지를 살펴야 한다. 왜 한국에 식량 위기가 생겼는지 살펴본다면, GM 작물 수입과 그 위기 사이에 아무 연관 관계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근본적인 위기의 원인 중 하나는 농산물에 대한 높은 수입 의존도로 인해 세계 곡물가 변동에 너무 취약하고, 지역 농업 공동체의 기반이 취약하다는 점이다. 그것을 GM 작물로 해결한다? 어림없는 일이다. 몬산토와 같은 3~4개의 농업 기업이 세계 곡물 시장을 좌우하고 있고, 몇몇 초국적 기업에 대한 집중화가 이뤄지고 있다는 것, 즉 자라나고 있는 초국적 자본이 문제다. 위기는 투기 자본에 의해 조장되는 측면이 크기 때문이다.
해외 식량 기지? 별다른 말을 하고 싶지 않다. 말도 안 되는 정책이다. 미국의 경우를 본다면, 역사적으로 미국은 세계은행이나 IMF 등을 통해 개발도상국이 식량을 수출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개발도상국들이 자국 농업에 관한 자치권을 잃게 만드는 주요 원인 중 하나였다. 국제 금융기구들은 개발을 핑계로 식량 수출을 부추기면서 돈을 빌려줬다. 대출의 조건으로 그들은 돈이 되는 작물을 가꾸게 하고, 이를 미국과 유럽에 수출하게 했다. 그런데 부채가 해결되기는 커녕 해가 갈수록 농작물 가격은 낮아졌다. 해외 식량 기지는 아니었지만, 싸게 농작물을 수입하는 방법이었다. 그리고 이는 전세계의 농업을 망쳐놓았다."
"잘 활용하면, 로컬푸드 운동은 핵심 전략이 될 수 있다"
현재 미국과 캐나다, 그리고 유럽 국가를 중심으로 안나 라페와 같은 문제 의식을 지닌 먹을거리 운동이 확산되고 있다. 100마일 식단, 농민시장, 마을 텃발 등으로 널리 알려진 로컬푸드(지역 먹을거리) 운동은 지역 농민을 살리는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다. 이는 식량 위기, 식량 주권에 관한 논의와 함께 전세계적으로 최근 큰 주목을 받는 움직임이기도 하다.
그러나 북미와 유럽, 일본 등지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로컬푸드 운동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다. 실제로 외채와 기아, 기후 변화로 인한 사막화 등에 고통받는 아시아, 남미, 아프리카 등 다른 대륙의 운동과는 사뭇 성격이 다르다. 심지어 유기농업 상품화와 마찬가지로 로컬푸드 역시 구매력이 있는 소수만을 위한 운동이 아니냐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국내에서 이제 막 시작되는 로컬푸드 운동이 주의를 기울여야 할 지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에 대해 안나 라페는 "한 가지 면만 보아선 안 된다"고 다시 한 번 강조했다.
"나 역시 미국 내 로컬푸드 운동이 일부 부유층을 위한 측면이 있다는 점에 동의한다. 그러나 로컬푸드 운동이 모두를 위한 유일한 길이 아닌 이상, 이는 다른 식량 정책과 같이 펼쳐져야 한다. 실제로 도시 내 저소득층을 위한 텃밭 분배 등 다른 활동이 같이 이뤄지고 있지 않는가.
즉 단순히 현재의 로컬푸드와 유기농 제품이 비싸다는 점만을 두고 비판의 날을 세워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문제는 세계적인 관점이다. 특히 한국에서 로컬푸드 운동을 한다면, 그로 인해 누가 이익을 보느냐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만약 로컬푸드 운동에서 소농과 다양한 작물을 생산하는 지역 농가와 긴밀히 연결된다면 그것이 바로 세계화에 대응하는 핵심 전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유기농 제품을 코카 콜라사에서 사는 것과 한국의 전국여성농민회연합에서 사는 것은 차원이 다른 소비인 것처럼."
그는 지난 번 <희망의 경계>와 이번 책 저술을 위해 세계 각국을 여행하면서 전 세계가 '비슷한 문제'를 고민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고 말했다. 또 그는 너무 복잡하고 어렵다는 이유로 언론에서 식량 문제를 외면하고 있는 현상 또한 미국과 한국, 그리고 다른 국가들에 차이가 없다고 지적했다.
"각 나라의 상황과 역사와 세계 무역 구조는 다르지만, 고민은 비슷하다. 브라질, 케냐, 프랑스, 이탈리아, 방글라데시, 이곳 모두 똑같다. 나는 어딜 가도 몬산토나 카길에 대해 부차적인 설명 없이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우리가 같은 문제에 직면하고 있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미국의 식량 정책이 세계적으로 끼치는 영향을 이번 저술 과정에서 조사하는 이유다."
그의 발길은 동유럽으로 이어질 예정이다. 그는 특히 폴란드를 방문해 농업의 산업화가 얼마나 환경에 해로운지를 조사 연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는 "폴란드에는 특히 미국의 초국적 농업 기업들이 공장식 농업을 확장하려는 굵직한 시도가 있었다"고 말했다. 또 브라질을 방문해 카길 사와 바이오 연료 산업의 현장을 조사할 계획이라고도 덧붙였다.
전세계의 식량 위기, 그리고 농업의 세계화에 맞서 싸우는 농민들을 다루는 그의 책에서 한국의 미국산 쇠고기 반대 운동과 농민 운동은 어떤 모습으로 자리잡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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